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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唐太宗)(1): 태종출세(太宗出世)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들어가는 말

요, 순, 우 세 성군(聖君)은 대홍수 이후 이번 차례 인류에서 중화 오천년 신전문명(神傳文明)을 개창해 백성을 교화하고 도덕을 숭상했다.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를 천하를 통일하고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친히 국가체제를 결정했으며 사상과 문화체계를 확립했다. 삼국시기에 이르러 조조, 유비, 손권, 제갈량, 주유는 함께 천추(千秋)에 길이 남을 큰 연극을 공연하며 ‘의(義)’의 내포를 원만하게 풀어냈다.

이들 천고영웅인물(千古英雄人物)들은 비록 조대(朝代)는 달라도 모두 신전문화를 개창하고 보호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서로 다른 천조(天朝 천자의 조정)의 중생들과 인연을 맺고 새로운 왕조의 새로운 문화를 풀어냈다. 한 막 한 막의 큰 연극은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릴 만큼 웅장한 기세로 환우(寰宇)를 밝게 비췄다.

서기 280년 삼국이 진(晉)나라로 귀결되면서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하지만 합치고 분리되는 변화 속에 수많은 천국의 생명들은 모두 중원(中原) 대무대(大舞台)에 한번 등장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팔왕의 난을 거치며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북쪽에는 오호십육국 남쪽에는 송(宋)〮〮・제(齊)・양(梁)・진(陳)이 잇따라 등장해 어지러운 혼란과 전란이 다시 나타났다. 또 3백년이 연기처럼 지나자 육조(六祖)의 화려한 기풍도 점차 사라졌다.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581년 새로운 통일왕조인 대수천조(大隋天朝)를 건립하면서 수당풍운(隋唐風雲)이 시작되었다.

수문제에서 수양제(隋煬帝)에 이르기까지, 이연(李淵)과 이세민(李世民)은 대업(大業) 13년(617년) 태원(太原)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천하가 태평해진 지 불과 몇십 년 만에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고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쟁의 발단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수천조(大隋天朝)는 막을 올리자마자 막이 내려왔고 연극은 곧 결말에 가까워졌다.

자고로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법이다. 하늘은 이때 반드시 세상에 내려가 건곤(乾坤)을 되돌릴 대각자를 배치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조대의 사람들을 맞이해 새로운 바람을 창립하게 하신다. ‘무력으로 천하를 정벌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림(兵征天下,王者治國)’에 전쟁은 피할 수 없고 여러 차례 전쟁으로 이미 인연 맺기를 끝낸 대수천조 중생들은 다른 나라로 보내 전생(轉生)하게 했다. 대신 중토(中土)에는 참신한 천조(天朝)가 다시 열려 고금에 빛나는 큰 연극이 다시 막을 올렸다.

대당(大唐) 태종(太宗)은 16세에 기병해 병사의 신분에서 출발해 말을 타고 활을 쏘았으며 늘 선봉에 서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삼군을 통수(統帥)한 후에는 가는 곳마다 적이 없었고 많은 적들을 평정해 중원을 안정시킨 후 천하를 통일했다.

군주로서 천하에 임한 후 태종은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고금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만방이 태평했던 정관성세(貞觀盛世)를 개창했다. 태종은 문무를 겸비하고 발군의 지혜를 지녔다. 황제가 되어서는 어진 선비들을 예우했고 겸손한 덕으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였으며 오직 뛰어난 인재들만 기용했다. 나라를 다스린 태종의 도(道)는 후세에 널리 추앙받게 되었다. 장군으로서는 군사를 이끌고 가는 곳마다 바람이 풀을 쓸듯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멀리까지 위명(威名)이 퍼졌다. 시인으로서는 창작에 부지런했고 처음으로 시의 근원을 창립해 당조(唐朝) 삼백년 풍아(風雅 시경과 이소의 우아한 문장)의 성대함을 개창했다.

태종이 재위했던 23년간 정치는 투명하고 밝았으며 경제는 번영했고 사회가 안정되고 무공이 흥성했다. 또 문화예술, 시가(詩歌)와 가부(歌賦)가 한낮의 찬란한 태양처럼 휘황했다. 대당의 높은 기상은 전례 없는 성황을 이뤘고 국제적으로도 수많은 나라들이 조공했다. 한마디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창성한 나라였다.

태종은 중화 오천년 문명을 정상까지 밀어 올렸고 신전문화(神傳文化)를 지극히 빛나고 성대하게 했다. 정관시기 성당(盛唐)은 태종의 보호 하에 유(儒)・석(釋)・도(道)가 모두 흥성해 중화 자손들이 수도(修道)・수불(修佛)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게 했을 뿐만 아니라 중화신전문화를 세계에 퍼뜨려 주변국가들 및 세계 다른 지역 국가들이 모두 대당 신전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게 만들었다. 현재에도 세계 각국 차이나타운을 ‘당인가(唐人街 당나라 사람들의 거리라는 의미)’라 하며 정관의 치적은 후세까지 줄곧 전해지고 기려져 왔다.

대당왕조는 천하에 군림하며 팔방에 위력을 떨쳤다. 마치 큰 바다가 수많은 강물을 받아들이듯 박대(博大)함과 넓고 크며 자신 있는 기개는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휘황하고 강성했으니 그야말로 고금에 둘도 없는 영광의 성세(盛世)였다!

제1장 태종출세 군권신수(君權神授)

수나라 개황(開皇) 18년 12월 무오일(599년 1월 28일) 훗날 대당의 태종황제 이세민(李世民)이 무공(武功 섬서성 함양 경내)의 별관에서 태어났다. 이때 두 마리 용이 관문(館門) 밖에서 놀다 삼일 만에 떠났다. (《구당서(舊唐書)‧태종상(太宗上)》)

옛날 사람들은 황제나 군왕(君王)을 가리켜 천자(天子) 또는 진명천자(真命天子) 등으로 불렀다. 이 말은 그들이 일반적인 생명이 아니며 또 일반적인 속인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천자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사람을 기르는’ 것으로 다시 말해 그들이 인간 세간의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한다.

그들은 천명을 이어받아 천하 만물을 다스리고 해악을 제거한다. 또 각자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 및 민심을 자신의 덕이 천지에 부합하도록 수행하는 가운데 통일시켜, 사람마다 각자 적당한 위치를 얻고 각자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각자 자신의 마땅함을 얻게 해 천하를 크게 다스린다.

그러므로 그의 일언일행(一言一行) 일거일동(一擧一動)은 모두 천하 사람들이 본받는 모범이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높은 지위에 머물러도 개인의 사유(私有)로 보지 않으며,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며 조금도 나태해질 수 없기 때문에 신은 그에게 영광을 주었고 신성한 지존의 천호(天號)와 권력을 준 것이다.

태종이 태어날 때 두 마리 용이 희롱한 것은 신기하고 상서로우며 특수한 방식으로 특수한 사람이 탄생함을 천하에 알린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본기(本紀) 제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종문무대성대광효(太宗文武大聖大廣孝)황제의 휘(諱)는 세민(世民)으로 고조(高祖)의 둘째 아들이다. 모친은 태목(太穆) 황후 두(竇)씨다. 태어날 때 놀라지 않았다. 4살 때 어떤 서생이 고조(역주: 이 당시 이연은 기주岐州 절도사로 있었다)에게 아뢰기를 ‘공의 상법(相法 관상)이 귀인(貴人)이시니 분명 귀한 아들이 있을 겁니다.’라고 했다. 또 태종을 보고는 ‘용봉(龍鳳)의 자태요 태양의 표징이 있으니 약관의 나이에 반드시 세상을 구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서생이 떠난 후 고조가 말이 새나갈까 두려워 사람을 보내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신(神)으로 여겼다. 또 그의 말에 따라 이름을 세민이라 지었다.”

관상가의 말처럼 이세민의 출생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았으니 《대흥선사종명서(大興善寺鍾銘序)》에서 태종은 자신이 금륜성왕(金輪聖王 역주: 불경에서 말하는 전륜성왕 중에서 최고의 성왕을 가리키며 금륜왕이라고도 한다.)의 신분으로 황실에 태어났으며 마음을 천하에 두고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 했다고 밝혔다.

“황제는 불법을 수행하는 금륜(金輪)으로 마음은 황궁에 있지만 만방을 두루 비추며 배는 삼계를 운항한다. 조화로운 음악을 법고(法鼓)와 함께 펼치려 하노라. 아송(雅頌)의 소리가 범음(梵音)을 따라 함께 멀리까지 들리게 하노라(皇帝道業金輪,心居黃屋,覆燾萬方,舟航三界. 欲使雲和之樂,共法鼓而同宣. 雅頌之聲,隨梵音而俱遠).”

정관(貞觀) 9년(635년) 태종은 《도승어천하조(度僧於天下詔)》에서 이렇게 명시했다.

“짐은 금륜(金輪)을 공경하며 보배로운 명령에 순응해 지극한 덕의 가르침이 멀다고 여겨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큰 성인의 가르침이 아득하다고 여겨 관찰하지 않음이 없었노라. 사람들로 하여금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고 집안이 인수(人壽)에 오르고 저승의 연이 분명히 응해 모든 생령에 크게 자비롭고자 하노라. 홍범(洪範)에서 오복(五福)을 드러내고 세계에서 세 가지 재난을 끝내고자 하노라.”

대당의 성주(聖主)는 출생부터 일반인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인간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무사무아(無私無我)한 선화(善化) 하에 그의 지시를 따르는 것 같았다. 유년 시기 태종은 몹시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아주 깊고 멀리까지 통찰했다. 시기(時機)를 파악하면 과감히 실천했고 큰 뜻을 품어 작은 절차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미 어린 나이임에도 심모원려(深謀遠慮 역주: 계획이 주도면밀하고 생각이 원대한 것)는 당시 어느 누구도 그 심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태종은 관상가의 말처럼 18세에 부친에게 기병을 권유했고 이때부터 제세안민의 비범한 일생을 시작했다. 천하에 군림한 후 불과 몇 년 만에 약 4백 년간 분열되어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여러 나라를 대당 왕조 아래에 하나로 통일했다.

정관 23년 5월 26일(기사일 649년 7월 10일) 태종 이세민이 취미궁(翠微宮) 함풍전(含風殿)에서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51세였다. 소릉(昭陵 지금의 섬서성 예천연하향禮泉煙霞鄉 구종산九嵕山)에 장사 지냈다. 674년(당 고종 상원上元 원년) 문무성황제(文武聖皇帝)란 시호를 더했고 749년(당 현종 천보 8년)에 문무대성황제(文武大聖皇帝)란 시호를 더했으며 754년(천보 13년)에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라는 시호를 더했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태종에 대해 “지극한 정치를 펼친 임금이 세상에 나오지 않음이 심하도다! 우 임금이 천하를 얻은 후 열 여섯 왕에게 전한 후 소강(少康)이 중흥했다. 탕 임금이 천하를 얻은 후 스물여덟 왕에게 전했으나 그 중 아주 성대했던 것은 따로 삼종(三宗 역주: 상나라 임금 중 태종 태갑, 고종 무정, 중종 조을 세 임금을 말함)이라 했다. 무왕(武王)이 천하를 얻은 후 서른 여섯 왕에게 전했으나 성강의 치(成康之治 역주: 성왕과 강왕의 통치)와 선왕(宣王)의 무공이 있었을 뿐 그 나머지는 이를 만한 게 없다. 비록 《시》와 《서》에 기록이 있지만 때로는 빠지고 누락된 것이 많다. 그러나 하상주 삼대(三代) 1700여 년에 70여 임금에게 전했지만 후세에 탁월하게 드러난 이는 이상 6~7명의 임금에 불과하다. 오호라, 실로 얻기 어렵다고 할 만하도다!”라고 했다.

즉 역사적으로 당 태종처럼 정치를 잘한 뛰어난 임금이 세상에 아주 드물다는 말이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사신(史臣 역주: 구당서 저자가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이 말합니다. 신이 보기에 문황제(文皇帝 역주: 당 태종)께서는 많은 기적을 남기셨고 총명하며 신묘한 무위를 지니셨습니다. 인물을 발탁함에 사사로이 붕당에 얽매이지 않으셨고 사업을 맡기면 모두들 그 재주를 다했습니다.” “특히 듣고 판단함에 미혹되지 않으면서 물 흐름처럼 선(善)을 따르신 것은 천년에 한분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긍(吳兢)은 《정관정요(貞觀政要) 서문》에서 “태종 시기의 정치와 교화는 진실로 볼만하며 아주 오랜 옛날 이래 있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