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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비밀 탐구 (20): 차지국의 도술 싸움

글/ 선장

【정견망】

다음에 이어지는 차지국(車遲國)의 도술 싸움도 아주 재미있다.

차지국에는 세 국사(國師 호력대선 녹력대선 양력대선)가 있는데 셋 다 법술(法術)을 약간 할 줄 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런 법술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하다. 《봉신연의》에서 신공표는 목이 잘려도 다시 자라날 수 있었고 비간은 심장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성문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었다. 이런 기이한 생명현상들은 현대의학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법술도 손오공 앞에서는 일격을 감당하지 못했으니 근본적으로 수련과는 함께 언급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수련을 시작하면, 어떤 사람은 소위 말하는 일부 ‘특이공능’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단지 수련초기 층차가 비교적 낮은 것으로 일정한 층차 중에서 약간의 작용을 발휘할 뿐이다. 하지만 보다 높은 층차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이는 물질의 층차 특성에 따라 제한을 받는다. 하지만 ‘신통(神通)’은 다르며 정말로 법력이 끝이 없다. ‘신통’ 앞에서 ‘특이공능’이란 소아과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무슨 공능이나 신통은 없어도 층차가 아주 높다. 만약 이런 사람 앞에서 작은 기공사가 발출한 공능은 마치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泥牛入海)’과처럼 아무 효과가 없다. 때문에 수련인은 절대 ‘특이공능’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수련의 길에서 ‘길가의 들꽃’일 뿐이다. 최종적으로 공성원만(功成圓滿)하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것만이 수련의 진정한 목표다.

《서유기》에는 여러 차례 ‘호풍환우(呼風喚雨 비바람을 불러오는 것)’가 나타나지만 모두 각 지역과 분야의 신선(神仙)들이 통제하고 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모 유명한 기공사가 한가지 공연을 했는데 한 축구장 안으로 가지런하게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 사람들 머리 위의 이 하늘은 대체 인류가 알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천기가 있겠는가? 진정한 ‘자연법칙’은 대체 무엇인가?

사실 차지국에서 만난 재앙, 오계국 국왕이 당한 난(難)은 모두 그들이 나쁜 짓을 저질러 받은 응보였다. 이 역시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에 속한다. 사람이 맹목적으로 과학기술을 미신하면 신을 공경하지 않아 도덕이 패괴되는데 이렇게 내려간다면 어떻게 ‘아름다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한편 차지국에서 벌어진 ‘불도(佛道)의 다툼’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존재했다. 때문에 후인들이 때로 불도(佛道)를 두 문파처럼 나란히 놓고 비교하거나 또는 옥황대제가 어느 편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불도의 다툼에는 아주 깊은 배경이 있지만 저층차의 수련인들은 다 모른다. 사실은 다 역사의 관건적인 시기에 좋은 일을 해서 우주 중에서 거대한 영광을 얻으려는 것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인간세상의 투쟁이 결코 아니다.

《서유기》에서 보면 태백금성(太白金星 도가의 신)도 승려들을 돕고 여러 천신(天神)들 역시 소위 세 ‘대선(大仙)’이 도가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비호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천신들이 수호하는 것은 우주법칙이지 인간세상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인들이 쉽게 착각하는 부분이다.

한편 손오공은 오백화상을 풀어주면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매 사람마다 머리털 하나씩을 주며 위험에 닥쳤을 때 ‘제천대성(齊天大聖)’을 부르기만 하면 자연히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런 상황은 수련계에서는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시공(時空)의 구조는 아주 복잡하고 인체의 구조 역시 몹시 복잡한 것으로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부동한 시공 중에 존재하는 형식 역시 아주 복잡한 것이다. 수련인이 일정한 층차에 도달하면 ‘법신(法身)’이 생겨나와 동시에 각기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층차가 더 높아질수록 법력이 더 높으며 법신의 수량 역시 더 많아진다. 때문에 불가(佛家)에서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동시에 여러 제자를 보호하는 일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이름을 부르고 주문을 외우는 것 역시 확실히 어느 정도 작용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소도(小道) 중의 그런 작은 법술(法術)을 말하는 게 아니다. 불교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는데 이것은 사실 한 구절의 주문으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 시기에는 이보다 더 대단한 5자 내지 9자 진언(眞言)이 있어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며 흉한 일을 만나도 길하게 만들 수 있거나 심지어 기사회생시킬 수 있다. 정말로 법력이 끝이 없다. 이런 것들은 수련계에서는 사실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조금도 ‘허황’하지 않다.

통천하(通天下)의 물살은 너비가 팔백리에 달해 아주 거대하다. 표면적인 글자로 보자면 이는 수련 중의 ‘물(水)’의 변화다. 수련자의 신체 속에서는 끊임없이 물질이 개변되고 있다. 만약 부처님 말씀대로 “한 알의 모래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있다”면 사람의 신체 속에는 또 얼마나 광활한 공간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람 신체 속의 ‘물’이 통천하와 마찬가지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8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