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황자교육
태종은 황자(皇子)들에 대한 교육을 몹시 중시했다. 그는 자손들에게 늘 도덕규범을 준수하고 도덕의 수양을 강화해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를 숙달하라고 알려주었다. 역대 가훈(家訓) 중에서도 제왕(帝王)의 가훈은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가훈이 태종의 《계황속(誡皇屬)》이다.
《계황속》에서 태종은 황실 가족들에게 말했다.
“짐이 즉위한 지 13년이 되었으나 밖으로 유람 다니는 즐거움을 끊고 안으로는 가무와 여색의 즐거움을 물리쳤다. 너희들은 부귀하게 태어나 깊은 궁궐 속에서 자랐다. 황자(皇子)친왕(親王)들은 우선 모름지기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매번 옷을 입을 때마다 양잠하는 부녀들의 노고를 생각하고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농부들을 생각해야 한다. 남의 말을 듣고 판단해야 할 때는 먼저 감정을 멋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짐이 매번 정사에 임함에 어찌 마음을 태우고 애쓰는 것을 꺼리겠느냐? 너희들은 남의 단점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부귀를 오랫동안 누릴 수 있고 바르고 길함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선현의 말씀 중에서 ‘나를 거스르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를 따르는 자는 나의 적이다(逆吾者是吾師,順吾者是吾賊)’라고 하셨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노라.”
스스로를 요순과 비교하다
태종은 18세에 부친에게 거병하도록 권유한 이후 10여 년간 전쟁터를 누비다 29세에 제위에 올랐다. 이후로는 전쟁을 멈추고 문치에 노력을 기울였고 특히 치국(治國)의 도에 마음을 써서 백성들이 편안히 쉬며 생업에 종사하게 했다.
《신당서(新唐書)》 기록에 따르면 “태종은 이전 왕조의 득실을 알기 위해 특별히 위징, 우세남, 저량 등에게 각종 경전과 사서 중에서 여러 제왕들이 흥성하고 쇠망한 일들을 해석하고 수집하며 책으로 편집해 바치도록 했다. 위징과 우세남 등은 태종의 조령(詔令)에 따라 상고시대 성군(聖君)인 요순우(堯舜禹) 이래 역대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정사를 돌본 사료들을 정리해냈다. 육경과 사사(四史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는 물론이고 제자백가의 책을 두루 열람해 핵심을 골라냈는데 1만 4천여 부 8만 9천여 권의 고적(古籍) 중에서 가려 뽑았다. 정관 5년(631년) 책으로 편집하니 모두 65부 약 50여만 자였으며 《군서치요(群書治要)》라 이름 지었다. 이 책은 치국의 중요한 이론 및 방법, 고대 성현이 나라를 다스린 지혜와 방법 효과 및 경험들을 수집했다.”
태종은 이 책이 널리 핵심을 뽑은 것을 좋아했고 “짐으로 하여금 옛것을 고찰하고 일에 임해 미혹되지 않게 한 것은 공들의 힘이다!”라며 위징 들을 칭찬하고 후한 상을 주었다.
태종은 자신을 요순과 비교하면서 마음을 늘 중생에게 두었다. 천재인화(天災人禍)를 만날 때면 태종은 늘 자신을 먼저 탓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신에게 빌었으며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또 스스로 누리를 삼켜 백성들이 감당하는 업력을 줄이고 자신이 감당해 난관을 넘도록 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관 2년 수도인 장안 일대에 큰 가뭄이 들자 누리떼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태종이 금원(禁苑 황실 후원)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시찰하다가 누리를 보고는 두 손으로 몇 마리를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곡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지금 너희가 그것을 먹었구나. 이는 짐의 백성을 해치는 짓이다. 너에게 영성(靈性)이 있다면 응당 짐의 심장을 먹되 결코 백성을 해치지 말거라.”
말을 마치고는 누리를 집어 삼키려했다. 좌우에 있던 대신들이 황급히 “누리를 삼키면 병이 생길 수 있으니 불가합니다.”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태종은 “짐은 누리떼의 재앙이 내 몸으로 옮기기를 빌었는데 어찌 질병이 두려워 이를 피하겠는가?” 그리고는 누리를 삼켰다. 이후 누리의 피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정관정요 농무(農務) 제30》)
태종은 또 《한황대사조(旱蝗大赦詔)-가문과 누리 피해에 큰 사면을 내리는 조칙》를 발표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제4절 명군(明君) 양신(良臣)
태종이 집정하던 정관 연간에는 임금이 밝고 신하들은 어질어 백성들이 편안히 거하며 즐겁게 생업에 종사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늘을 받들고 도를 중시했으며 몸을 닦고 덕을 길러 공손하게 예의를 지켜 치세의 성황을 이뤘다. 천추만대에 빛나는 이 아름다운 정관의 성세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관리들은 대부분 스스로 청렴하고 근신했다. 왕공(王公)이나 후비(后妃) 공주의 집안, 세력 있는 가문이나 간사한 무리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들은 모두 국법의 위력을 두려워해 자신들의 행적을 가린다거나 감히 힘없는 백성들을 침탈하거나 속이는 등의 짓을 하지 못했다. 상인과 나그네가 벽지에서 머물지라도 강도를 만날 일이 없었고 천하가 크게 다스려진 덕분에 감옥은 늘 텅 비어 있었다. 말과 소는 산이나 들에서 자유롭게 방목되었고 사람들 또한 외출할 때 몇 달씩 문을 닫거나 잠그지 않아도 아무 탈이 없었다. 해를 거듭해 풍년이 들어 쌀 한말이 겨우 3~4전에 불과했다. 나그네는 장안에서 영남, 산동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불필요하게 식량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모두 길에서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동 일대의 마을로 들어서면 나그네는 후한 대접을 받았고 나그네가 떠날 때는 길에서 필요한 것을 넉넉히 공급해주었다. 이런 치세는 모두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정관정요‧정체(政體)제2》)
직언하고 감추지 마라[直言無隱]
태종은 여러 차례 관원들에게 직언하고 꺼리지 말며 윗사람을 범하더라도 폐정(弊政 폐단이 많은 정치)을 찾아내 역사를 거울로 삼고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리도록 했다.
《구직언수조(求直言手詔)-직언을 구하는 수조》에서 말했다.
“짐이 듣자하니 요임금과 순임금은 스스로 어리석게 여겨 더욱 지혜로워졌고 걸왕과 주왕은 혼자만이 지혜롭다고 여겨 어리석음을 더했다. 충언(忠言)에 대해 따르거나 거스르는 반응이 달랐기 때문에 제도(帝道)에서 영예와 치욕이 갈라진 것이다.…그러므로 자신을 비우고 밖으로 구하고 속마음을 열고 안으로 살펴야 한다. 신하가 간언을 했음에도 쓰지 않는다면 이는 짐의 잘못으로 달게 받아들이겠지만 짐이 간언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신하가 간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앞으로는 각자 모두 진심을 다하도록 하고, 만약 옳고 그름이 있다면 직언하며 감추지 말라.”
정관 연간에 태종 주변에 수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든 이유는 바로 태종이 인재를 잘 알고 포용하며 인재를 잘 활용하고 관용의 폭이 컸던 것 외에도 인재를 선발하고 인재를 씀에 ‘신중히 선택’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관원의 숫자만 늘려 자리를 채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태종의 중신(重臣)들은 다 정직하고 청렴했으며 집안도 청빈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태종을 보좌하고 몸과 마음을 다해 나라를 위해 일했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바로 이렇게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당조(唐朝)는 처음 건립되었을 때부터 과거에 폐기되었던 많은 사업들이 신속히 흥성해졌고 아주 빨리 ‘정관의 치’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활달한 ‘정관의 치’는 또한 중화 제일조(第一朝)로 위풍당당한 대당황조(大唐皇朝)를 성취시켰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