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칠언극품(七言極品)
이백의 칠언절구에 대해 명나라 때의 시 평론가 허학이(許學夷)는 《시원변체(詩源辨體)》에서 “태백의 칠언절구는 대개 한 호흡에 완성된 것으로 가장 널리 부르는 형식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개원 13년(725년) 작품 《망천문산(望天門山)–천문산을 바라보다》을 예로 들었다.
《망천문산(望天門山)–천문산을 바라보다》
천문산이 중간에 끊겨 초강(楚江)이 열리고, 푸른 물은 동(東)으로 흐르다 이곳에서 돌아가네.양쪽 강변의 청산(靑山) 마주 대하는데 외로운 배 한 척 해 옆에서 나오네.
天門中斷楚江開(천문중단초강개)碧水東流至此回(벽수동류지차회)兩岸青山相對出(양안청산상대출)孤帆一片日邊來(고범일편일변래)
호탕하게 동쪽으로 흐르던 초강(楚江)이 천문산에 부딪혀 솟아오르고 푸르른 강물은 동으로 흐르다 이곳에서 휘감긴다. 강변 양쪽에는 청산이 우뚝 나타나는데 외로운 배 한 척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 시는 전체가 한 호흡으로 이루어져 넓게 확 트인 장관의 이미지로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끝없는 호방함과 활달한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망여산폭포2수(望廬山瀑布二首)–여산 폭포를 바라보다 제2수》
향로봉에 햇빛 비치니 자색 안개 일고멀리 폭포를 보니 긴 강줄기를 매달았네.곧추 날아 내리는 삼천 자 물길이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하수 같구나.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遙看瀑布掛前川(요간폭포괘전천)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낙구천)
이 시는 이백이 여산에 놀러가서 쓴 것으로 일설에는 개원 16년(728년)에 썼다고 한다. 시선은 직선으로 곧추 날아 내리는 폭포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묘사해 마치 한 폭의 살아 숨 쉬는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운어양추(韻語陽秋)》에서 중당시인 서응(徐凝)은 《폭포(瀑布)》라는 시에서 “천고에 흰 비단 날리는 것처럼 한 가닥 경계로 청산의 색을 깨뜨렸네(千古猶疑白練飛,一條界破青山色)”라고 노래했다.
《당송시순(唐宋詩醇)》에서 소동파는 “내가 처음 여산에 왔을 때 《여산기(廬山記)》를 보여주는 자가 있었다. 유람하면서 읽다보니 서응과 이백의 시가 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마침 개원사 주지가 시를 써달라고 청해 ‘상제가 은하수 한 가닥을 내려주시니 자고이래 오직 적선의 시뿐일세, 날아 내린 물보라 아무리 많아도 서응의 나쁜 시를 씻기 위함은 아니라네(帝遣銀河一派垂,古來唯有謫仙詞. 飛流濺沫知多少?不爲徐凝洗惡詩.)’라고 썼다.”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아미산 달 노래》
아미산의 가을 반달그 그림자 평강 강물 따라 흐르네.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니그리운 그대 보지 못하고 유주로 내려가네.
峨眉山月半輪秋(아미산월반륜추)影入平羌江水流(영입평강강수류)夜發清溪向三峽(야발청계향삼협)思君不見下渝州(사군불견하유주)
이 시는 대략 개원 13년(725년) 전에 이백이 촉을 떠나면서 쓴 작품이다. 그는 아미산의 달을 소재로 달을 노래하면서 촉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젊은 시절 이백의 시상이 우연한 기회에 촉발되어 천부적인 재능이 흘러넘침을 엿볼 수 있다. 《당시전주(唐詩箋注)》에서는 “군(君)은 달을 가리킨다. 아미산 달의 그림자가 강물을 따라 흐른다. 달빛을 타고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는데 문득 달이 보이지 않는데 배는 이미 유주로 내려갔다. 이 시는 그 자체로 신운(神韻)이 맑고 절륜하다.”라고 평가했다.
이백은 평생 수많은 명산대천과 큰 도읍을 다니면서 거의 모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아름다운 산하나 번화한 도시는 모두 그의 시가 속에서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의 인격과 애호는 또한 산수시 속에도 녹아들어 있다. 그는 노중(魯中 지금의 산동성 태안현 동남쪽)에서 공소보(孔巢父)•한준(韓準)•배정(裴政)•장숙명(張叔明)•도면(陶沔) 등과 더불어 조래산(徂徠山)에 은거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죽계육일(竹溪六逸 죽계의 여섯 은자)’이라 불렀다. 이백의 시에서는 종종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기개로 산림에 은거하거나 선(仙)을 배우는 수도인의 즐거운 생활 및 그가 본 선경과 빼어난 경치를 노래했다.
이외에도 이들 명산대천 중에서 그는 또 도(道 신선)나 신불(神佛)을 만나 교류할 수 있었으니 어찌 상쾌하지 않았으랴! 또 수많은 은거한 신선들 역시 이백과 자못 연분이 깊어 시선 이백의 방문을 기대하곤 했는데 상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서술한다.
이백의 작품 중에는 수도인의 순진하고 초탈하면서도 평안한 뜻을 담은 것들이 아주 많다. 《산중문답(山中問答)》도 그중 하나다.
《산중문답(山中問答)–산속에서 묻고 답하다》
그대는 어찌 하여 푸른 산에 사는가 물어도대답 없이 빙그레 마음이 한가롭네.복사꽃 흐르는 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별천지로세 인간 세상 아니로다.
問余何意棲碧山(문여하의서벽산)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개원 15년(727년) 이백이 안륙(安陸)에 온 얼마 후 전에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 집안의 초대를 받아 손녀사위가 된다. 이에 벽산(碧山)에 거처하며 독서하고 농사를 지었다. 이때 이백의 벗들은 그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은거 생활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고 의론이 분분했다. 이에 개원 17년 봄 이백이 이 시를 지어 문답의 형식으로 벗들의 의론에 대답한 것이다.
이 시는 담담하면서도 깊은 뜻을 지닌 칠언절구다. 전체가 겨우 네 구절에 불과하지만 물음과 대답 서술과 묘사가 있고 또 의론이 있다. 3~4구에서는 시인이 은거하는 생활환경을 세상 밖 도원(桃源)이나 방외의 도관처럼 묘사해 이 시기 시인의 정신적 추구와 세속을 벗어난 수도생활의 오묘한 자취와 즐거움을 은유했다.
《증왕륜(贈汪倫)–왕륜에게 주다》
이백이 배를 타고 떠나려하는데문득 언덕 위에 답가소리 들려오네.도화담 수심이 아무리 깊다한들나를 향한 왕륜의 정만 못하구나!
李白乘舟將欲行(이백승주장욕행)忽聞岸上踏歌聲(홀문안상답가성)桃花潭水深千尺(도화담수심수척)不及汪倫送我情(불급왕륜송아정)
시인이 배를 타고 멀리 떠나려하는데 문득 언덕위에서 어떤 사람이 땅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환송한다. 도화담의 수심이 비록 천 자나 된들 내게 보내는 왕륜의 우정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시는 이백이 천보 14년(755년) 경현(涇縣 지금의 안휘 남부)를 떠돌 때 현지 친구 왕륜에게 준 이별시다. 시에서는 먼저 이백이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왕륜이 답가를 부르면서 쫓아오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 감정이 순수하면서도 진솔하다. 뒤의 두 구절은 우선 천 자나 된다는 화담수의 깊은 수심을 찬미한 후 뒤이어 미치지 못한다로 이었다. 무형의 우정을 유형의 천길 담수와 비교해 이백에 대한 왕륜의 깊은 우정을 표현했다. 시 전체의 언어가 청신하면서 자연스러워 음미해보면 무궁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비록 4구절 28자에 불과하지만 널리 인구에 회자되면서 이백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의 하나다.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며》
아침 일찍 오색 구름 감도는 백제성을 이별하고천리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왔네.양쪽 강기슭의 원숭이 울음은 그치지 않는데가벼운 배는 어느 덧 만겹 산을 지나왔네.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부주)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당나라 숙종 건원(乾元) 2년(759년) 58세의 이백이 야랑으로 유배를 가다 백제성에 이르러 사면소식을 들었다. 이 시는 바로 이백이 유배를 가던 도중 사면되어 강릉으로 돌아올 때 지은 칠언절구다. 시의 의미는 백제성에서 강릉까지 이어지는 장강을 따라 펼쳐지는데 이곳은 강물의 낙차가 아주 커서 급류가 흐르고 배의 속도가 나는 듯 빠른 곳이다. 시인의 유쾌한 심정이 강산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 및 물길을 따라 경쾌하게 떠가는 배와 혼연일체가 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표일(飄逸)하고 호방하면서도 경쾌하고 원하는 일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가운데 자연스럽다. 이는 이백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유전되는 또 하나의 명편(名篇)이다.
이백은 격률이 엄격한 율시(律詩) 작품은 많지 않다. 하지만 천재는 필경 천재고 시선은 필경 시선이라 비록 이백이 쓴 율시가 아주 적긴 하지만 그중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台)–금릉 봉황대에 올라》와 같은 작품은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칠언율시의 극품(極品)으로 꼽힌다.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금릉 봉황대에 올라》
봉황대 위에는 봉황이 놀았거늘봉황 가고 대가 비니 강물만 절로 흐르네.오나라 궁터는 풀꽃이 우거져 길을 덮었고동진의 귀족들은 낡은 무덤이 되었구나!삼산의 절반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지고장강은 백로주(白鷺洲 모래톱)에서 갈라져 흐르는구나.뜬구름이 온통 햇빛을 가리니장안이 보이지 않아 시름 젖게 하누나!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三山半落青天外(삼산반락청천외)一水中分白鷺洲(일수중분백로주)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이 시는 당 현종 천보 연간에 이백이 ‘황금을 하사받고 산으로 귀향’하던 중 금릉을 유람하다가 쓴 작품이다. 봉황대는 옛날 금릉의 남서쪽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봉황을 줄곧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정해왔고 아름다운 시대에 하늘에서 봉황을 내려준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봉황이 왔던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화려했던 육조(六朝) 역시 이미 역사가 되었다. 오직 호한(浩瀚)한 장강의 물결만이 우뚝 솟은 봉황산과 함께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오나라 궁터는 풀꽃이 우거져 길을 덮었고 동진의 귀족들은 낡은 무덤이 되었구나”에서는 동오(東吳) 황제와 육조 시대 풍류인물들 및 많은 군왕들이 이미 무덤에 묻혀 역사의 흔적으로 남았음을 노래한다. 특히 과거 우뚝 솟았던 궁전이 이미 황폐하게 파괴되어 한조각 담벼락만 남았다. 풀꽃은 만발하고 천지는 그대로인데 모든 것은 다 법칙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이고 이것이 바로 천고의 흥망사(興亡史)다! 인간 세상의 백년은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고관대작을 지냈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다.
“삼산의 절반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지고 장강은 백로주에서 갈라져 흐르는구나”에서 삼산(三山)은 금릉 남서쪽 강변지역을 말한다. 《경정건강지(景定建康志)》에 따르면 “그 산에 쌓인 돌과 숲이 울창한데 큰 강가에 있으며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서 남북으로 연결되어 삼산이라 불린다.”고 했다. 강 속의 ‘백로주’는 금릉 서쪽 장강 속에 있는데 장강을 둘로 나눈다.
이 시를 지을 무렵에 이백은 막 장안을 떠났을 때였다. “뜬구름이 온통 햇빛을 가리니 장안이 보이지 않아 시름 젖게 하누나.” 뜬 구름을 생각하니 생각이 끝이 없다. 궁중에서 지낸 3년을 돌아보면 세상 일이 많이 어그러져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년의 연분을 맺었고 궁중의 인연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앞으로 영원한 복을 남겨주었다.
이백의 이 시는 산과 강을 소재로 삼아 경치를 따라 감정을 펼친 것으로 시인의 맑고 깨끗한 기질과 정회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고금의 시가 중에서 오직 적선(謫仙)만이 절창”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금릉 봉황대에 올라(登金陵鳳凰台)》는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와 흡사하지만 격률(格律)과 기세(氣勢)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찬사를 듣는다. 특히 일부 평론가들은 최호의 황학루는 단지 격률과 기세를 중시하고 의경이 소중할 뿐이지만 이백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는 경지(意境)가 초탈하고 그 사이에 고금의 흥망성쇠를 논해 여운이 무궁하기 때문에 더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