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설인고를 잡고 유무주를 깨다(擒薛破劉)
설거(薛舉)는 원래 수(隋)나라 금성부(金城府) 교위(校尉)였다. 이연이 기병할 때 금성군(金城郡 지금의 감숙성 난주蘭州)에서 기병해 성을 빼앗은 후 농우(隴右 감숙성 서쪽)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7월에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진(秦)이라 했다. 이연이 장안을 차지하자 설거는 아들 설인고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부풍(扶風 지금의 섬서성 봉상鳳翔)을 공격했으나 이세민에게 격퇴 당했다.
당 고조 무덕(武德) 원년(618년) 설거가 다시 경주(涇州 지금의 감숙성 경주涇州)를 침범해왔다. 고조(高祖 역주: 이연은 618년 4월 양제가 시행 당하자 5월 정식으로 황제를 칭했다)가 명령을 내려 진왕(秦王 역주: 이연이 황제를 칭하면서 이세민을 진왕에 봉했다) 이세민을 원수로 삼아 굴돌통(屈突通) 등과 함께 팔총관병(八總管兵 역주: 총관은 지역 군사령관에 해당. 즉 8지역 병력을 동원했다는 의미)을 이끌고 나가 막게 했다.
하지만 이때 이세민이 학질(瘧疾)에 걸리는 바람에 지휘권을 유문정(劉文靜), 은개산(殷開山)에게 주면서 “설고는 멀리서 와서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하고 병사들이 피로해 있습니다. 만약 적들이 먼저 도발해오면 신중히 상대하지 말고 나의 병이 나은 후 그대들과 함께 공격합시다.”라고 했다. 하지만 은개산이 물러나온 후 유문정에게 “왕께서는 공(公)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까 걱정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오. 또 적들이 만약 왕이 병에 걸린 것을 안다면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볼 것이오. 마땅히 힘껏 무위를 떨쳐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세민의 경고를 따르지 않고 군위(軍威)를 과시하기 위해 고척(高址)성 서남쪽에 군대를 배치했다. 또 아군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적의 기습을 제대로 방비하지 않았다. 설거가 뒷면에서 들이닥치자 팔총관이 모두 패했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세민은 어쩔 수 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병사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 싸움에서 설거가 고척성을 차지했다.
618년 9월 설거가 사망하자 아들 설인고(薛仁杲)가 자리를 이었다. 이세민이 원수(元帥)가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직접 설인고 공격에 나섰다. 양 군이 절척성에서 서로 대치하는데 쌍방이 해자를 깊이 파고 높은 망루를 설치해 60일 넘게 지냈다. 당시 설인고의 군사는 십 수 만으로 군세가 강성해서 몇 차례나 도전해왔다. 하지만 이세민은 벽을 튼튼히 세우고 수비만 할 뿐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이 출전을 요청했지만 이세민은 “우리 군사들이 지난 번 전투에서 패배해 사기가 떨어져 있고 적은 승리를 믿고 교만해져서 우리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마땅히 벽을 꼭 닫아걸고 기다려야 한다. 적들이 교만할 때 우리가 떨쳐 일어나면 한 번의 전투로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히 싸우자고 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세민은 이렇게 아군을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다. 결국 설인고 군사들의 식량이 떨어지자 적장 모군재(牟君才), 양호랑(梁胡郎)이 투항해왔다. 이세민은 이를 통해 적 장병들의 마음이 설인고로부터 떠났음을 알았다. 이에 행군총관(行軍總管) 양실(梁實)을 내보내 천수원(淺水原)에 진을 치고 적군을 유인하게 했다.
적장 종라후(宗羅睺)가 당군(唐軍)의 출전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정예부대를 모두 내보내 공격해왔다. 하지만 양실은 지형이 험한 곳을 지키며 방어만 하고 출전하지 않았다. 종라후의 공격이 조급해지자 이세민은 적군이 이미 피로해진 것을 알고 제장들에게 말했다. “적군의 예기가 꺾였으니 마땅히 아군이 공격에 나서야 한다.”
드디어 장군 방옥(龐玉)을 천수원 남쪽으로 보내 적을 유인했다. 적장 종라후가 병력을 집중해서 반격에 나서자 방옥의 군대가 거의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이세민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적의 허를 찔러 천수원 북쪽에서 출격했다. 이세민은 또 정예기병 수십 기를 이끌고 직접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힘을 얻은 방옥의 군대와 함께 양쪽에서 적을 공격하자 종라후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적군 수천 명의 목을 베었고 산 계곡과 골짜기에 죽은 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세민은 직접 2천여 기병을 이끌고 도망가는 적군을 추격해 절척성까지 가면서 보병(步兵)도 뒤를 따르게 했다. 대장 두궤(竇軌)가 이세민에게 간언했다
“설인고가 튼튼한 성을 지키고 있는데 종나후를 격파했다고는 하지만 경솔하게 진군할 수 없으니 병사들을 위로하면서 상황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세민은 “이때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파죽지세를 잃을 수 없으니 외숙께서는 더 이상 권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추격에 나섰다.
이세민의 기병대가 종나후의 패잔병을 추월해 경수 남쪽에 진영을 치고 절척성 진입을 봉쇄했다. 이때 설인고는 성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휘하의 맹장 혼간(渾幹) 등 여러 장수가 이세민에게 투항하자 겁을 먹은 설인고가 성안으로 들어가 수비만 했다. 밤늦게 이세민의 대군이 속속 도착해 사면을 포위했다. 한밤중에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앞을 다퉈 성을 내려와 투항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설인고도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이 전투에서 1만 여명의 정병(精兵)을 포함해 남녀 5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러 장수들이 치하하며 이세민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한번 싸워 승리하셨는데 급히 가시느라 보병과도 떨어지고 또 공성(攻城) 도구도 없이 경기병만으로 성 밑까지 가셔서 모두들 이기지 못할 것으로 보았지만 빨리 성을 얻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종나후와 여러 장수들은 모두 농외(隴外 역주: 감숙성 바깥 이민족) 사람으로 장수와 병사들이 날래고 사납소. 내가 특별히 그들의 허를 찔러 공격한 것으로 베거나 포로로 잡은 이가 많지 않소. 만약 공격을 느슨히 해서 적들이 모두 성에 들어갔다면 설인고가 써서 쉽게 이기지 못했을 것이오. 서둘렀기 때문에 농외에서 온 사나운 자들을 흩어버릴 수 있었소. 절척성은 허약하고 설인고가 놀라 겁을 먹었으니 한가하게 논의할 틈도 없이 서두른 것이 내가 승리한 까닭이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쁘게 복종했다.
이 전투를 통해 이세민은 많은 정예기병을 포로로 잡았고 또 설인고 형제 및 적장 종라후, 적장손(翟長孫) 등을 거느렸다. 이세민은 그들과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즐겁게 놀았고 아무런 간격도 두지 않았다. 투항한 무리들은 이세민의 넓은 흉금에 감사했고 또 그의 위세에 눌려 모두들 목숨을 바쳐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이세민이 개선해서 돌아오자 태묘(太廟)에서 승전보를 알렸다. 고조는 이세민을 태위(太尉), 섬동도행대상서령(陝東道行台尚書令)에 임명해 장춘궁(長春宮)을 지키게 했고 관동(關東) 병마는 모두 그의 통제를 받게 했다. 또 얼마 후에는 좌무후대장군(左武侯大將軍) 겸 양주총관(涼州總管)을 더했다.
태종은 나중에 설거를 격파한 옛 전장을 지나며 특별한 감회를 적었다.
《경파설거전지(經破薛舉戰地)》–설거를 깨뜨린 전장을 지나며
옛날에 씩씩한 기운 품고창 들고 첫 싸움에 우뚝 섰네.흉금은 밝은 해처럼 높고뜻은 가을 서리처럼 깨끗했네.병력 이동은 번개 치듯 신속하고옮겨가며 싸우는 기세 장강 제방이 터진 듯.설고의 진영은 떨어진 별처럼 흩어졌고바람이 구름 가르듯 뿔뿔이 갈라졌네.한번 휘두르니 나쁜 기운 가라앉고다시 들어 올리니 큰 악인들 소멸했네.이곳에서 옛 들판 굽어보니눈길이 아름다운 수레에 멈추네.쌓인 모래에 옛 흔적 사라졌지만부뚜막 줄였던 자국은 희미하게 남았구나.노을에 비친 물결 너무나 깨끗한데연꽃 같은 봉우리 구름에 싸여 어둑하네.세상은 이처럼 빨리 변화하고인간사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구나.지난 자취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하다자신을 돌아보며 잠시 유유자적하노라.
昔年懷壯氣(석년회장기) 提戈初仗節(제과초장절)心隨朗日高(심수낭일고) 志與秋霜潔(지여추상결)移鋒驚電起(이봉경전기) 轉戰長河決(전전장하결)營碎落星沉(영쇄낙성침) 陣卷橫雲裂(진권횡운렬)一揮氛沴靜(일휘분려정) 再舉鯨鯢滅(재거경예멸)於茲俯舊原(어자부구원) 屬目駐華軒(속목주화헌)沉沙無故跡(침사무고적) 減灶有殘痕(감조유잔흔)浪霞穿水淨(낭하천수정) 峰霧抱蓮昏(봉무포련혼)世途亟流易(세도극류역) 人事殊今昔(인사수금석)長想眺前蹤(장상도전종) 撫躬聊自適(무궁료자적)
비록 관중(關中)에서 점차 공고한 기반을 다지긴 했지만 고조 이연이 기병했던 태원(太原)은 오히려 위험에 빠졌다. 유무주(劉武周)는 본래 마읍(馬邑) 사람으로 용맹하고 활을 잘 쐈는데 호걸들과 어울리며 정식으로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또 돌궐에 사신을 파견해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귀부했다. 돌궐은 유무주를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임명했다. 이 때 유무주 역시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한(漢)이라 했으며 수나라 말기 혼란 속에서 산서 북부 지역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연이 당나라를 세운 후에도 유무주는 돌궐의 힘을 빌려 태원을 직접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덕 2년(619년) 4월 유무주가 돌궐과 연합해 황사령(黃蛇嶺 지금의 산서 유차榆次 북쪽)에 주둔했다. 태원 유수(留守) 이원길(李元吉)은 장달성(張達成)을 파견해 유무주를 쫓아내게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당군이 크게 패했다. 유무주는 유차를 공격해 함락시킨 후 병주(並州)의 여러 현을 포위했다. 이때 하북에 있던 송금강(宋金剛 역주: 하북 역주 농민반군의 두령)이 두건덕(竇建德)에게 패한 후 유무주에게 투항해왔다.
6월 유무주는 송금강에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태원을 공략하게 했다. 당나라 장수 배적(裴寂)이 잇달아 패하자 태원을 지키던 이원길은 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자 진주(晉州 지금의 산서山西 임분臨汾) 북쪽의 성진(城鎭) 중 호주(浩州 지금의 산서 분양汾陽)를 제외한 나머지 주현이 모두 유무주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유무주의 세력이 태원을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다.
10월 송금강이 회주(澮州 지금의 산서 익성翼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하현(夏縣) 사람 여숭무(呂崇茂)가 현령을 죽이고 유무주에게 호응했다. 또 포판(蒲阪 지금의 산서성 영제永濟)을 지키고 있던 수나라 장수 왕행본(王行本) 역시 유무주에게 호응했다. 이렇게 되자 당나라의 황하 동쪽 영토는 서남쪽 일부만 남게 되었고 관중이 크게 진동했다!
고조가 칙령을 내려 말했다.
“도적의 세력이 이와 같으니 함께 예봉을 다투기 어렵다. 마땅히 황하 동쪽을 포기하고 관서만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세민이 표문(表文)을 올려 말했다.
“태원은 왕업의 터를 닦은 곳으로 나라의 근본입니다. 하동은 부유한 곳으로 경읍(京邑 장안)의 자원이 되는 곳입니다. 만약 이곳을 버리신다면 신(臣)은 분하고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정병 3만을 주시면 반드시 유무주를 평정하고 분진(汾晉 황하 동쪽 지역)을 되찾겠습니다.”
고조는 이에 이세민의 출정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조는 관중의 모든 병력을 다 징발해 이세민이 통솔하게 하고 송금강과 유무주를 공격하게 했다.
619년 11월 이세민이 3만 정병을 이끌고 용문관(龍門關)에 이르러 결빙된 황하를 건너 백벽(柏壁 지금의 산서 신강현)에 주둔하고 배수진을 펼쳤다. 배수진이란 전에 한신(韓信)이 사용했던 전술로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놓은 후 살기를 바라는” 진법이다. 이세민은 배수진을 치고 송금강의 군사와 대치에 들어갔다. 이세민은 또 병력을 파견해 송금강의 식량공급을 끊게 했다.
한편 송금강은 거병 후 줄곧 승리를 거뒀고 패배가 없었기 때문에 당의 영토 깊숙이 들어와 있어 전선이 길어졌다. 때문에 군수물자 보급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당나라 군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때 송금강의 장수 울지경덕(尉遲敬德)과 심상(尋相)이 이효기가 이끄는 당나라 군을 하현(夏縣 산서성 하현)에서 대파하고 회주(澮州 산서성 익성현)로 돌아가려 했다. 이세민이 병부상서 은개산과 총관 진숙보(秦叔寶) 등을 파견해 미량천(美良川 하현 북쪽)에서 요격해 적을 크게 물리치니 적군의 목을 벤 것이 2천여 급에 달했다. 울지경덕과 심상이 정예기병만 이끌고 포판에 있는 왕행본(王行本)을 도우러가자 이세민이 직접 보병과 기병 3천을 이끌고 샛길로 밤중에 안읍으로 달려가 적을 기습해 대파했다. 울지경덕과 심상은 자신들의 몸만 겨우 빼내 도망갔고 이세민은 남은 무리들을 전부 포로로 잡아 백벽으로 돌아왔다. 송금강은 전투를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중단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식량공급까지 끊어지자 군심이 크게 흔들렸다.
무덕 3년(620년) 2월 송금강이 마침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세민이 과감히 추격에 나서 심상을 여주까지 추격해 크게 깨뜨렸다.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에 나섰는데 하루사이에 2백여 리를 달렸고 도중에 수십 합을 싸웠다. 당시 이세민은 이틀을 굶었고 삼일 간 갑옷을 벗지 않은 채 송금강 추격에 나섰다. 작서곡에서 송금강의 부대를 따라 잡은 후 하루에 8차례 전투를 치른 끝에 적을 모두 격파하고 수만 명을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송금강이 있는 개휴(介休)까지 따라간 이세민은 이세적(李世勣)을 선봉에 세웠다. 전투 초반 뒤로 밀리는 척 하다가 적이 공격해오자 정예기병을 이끈 이세민이 적의 뒤를 급습하자 송금강의 진영은 일시에 무너졌다. 송금강은 소수 기병만 이끌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나중에 개휴를 지키던 울지경덕은 잔여 병력 8천 명을 이끌고 이세민에게 투항했다.
이세민이 송금강을 깨뜨린 후 유무주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알고 돌궐로 달아났다. 하지만 결국 돌궐에서 살해당했다. 송금강은 잔여병력을 모아 다시 싸우려했으나 이미 돌이킬 힘이 사라지자 자신을 따르던 백여 명의 기병과 함께 돌궐로 도주했으나 역시 돌궐에게 살해당했다. 이렇게 하여 당은 잃었던 태원을 되찾았다. 하동의 여러 군(郡) 중에서 유무주가 통제하던 지역이 전부 당의 관할로 복귀했다. 이세민이 또 한번 절체절명의 순간에 멸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원한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