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정관 12년(638년) 태종이 섬현과 낙양 지역으로 다시 노닐며 옛일을 떠올리다가 불후의 명작인 《환섬술회(還陝述懷)–섬주에 돌아오며 생각하다》를 지었다.
탄식하며 오랫동안 긴 칼 어루만지며세상을 구하는데 어찌 명예를 구하랴?군대 지휘 깃발 휘날리며 신속히 움직이고태양빛 엄숙히 하늘의 운행 인도하는데들판에 주둔한 일만의 기병높은 언덕 위에 다섯 군영 주둔했네.산에 올라 절도 있게 군대를 지휘하고물 등지고 신의 병사 풀어놓았지.옛날에는 무력을 움직였는데지금은 우주가 평안하구나.
慨然撫長劍 개연무장검濟世豈邀名 제세기요명星旂紛電舉 성기분전거日羽肅天行 일우숙천행遍野屯萬騎 편야둔만기臨原駐五營 임원주오영登山麾武節 등산휘무절背水縱神兵 배수종신병在昔戎戈動 재석융과동今來宇宙平 금래우주평
이제 천하가 점차 태평해지자 태종은 경서(經書)에 뜻을 두어 문학관(文學官)을 열어 사방의 선비들을 초청했다. 행대사훈낭중(行台司勳郎中) 두여회(杜如晦) 등 18명의 학사를 두고 경전의 뜻에 대해 함께 토론하곤 했는데 종종 한밤이 되어서야 끝내곤 했다.
당태종 《치문학관학사교(置文館學士教)》–문학관 학사를 설치하는 교서
“옛날 한나라 때 초원왕(楚元王 서한의 제후국)은 어진 이를 존중해 신공(申公)과 목생(穆生)을 높이고 존중했다. 또 양효왕(梁孝王)은 선비를 사귐에 추양(鄒陽)이나 매승(枚乘)처럼 재주가 많은 사람보다 덕을 중시했다. 이에 모두 뛰어난 전범을 남겨 후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으며 후인들이 우러르고 참고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덕을 중시하고 몸을 닦으며 어질고 현명한 이들을 두루 뽑았다. 어진 인재를 생각함에 사랑하여 남기듯이 해야 하고 동량(棟梁 나라의 인재)을 구함에는 서로 의지와 기개가 잘 맞아야 한다. 이렇게 바른 규칙을 세워서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하노라. 끊임없이 연구하고 독서하는 것은 옛날 제(齊)나라 직하(稷下)학궁처럼 하고 연회를 베푸는 것은 연(燕)나라 황금대(黃金臺)처럼 하노라. 대행대(大行台) 사훈낭중(司勳郎中) 두여회(杜如晦), 기실 고공낭중(記室考功郎中) 방현령(房玄齡)과 우지녕(于志寧), 군자좨주(軍咨祭酒) 소세장(蘇世長), 천책부 기실(天策府記室) 설수(薛收), 문학(文學) 저량(褚亮)과 요사렴(姚思廉), 태학박사(太學博士) 육덕명(陸德明)과 공영달(孔潁達), 주부(主簿) 이현도(李玄道), 천책창조(天策倉曹) 이수소(李守素), 왕부 기실참군(王府記室參軍) 우세남(虞世南), 참군사(參軍事) 채윤공(蔡允恭)・설원경(薛元敬)과 안상시(顔相時), 송주총관부 호조(宋州總管府戶曹) 허경종(許敬宗), 태학 조교(太學助教) 개문달(蓋文達), 자의전첨(咨議典簽) 소욱(蘇朂) 18명의 대학사는 강남 출신도 있고 하북 출신도 있으니 전례와 법률을 제정하고 문풍을 일으켜 본관의 학사로 삼는다.”
무덕 4년(621년) 12월 두건덕의 옛 부하 유흑달(劉黑闥)이 거병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세민이 전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격해 하북(河北) 토벌에 나서 대당 통일전쟁 중 최후의 강적 유흑달과 맞섰다.
무덕 5년(622년) 정월 당군(唐軍)이 비향(肥鄉 하북 한단시 부근)으로 진군했다. 이세민은 미리 병력을 나눠 적들의 식량운반로를 끊었고 쌍방이 두 달 넘게 장기간 대치했다. 식량이 떨어진 유흑달이 시간에 쫓겨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인솔하고 당나라 군영을 압박해왔다. 이를 기다리던 이세민이 직접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적의 기병을 격파했다. 그리고는 승리한 기세를 몰아 적의 보병을 유린했다. 적진이 붕괴되면서 1만여 명의 목을 벴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전투에 앞서 이세민은 미리 사람을 보내 명수(洺水 하북성 남부를 지나는 강) 상류의 물을 막아 유흑달의 병사들이 쉽게 강을 건너게 했다. 나중에 한창 전투가 벌어질 때 막았던 제방을 터뜨리자 갑자기 수심이 한 길이 넘어 유흑달의 무리가 크게 무너진 것이다. 유흑달은 남은 200여 기병과 함께 돌궐(突厥)로 도망쳤고 나머지 살아남은 부하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하북(河北)이 평정되었다. 이 전투를 명수전투(洺水之戰)라 한다.
당시 서원랑(徐圓朗)이 서주(徐州)와 연주(兗州 지금의 산동성 연주시)를 차지하고 노왕(魯王)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세민이 군사를 돌려 토벌했다. 이에 황하, 제수(濟水), 장강, 회수(淮水) 일대의 여러 군읍들이 모두 평정되었다.
무덕 7년(624년) 가을 돌궐의 힐리(頡利)가한과 돌리(突利)가한이 원주(原州 지금의 영하자치구 고원固原)에서 들어와 관중(關中)을 침범했다. 어떤 사람이 고조에게 유세했다.
“돌궐이 계속해서 관중을 노략질하는 까닭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옥과 비단이 모두 장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안을 불태우고 도읍을 옮기신다면 오랑캐들이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돌궐의 위협을 피해 수도를 옮기자는 의견이었다. 황제가 천도(遷都)할 뜻을 품고 중서시랑(中書侍郎) 우문사급(宇文士及)을 파견해 산 남쪽에 이주할 땅을 알아보게 했다. 소우(蕭瑀) 등은 모두 이 의견이 옳지 않다고 여겼지만 감히 황제의 뜻을 어기고 바르게 간언하지 못했다.
이세민이 황제를 찾아가 천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간언했다. 그는 자신에게 일이 년만 시간을 주면 반드시 돌궐의 힐리가한을 물리칠 수 있으니 천도는 그 이후에 논의해도 된다고 했다.
“한 무제 때 곽거병(霍去病)은 한나라 조정의 장수에 불과했지만 흉노를 멸망시키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신은 제후왕(당시 진왕秦王)의 신분으로 있음에도 오랑캐들의 공격을 초래해 끝내 폐하께서 도읍을 옮기실 생각을 하셨으니 이는 신의 책임입니다. 바라건대 몇 년의 기간을 주시면 힐리의 목을 묶어다 궐 아래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그때 도읍을 옮기셔도 늦지 않습니다.”
고조가 처음에는 화를 내고 이세민에게 30여 기병과 함께 잔도(棧道)를 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튿날에도 이세민이 절대 천도할 수 없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자 마침내 천도논의를 중단했다.
용종천마(龍種天馬)
태종은 말을 좋아하고 말에 대해 잘 알았으며 말 중의 신준(神駿 뛰어난 준마)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고자 했다. 때문에 준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이 말들은 대당황제가 남북으로 원정에 나서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는 데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이세민은 《영음마(詠飲馬)–물 마시는 말을 노래함》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영음마(詠飲馬)–물 마시는 말을 노래하다》
준마는 경수(涇水 위수의 지류)를 마시고세차게 흐르는 물에 말 덮개를 씻누나.잔물결 연달아 흩어졌다 모이고어지러운 물풀 말발굽을 휘감네.물빛은 안장 위로 기울고말 그림자 급류 속에 가로놓였네.마치 천지(天池 선계의 연못) 속에서 일으킨 듯솟구치는 물보라 속에 용종(龍種 준마)이 태어났구나.
駿骨飲長涇 준골음장경奔流灑絡纓 분류쇄낙영細紋連噴聚 세문연분취亂荇繞蹄縈 난행요제영水光鞍上側 수광안상측馬影溜中橫 마영류중횡翻似天池裏 번사천지리騰波龍種生 등파용종생
일찍이 위험에 처했던 자신을 구한 전마(戰馬)를 기념하기 위해 태종은 또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묘) 안에 ‘소릉육준(昭陵六駿)’을 새겨놓았다.
“짐이 정벌하면서부터 탔던 융마들(戎馬 전마)은 짐을 어려움에서 구제했으니 그 모습을 돌에 새겨 좌우에 배치함으로써 유막(帷幕 역주: 임금이 타던 마차를 끌던 말이 죽으면 동물이지만 그 공을 기리기 위해 해진 휘장을 함께 묻어주는 것)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책부원구(冊府元龜)》42권)
이에 당시 최고의 조각가 염립덕(閻立德)과 화가 염립본(閻立本)에게 6필의 전마를 부조(浮彫)로 조각해 소릉 앞 동서 양측에 배치하게 했다. 대대로 유명한 화가였던 염립본이 조칙에 따라 《육준도(六駿圖)》를 그렸고 조각가 염립덕이 이를 원본으로 삼아 부조해 소릉 앞 동서 양 측면에 배치했다.
자고로 좋은 말은 모두 자신만의 이름이 있었다. 이 육준의 이름은 각각 권모과(拳毛䯄),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 특륵표(特勒驃), 청추(青騅), 삽로자(颯露紫)였다.
정관 11년 태종은 친필로 《육마도찬(六馬圖贊)–여섯 말의 그림을 찬양하다》을 썼다. 이 여섯 필의 준마는 전투 중에 많은 화살에 맞아 곳곳이 상처투성이였음에도 태종을 태우고 보호해 최후에 승리할 수 있도록 했다.
태종이 처음 기병했을 때 허락인(許洛仁 당나라 개국공신)이 무뢰관(武牢關)에서 한필의 말을 바쳤는데 머리만 검고 온몸이 노란색이었다. 태종은 이 말이 다른 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을 알고 매번 진지에 나가 지휘할 때마다 반드시 이 말을 타곤 했다. 태종은 낙인의 말이란 뜻에서 ‘낙인과(洛仁䯄)’라 부르다가 나중에 권모과(拳毛䯄)라 불렀다.
태종이 유흑달을 평정할 때도 이 말을 탔다. 당시 이 말은 앞으로 6발 뒤로 2발의 화살을 맞았다.
권모과(拳毛䯄)
月精按轡 월정안비天駟橫行 천사횡행弧矢載戢 호시재집氛埃廓清 분애곽청
대체적인 뜻은 천마가 횡행한 후 전란이 중단되었다는 의미다.
십벌적(什伐赤)은 순적색의 한혈보마(汗血寶馬)로 태종이 왕세충을 평정할 때 탔던 말이다. 앞으로 4발 뒤로 1발의 화살을 맞았다.
십벌적(什伐赤)
瀍澗未靜 전간미정斧鉞申威 부월신위朱漢騁足 주한빙족青旌凱歸 청정개귀
대략적인 뜻은 말발굽 옆에 붉은 땀을 남기고 푸른색 정기(旌旗 천자의 깃발)와 함께 개선했다는 내용이다.
백제오(白蹄烏)는 온몸이 검은색인데 유독 네 발굽만 흰색으로 태종이 설인고를 평정할 때 탔던 말이다. 태종이 백제오를 타고 한밤에 적을 기습하자 설인고의 군사들이 궤멸되어 성안으로 들어가 지킬 수 없었다. 결국 설인고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백제오(白蹄烏)
倚天長劍 의천장검追風駿足 추풍준족聳轡平隴 용비평롱回鞍定蜀 회안정촉
바람을 쫓을 정도로 빠른 준마를 천하의 명검인 의천장검(倚天長劍)이란 신기(神器)에 비유한 것이다. 이 말은 태종을 따라 농서(隴西)에서 사천(四川)까지 전장을 누볐으며 그 어떤 말보다 더 빨랐다.
특륵표(特勒驃)는 털은 황백색이고 주둥이만 흑색이다. 태종이 송금강을 평정할 때 탔던 말이다. 송금강의 병사들은 예봉이 아주 날카로웠고 남북으로 7리에 걸쳐 길게 진을 쳤다. 하지만 태종이 이 말을 타고 직접 적진을 누비자 송금강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특륵표(特勒驃)
應策騰空 응책등공承聲半漢 승성반한入險摧敵 입험최적乘危濟難 승위제난
빼어난 점프 실력과 적을 굴복시키는 기세 및 위험에 처한 주인을 구해낸 신묘한 용기를 묘사했다.
청추(青騅)는 흰색과 푸른색이 섞인 말이다. 태종이 두건덕과 싸울 때 청추를 타고 직접 적진을 뚫고 들어가 단번에 두건덕을 나포했다. 청추는 모두 5발의 화살을 맞았다.
청추(青騅)
足輕電影(족경전영)神發天機(신발천기)策茲飛練(책자비련)定我戎衣(정아융의)
씩씩하고 힘찬 발걸음과 질풍처럼 달리는 모습을 표현했다. 무뢰관 대첩은 당나라가 통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한 중요한 고비였다.
삽로자(颯露紫)의 이름은 원래 돌궐어에서 유래하데 한자로 하면 ‘사발략(沙缽略)’ 또는 ‘시파라(始波羅)’가 된다. 원래는 용건(勇健)한 사람이란 뜻으로 돌궐 가한의 이름이기도 하다. 즉 용건가한(勇健可汗)의 자색 전투마라는 뜻이다. 태종이 왕세충과 격전을 치를 때 날아온 화살에 맞았음에도 제방 위로 뛰어올랐다. 구행공(丘行恭 당나라 초기 선비족 출신 무장)이 화살을 뽑은 후에야 죽었다.
삽로자(颯露紫)
紫燕超躍(자연초약)骨騰神駿(골등신준)氣讋三川(기섭삼천)威淩八陣(위릉팔진)
기개가 삼천을 두렵게 하고 위세가 팔진에 떨쳤으니 이 말의 풍채와 기개가 아주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