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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7): 재앙은 내부에서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2절 내부 재앙을 평정[平禍蕭牆]

수 양제 대업(大業) 13년(617년) 이연은 이세민의 제안에 따라 기병했다. 때문에 이연은 일찍이 이세민에게 “사업의 성공과 천하는 모두 네가 가져온 것이니 너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세민은 굳게 사양했다.

고조(高祖)가 제위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이세민을 태자로 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세민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 나라에서 장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에 바꿀 수 없는 이치입니다. 형님이 위에 계시는데 제가 어찌 맡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고조는 큰아들 이건성(李建成)을 태자로 삼고 둘째 이세민을 진왕(秦王), 넷째 이원길(李元吉)을 제왕(齊王)으로 삼았다. 나중에 이세민이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워 더 이상 올려줄 작위가 없자 고조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천책상장(天策上將)’이란 관직을 만들어 왕공(王公)의 위에 있으면서 군사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태종의 공이다.”(《자치통감》)

“이때 세민의 공이 날로 커지자 고조가 태자로 세우기로 약속했다. 건성이 이 사실을 몰래 알고는 제왕 원길과 함께 난을 음모했다.”(《구당서‧고조22자전(高祖二十二子傳)》)

원길과 건성

이원길이란 인물은 외모가 추한데다 성격도 잔인했다. 처음 태어났을 때 모친인 태목황후(太穆皇后)마저도 그의 외모를 싫어해 자신이 직접 키우려 하지 않았다. 시녀 진선의(陳善意)가 몰래 길러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성격이 흉악하고 교만하며 사치하고 음란했다. 늘 하인이나 처첩 및 병사들에게 갑옷을 입혀 전쟁놀이를 했는데 실제로 때리고 찌르게 하여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많았다. 나중에 원길이 칼에 베여 자상(刺傷)을 입자 유모인 진선의가 그를 제지하려 했다. 이에 원길이 화를 내며 장사들에게 명령해 구명의 은인인 유모를 끌고 가서 죽이게 했다.

당 고조 무덕 2년(619년) 유무주(劉武周)가 병주(幷州 지금의 산서성 태원 대동 일대)를 압박해 왔을 때의 일이다. “이원길이 크게 놀라 자신의 사마(司馬)인 유덕위(劉德威)를 속여 ‘경이 노약자들과 성을 지키고 있으면 내가 강병을 이끌고 나가 싸우겠소’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야음을 틈타 처첩을 이끌고 출병해 장안으로 달아났다. 병주는 결국 함락되었다.”(《구당서‧고조이십이자전(高祖二十二子傳)》)

이건성은 내세울 만한 공이 없으면서도 나태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주색을 탐했다. 태자부 중윤(中允) 왕규와 세마(洗馬) 위징이 건성에게 유세했다.

“전하께서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동궁에 살고 계시지만 내세울만한 공적도 없고 해내(海內 천하)를 누르고 복종시킨 일이 없습니다. 반면 진왕(秦王)의 공로는 천하를 뒤덮어 안팎의 사람들 마음이 그에게로 향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어찌 스스로 편안하실 수 있습니까?”(《구당서‧은태자건성전(隱太子建成傳)》)

이에 위기감을 느낀 건성과 원길은 고조의 비빈들을 뇌물로 회유하고 또 일부 총비(寵妃)들과 사통했다. 귀비들은 황상의 총애를 믿고 이세민이 낙양을 평정할 때 수나라 궁궐의 보화들을 요구하거나 자기 친인척에게 관직을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세민은 “보물은 모두 책에 올려 기록했고 이미 상주(上奏)했으며 관직은 마땅히 어질고 능력이 있으며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총비들은 이세민을 더욱 원망하게 되었고 고조 앞에서 늘 태자와 원길을 칭찬하고 이세민에 대해 험담을 했다.

불타오르는 질투심

건성과 원길은 이세민에 대한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온갖 계략으로 그를 제거하려 했다.

첫 번째는 암살음모였다. 한번은 이세민이 황제를 좇아 제왕부(齊王府 이원길의 집)에 간 적이 있다. 원길이 호군(護軍) 우문보(宇文寶)를 침실 안에 숨겨두고 기회를 엿보아 이세민을 찌르게 했다. 하지만 태자 건성이 이세민이 황제와 동행했기 때문에 작전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고 원길을 제지했다.

두 번째는 사병(私兵)을 모집한 것이다. 경주(慶州 지금의 감숙성 경양현) 도독(都督) 양문간(楊文幹)이 건성에게 매수되어 사사로이 용사들을 모집했다. 이건성은 낭장(郎將) 이주환(爾朱煥)과 교위(校尉) 교공산(橋公山)을 시켜 양문간에게 갑옷을 주어 기병을 돕게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낀 두 사람이 태자가 모반했다고 고발했다.

이때 마침 고조는 도성을 떠나 인지궁(仁智宮 지금의 섬서성 요현)에 머물고 있었는데 크게 화를 내며 건성을 황태자에서 축출해 변방의 촉왕(蜀王)으로 강등시키려 했다. 또 이세민에게 양문간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하지만 건성이 황제를 찾아와 잘못을 뉘우치고 이세민이 떠난 사이에 이원길과 비빈들이 번갈아가며 태자를 변호하자 고조는 결국 건성이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다.

세 번째는 독살 시도다. 무덕 9년(626년) 6월 어느 날 밤 태자 건성이 이세민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면서 몰래 짐독(鴆毒 독약)을 탄 술을 주었다. 이세민이 술을 몇 잔 마신 후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심해지고 “토혈을 심하게 했다.” 다행히 옆에 있던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神通)이 그를 부축해 서궁(西宮 역주: 서궁은 진왕이 살던 승건전을 말한다. 당시에는 당나라 건국 초기라 아직 틀이 정해지지 않아 황궁과 동궁, 진왕부와 제왕부가 도성 안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로 돌아와 큰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네 번째는 피양(避讓 피하여 양보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세민이 동궁에서 짐독을 먹고 피를 토한 일을 알게 된 고조는 두 아들간의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이세민을 낙양으로 보내려 했다.

“처음으로 큰 계획을 세우고 해내를 평정한 것은 모두 너의 공이다. 나는 너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네가 굳게 사양했었다. 또 건성은 연장자고 후사(後嗣)로 삼은 지 오래되어 차마 그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 너희 형제들이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으니 같은 장안에 살면 반드시 분쟁이 생길 것이다. 이에 너를 다시 행대(行台 역주: 중앙의 상서성을 임시로 지방에 설치한 관청)로 파견해 낙양에서 살게 하며 섬주(陝州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 동쪽의 일은 모두 주관하게 하겠다.”

이세민이 눈물을 흘리며 부친의 슬하에서 멀리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황상의 뜻이 확고했다.

이에 이세민이 곧 떠나려 하는데 건성과 원길이 이 소식을 듣고는 함께 모의했다.

“진왕이 만약 낙양에 가게 되면 그곳의 토지와 병사들을 소유하게 되어 다시는 제압할 수 없다. 반면 장안에 남겨두면 필부(匹夫)에 불과하니 빼앗기 쉽다.”

이에 비밀리에 수하들을 시켜 황제에게 유세하게 하자 고조의 생각이 변했다. 결국 이세민은 어쩔 수 없이 낙양행을 중단했다.

다섯 번째는 사나운 말이다. 고조가 장안 남쪽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고조가 세 아들에게 말을 달리며 활 쏘기 시합을 하게 했다. 당시 건성에게 호마(胡馬) 한필이 있었는데 몸집이 장대해서 잘 넘어졌다. 건성이 이 말을 이세민에게 주면서 “둘째 아우는 말을 잘 타니 시험 삼아 한번 타보게.”라고 했다. 이세민이 이 말을 타고 사슴을 쫓는데 얼마 못가 말이 넘어지자 이세민이 펄쩍 뛰면 똑바로 섰다. 말이 일어서자 다시 말을 탔는데 이렇게 3차례나 했다.

이세민은 “그가 이 말을 이용해 나를 해치려하지만 사람의 생사에는 각기 명(命)이 있는 것이다. 어찌 그들 마음대로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여섯 번째 비빈들의 모함이다. 건성은 비빈들을 시켜 황제에게 이세민을 무함하게 했다.

“진왕이 자칭 ‘하늘이 내게 명을 주어 천하를 주재하게 하려 한다’고 했답니다.”

이에 고조가 크게 화를 내며 건성과 원길의 면전에서 이세민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네가 제위(帝位)를 구하는 마음이 그리도 급하더냐?”

이세민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했음에도 고조는 화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돌궐이 침입했다는 보고가 있자 고조가 얼굴을 펴고 이세민을 다독인 다음 함께 대책을 상의했다.

일곱째 납치 음모. 고조가 태화궁(太和宮)으로 피서를 가자 이세민과 이원길이 대동했다. 원길이 건성에게 “제가 태화궁에 들어갈 때 정예병사를 보내 그를 체포하십시오. 땅굴 속에 가둬두고 입구를 통해 음식만 전달하게 하십시오.”

여덟째는 장수 탈취다. 무덕7년(626년) 돌궐 군대가 황하 남쪽에 주둔해 오성(烏城 섬서성 정변현)을 포위 공격했다. 이건성은 세민 대신 원길을 추천해 북벌부대를 이끌게 했다. 그러면서 진왕부의 맹장들인 진숙보, 울지경덕, 정지절, 단지현(段志玄) 등을 모두 원길이 거느리게 하고 그 외 진왕부의 정예 병력을 제왕부로 편입시켰다. 또 진왕의 싱크탱크인 방현령과 두여회도 건성과 원길의 모함에 빠져 진왕부에서 쫓겨났다.

진왕부 무장 중에서도 울지경덕은 특히 용감했다. 태자 건성과 원길이 그를 유혹하기 위해 금은을 가득 실은 수레를 비밀리에 보내 자기편에 가담하라고 권유했지만 울지경덕은 죽음으로 진왕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원길이 자객을 보내 칼로 찌르게 했지만 울지경덕의 무위(武威)에 눌린 자객이 암살에 실패했다. 이원길은 이에 고조에게 참소해 그를 죽이려 했다. 다행히 이세민이 굳게 요청해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원길은 또 금음보화를 이용해 우이호군(右二護軍) 단지현을 유혹하려 했지만 단지현이 따르지 않았다. 원길이 또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總管) 정지절을 모함하자 고조는 그를 외직인 강주(康州 감숙성 성현)자사로 내보냈다. 이렇게 되자 진왕부의 관원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방현령이 장손무기와 상의한 후 말했다.

“적들의 원망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하루아침에 화가 닥치면 왕부(王府 진왕부)에서 수습할 수 없고 사직의 존망마저도 문제가 될 겁니다. 왕께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평정했던 것처럼 행동에 나서 황실과 국가를 안정시키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형세가 위급하니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기틀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아홉째 제거음모. 무덕 7년 6월 이원길이 고조에게 밤낮으로 이세민을 비방하며 비밀리에 세민을 죽일 것을 청했다. 그러자 고조는 “진왕이 천하를 평정한 공로를 갖고 있고 죄상이 아즉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그를 죽이려한다면 대체 무슨 이유에 근거하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이원길이 말했다. “진왕은 늘 폐하의 조령(詔令)을 어겨왔습니다. 처음 낙양을 평정했을 때도 교만방자 하게 관망하면서 장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고 또 재물을 상으로 나눠줘 개인적인 은덕을 수립했습니다. 칙명을 어긴 것이 이 정도에 달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여 버리시면 되는데 어찌 이유를 근심하십니까?”

고조가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열 번 째 사지에 몰아넣기. 돌궐 부대가 오성을 포위했을 때 이세민 대신 이원길이 군사를 통솔하면서 진왕부의 용맹한 장수들과 정예병력을 징발한 후 이건성이 이원길에게 말했다.

“지금 너는 이미 진왕의 날랜 장수와 정예병사 수만을 얻었다. 내가 진왕과 곤명지(昆明池)에 가서 전별할 때 용사들을 시켜 그를 납치해 장막 뒤에서 죽이고 갑자기 병들어 죽었다고 하면 주상께서도 믿지 않을 수 없으실 것이다.”

“그 후 내가 다시 주상께 사람을 보내 조정을 내게 넘기게 할 것이다. 내가 제위에 오른 후에는 너를 황태제로 삼을 것이다. 울지경덕 등은 이미 네 손에 있으니 때가 되면 땅에 묻어 버리면 된다.”

그러자 이원길은 속으로 ‘만약 진왕만 제거할 수 있다면 태자의 자리를 빼앗기란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다.’라고 여겼다.

하지만 태자부 솔경승(率更丞)으로 있던 왕질(王晊)이 이 음모를 알고는 비밀리에 이세민에게 알려줘 독수(毒手)를 피할 수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