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2절 분권법제
삼성(三省)합의제
당나라 때 중앙조정은 수나라 제도를 이은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였다. 중서성(中書省)에서 명령을 반포하면 문하성(門下省)의 심사를 거쳐 상서성(尙書省) 소속의 육부(六部)에서 집행했다. 처음에 정령(政令)이 만들어지면 먼저 재상들이 중서성에 설치된 정사당(政事堂)에 모여 회의한 후 의결이 된 안건을 황제에게 보고해 비준을 받았다. 그 후 다시 중서성을 거쳐 황제 명의로 조서를 공식 반포했다.
조서가 반포되기 전에 반드시 문하성의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문하성에서 보기에 인준하기 적합하지 않으면 ‘부서(副署 연대서명)’를 거절할 수 있었다. 만약 조서에 부서가 하나라도 없으면 정식으로 반포할 수 없었다. 오직 문하성의 부서를 거친 조서만이 조정의 정식명령이 되었고 상서성에 보내 집행하게 했다.
이처럼 세 기관이 분리되어 서로 협력하면서 상호 견제하는 것을 일러 ‘삼성합의제(三省合議制)’ 또는 ‘삼성박의제(三省駁議制)’라 한다. 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입법(중서성), 심사(문하성), 행정(상서성)의 삼권이 분립된 것이다. 태종은 황제 자신의 조서조차도 반드시 문하성의 부서를 거친 후에야 효력을 발휘한다고 규정해 조령의 실행가능성을 보장하고 제때에 잘못을 발견해 시정할 수 있게 했다.
태종은 또 법치(法治)를 중시해 “법이란 짐 한 사람의 법이 아니라 바로 천하의 법이다.”(《정관정요‧공평(公平)》)라고 했다. 법률이 제정된 후에는 태종 자신이 몸소 실천했고 앞장서서 법을 지켜 법률의 통일과 안정을 수호했다.
신중한 법령심사
수양제 때 “법령이 너무 엄해 사람들이 명령을 감당할 수 없어 끝내 도망한” 것을 거울삼아 태종은 “관대하고 간소한 형정과 법령에 대한 신중한 심사(寬簡刑政,審慎法令)”를 주장했다. 방현령 등이 조서에 따라 새로 수정한 《당률(唐律)》은 태종의 이런 관대하고 간소함을 중시하는 정신에 따라 500조의 율(律)과 20등의 형명(刑名)을 만들었다.
수나라의 율령과 비교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대벽(大辟)이 92조 감소되었고, 유형(流刑)을 도형(徒刑)으로 감경한 조문이 71조, 교수형 대신 오른 발을 자르게 하고 채찍 형을 취소하고 나머지 번잡한 것들을 간단히 줄이며 중벌을 가볍게 한 것이 아주 많았다. 나중에 장손무기가 당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당률소의(唐律疏議)-당나라 형법전인 당률에 대한 주석》를 만들게 했다.
태종은 법을 집행할 때 인정에 구애받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했으며 형량을 정할 때에도 반복해서 생각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규정에 따라 사형을 판결할 때는 경성(京城 장안)에서 이틀간 5차례에 걸쳐 복주(複奏)하게 했고 각 주(州 지방행정중심)에서는 3번 복주하게 했다.
태종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법을 집행함에는 반드시 관대하고 간소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고심하게 마음을 쓴 덕분에 정관 연간의 법제(法制)상황은 아주 좋았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 아주 적었고 사형판결을 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정관 3년 기록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자가 29명에 불과했다. 즉 당시 사람들은 거의 다 형벌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당시 사회의 최고표준인 ‘형조(刑措 역주: 사람들이 모두 법을 준수하기 때문에 형법이 있어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에 도달했다.
견권(甄權)은 수말당초(隋末唐初)의 유명한 의사로 침구에 능했다. 621년 태종이 하남을 평정할 때 이습예(李襲譽)를 파견해 노주(潞州)를 맡겼다. 견권은 의사의 신분으로 이습예를 수행했다. 정관 초년 이습예가 소부감(少府監)이 되었다. 태종은 그에게 견권의 《명당인형도(明堂人形圖)》를 교정해 보완한 후 견권에게 보내 심사한 후 결정하게 했다. 정관 5년 관방에서 그림과 문장을 수정하고 아울러 《명당침구도(明堂針灸圖)》를 완성해 태종에게 바쳤다.
그런데 태종이 《명당침구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인체의 가슴과 등에 12경맥의 혈도(穴道)가 집중된 반면 엉덩이 부위에는 혈위가 적은 것을 발견했다. 태종은 이에 채찍이나 곤장을 치는 태형을 떠올렸는데, 원래 수당시기 형벌에는 사형(死刑), 유형(流刑), 도형(徒刑), 장형(杖刑), 태형(笞刑) 등 5형이 있었는데 그중 태형이 가장 가벼웠다. 죽판(竹板)이나 작은 곤장으로 죄인의 등이나 둔부를 10~50대까지 5등급으로 나누어 때렸다.
하지만 태형이 비록 가장 가벼운 형벌임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감춰져 있었으니 등을 때리다 잘못하면 장애가 남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태종은 죄수들이 불행하게 맞아 죽는 일이 없도록 관아에서 태형을 가할 때면 가슴이나 등은 제외하고 둔부만 때리도록 명령했다. 이때부터 관아에서 죄인을 때릴 때는 오직 둔부만 때리게 되었다.
사형수들이 약속을 지키다
정관 6년(632년) 12월, 태종이 사형수들을 수감한 감옥을 시찰할 때 곧 설이 다가옴을 떠올렸다. 이들 죄수들이 영어(囹圄 감옥에 갇힌)의 몸이라 가족들과 단란한 모임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연민을 느낀 태종은 이미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석방시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단 가족과 함께 설을 보내고 나서 내년 가을까지 반드시 장안으로 돌아와 형을 받도록 했다.
사형수더러 신뢰를 지켜 정해진 시간에 돌아와 형을 받도록 했다는 이 일화는 무슨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들린다! 하지만 천만 뜻밖에도 《자치통감 194권》에 정관 7년 9월이 되자 390명의 사형수들이 감독자나 압송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조당을 찾아왔고 약속을 어긴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종의 진심어린 교화가 중생을 감화시키자 설령 사형수일지라도 감화되어 신뢰와 명예를 지켜 스스로 죽으러 찾아온 것이다. 결국 태종이 이들 사형수들의 형벌을 감형 해주니 천고에 전해오는 미담이 되었다.
제3절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다
근본에 힘쓰는 정치[爲政務本]
태종은 《정본론(政本論)》에서 말했다.
“정치의 요체는 그 근본을 온전히 함에 힘쓰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안정되지 않았다면 비록 먼 곳의 오랑캐가 귀부할지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수양제가 보위를 이을 당시 천하가 강성했지만 덕을 버리고 병력을 소모한 탓에 나라가 전복되었다. 최근에 힐리(頡利 돌궐의 가한)는 족히 강대하다 할만 했지만 교만이 지나쳐 화란(禍亂)이 이르렀고 마침내 대업(大業)을 잃고 결국 짐의 신하가 되었다. 엽호가한(葉護可汗) 역시 매우 강성했으나 스스로 부귀한 것만 믿고 사신을 보내 국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道)를 잃고 혼란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다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그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경솔하게 시기하는 바람에 무리들이 등을 돌리고 친척마저 다 떠나고 말았다. 나라가 복멸하고 후사가 끊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짐은 비록 먼 옛날 요순우탕(堯舜禹湯)의 덕을 계승하진 못했지만 이 무리들(역주: 수양제 힐리가한 엽호가한 등)이 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어찌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원 구조조정과 정예화
정관 원년(627년)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말했다.
“관원은 실무능력이 중요하며 숫자만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오. 사람이 넘쳐나도 일을 잘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과 같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이 이치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바라오. 관원과 관직을 편성할 경우 이에 근거해 불필요한 관원을 줄이도록 하시오.”
그러자 방현령은 즉각 행동에 나서 전국의 문무관원 정원을 640명(이전에는 2천여 명)으로 줄여 편성했다. 한편, 《신당서‧백관지(百官志)》에는 “태종이 성내(省內)와 외관(外官)의 정원을 730명으로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성내(省內)’란 중앙 부서를 말하고 ‘외관’은 지방관원을 말한다.
또 국가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법률과 제도의 보증이 필요하다. 《당률소의(唐律疏儀)‧직제(職制)》 규정에는 “모든 관직에 정원이 있으니 규정된 한도를 넘어 많은 인원을 배치하거나 불필요한 인원을 배치할 경우 한 사람을 초과하면 해당 관청의 장에게 곤장 1백대, 세 사람이 초과하면 죄를 한 등급 가중하고 열 사람을 초과하면 2년 도형(徒刑 유기징역)에 처한다. 후임자가 인원이 초과된 것을 알고 줄이지 않았다면 처벌을 한 등급 감형한다. 또 법규를 어기고 관직을 구한 자는 도형에 처한다. 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법규를 위반한 관리는 처벌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태종은 이렇게 중앙과 지방 관원에 대해 ‘직원령(職員令)’을 만들어 일종의 ‘관원총량제’를 실시해 남아도는 관원문제를 해결했다.
이외에도 태종은 관리들의 도덕성(品德)을 아주 중시했다. 정관 3년(629년) 태종은 관직임용을 책임진 이부상서(吏部尙書) 두여회에게 말했다.
“근래에 짐이 이부(吏部)에서 선발한 인재들을 보니 단지 말 잘하고 문장을 잘 짓는 것만 봐서는 안되면 반드시 그들의 도덕성이 어떠한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소. 왜냐하면 관리의 도덕성을 살피지 않고 임용한 뒤 수년 후 악행이 드러난다면 비록 무거운 형벌로 처벌한다 해도 백성들은 이미 피해를 입은 다음이기 때문이오.”
정관 6년 태종이 위징에게 말했다.
“군주는 반드시 인재를 선택해 관직을 맡겨야 하는 까닭에 사람을 경솔하게 쓸 수 없소. 바른 사람을 쓰면 선량한 일을 하려는 모든 사람을 권장하는 게 되지만 나쁜 사람을 쓰면 선량하지 못한 자들이 다투어 나오게 되오. 공로에 합당하게 포상하면 공이 없는 자는 저절로 물러날 것이며, 죄에 합당하게 처벌하면 사악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할 것이오. 그러므로 포상과 처벌은 가벼이 할 수 없고 사람을 임용할 때는 더욱 신중히 선택해야 함을 알 수 있소.”
태종은 전문적으로 관원을 위해 《관인이 법률을 어기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칙(禁官人違律詔)》을 발표해 관원이 된자는 마땅히 법률을 위반하지 말고 공무에 힘쓰며 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법을 위반할 경우 해당자의 이름을 지명해 발표하게 했다.
“짐이 삼가 보위를 이어 천하에 임함에 전왕(前王)들을 영원한 귀감으로 삼고 전장과 제도를 준수하노라. 앞으로 관원들이 일을 하다 법을 위반하는 자는 담당부서에 보내 조사하게 하고 이름을 알리도록 하라.”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