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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12): 성대한 역사편찬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5철 성대한 사서(史書) 편찬

성세(盛世)의 사서편찬

당태종은 화하(華夏 중국)란 큰 무대에 등장했던 여러 조대(朝代)의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것이 인류의 사상을 만드는 공정(工程) 중에서 일으킨 작용을 몹시 중시했다. 이에 친히 명령을 내려 《양서(梁書)》,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진서(晉書)》 등 6부의 사서를 완성하게 했다. 이것은 청나라 때 건륭(乾隆)황제가 정한 24부 정사(正史)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다. 6부 사서의 편찬 과정은 근본부터 바로잡는 큰 공정이었다. 가령 사료(史料)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불도(佛道)의 수련이나 특이한 신적(神跡) 등을 포함해 전보다 더 넓은 서적들까지 확장했고 이를 통해 해당 조대의 특색을 드러내게 했다.

태종은 또 정식으로 사관(史館)을 설립해 전대(前代)의 역사 및 기거록(起居錄 실록)과 해당 왕조의 국사(國史)를 편수하고 재상이 감수(監修)하는 풍속을 만들었다. 이는 천년 후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진(晉)나라 때 사마표(司馬彪)는 《속한서(續漢書)》를 편찬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건립한 동한(東漢)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태종이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다음 시를 지었다.

《영사마표속한지(詠司馬彪續漢志)-사마표의 속한지를 읽으며》

二儀初創象 三才乃分位 이의초창상 삼재내분위非惟樹司牧 固亦垂文字 비유수사목 고역수문자綿代更膺期 芳圖無輟記 면대갱응기 방도무철기炎漢承君道 英謨纂神器 염한승군도 영모찬신기潛龍既可躍 逵兔奚難致 잠룡기가약 규토해난치前史殫妙詞 後昆沉雅思 전사탄묘사 후곤침아사書言揚盛跡 補闕興洪志 서언양성적 보궐흥홍지川谷猶舊途 郡國開新意 천곡유구도 군국개신의梅山未覺朽 穀水誰雲異 매산미각후 곡수수운이車服隨名表 文物因時置 차복수명표 문물인시치鳳戟翼康衢 鑾輿總柔轡 봉극익강구 난여총유비清濁必能澄 洪纖幸無棄 청탁필능징 홍섬행무기觀儀不失序 遵禮方由事 관의불실서 준례방유사政宣竹律和 時平玉條備 정선죽율화 시평옥조비文囿雕奇彩 藝門蘊深致 문유조기채 예문온심치雲飛星共流 風揚月兼至 운비성홍류 풍양월겸지類禋遵令典 壇壝資良地 유인준영전 단유자양지五勝竟無違 百司誠有庇 오승경무위 백사성유비粵予承暇景 談叢引泉秘 월여승가경 담총인천비討論窮義府 看核披經笥 토론궁의부 간핵피경사大辨良難仰 小學終先匱 대변양난앙 소학종선궤聞道諒知榮 含毫孰忘愧 문도양지영 함호숙망괴

이의(二儀 음양)가 처음 사상(四象)을 개창하니 천지인 삼재가 비로소 위치를 나눈 후사목(司牧 관리)을 세워 백성을 기르고 문자를 드리워 역사를 전해왔도다.조대(朝代)를 이어가며 다시 천명을 받았고 신기한 책 끊이지 않았네.한나라는 임금의 도를 계승하여 뛰어난 지혜로 제위를 계승했으니잠긴 용이 뛰어오르니 큰길의 토끼 잡는 데 어찌 어려움 있었으랴?전시대 역사 묘한 문장으로 다하니 뒤의 현자는 우아한 생각에 잠겨책으로 성대한 자취 찬양하니 빠진 곳 보충하고 웅대한 뜻 일으켰네.산천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지만 군국(郡國)에는 새로운 뜻 열었구나.매산(梅山)은 썩을 생각 안하는데 곡수는 누가 다르다 했는가?수레와 복장은 이름 따라 드러나고 문물은 때에 따라 변하노라.봉황 그린 창으로 넓은 거리 보호하며 천자의 수레 부드럽게 움직이네.청탁은 반드시 맑아질 수 있으니 크고 작은 것은 다행히 버리지 않았구나.태도가 질서정연한 것을 보니 예를 받들어야 사업을 이룰 수 있도다.정치가 펼쳐지니 음악도 조화롭고 시대가 평안하니 옥률(玉律)을 갖췄구나.문예의 전당에 기이한 무늬 새기니 각종 예술 깊고도 심오하도다.천신께 제사지내 아름다운 예를 따르고 임시로 묵는 궁전도 길지를 택하였네.오행이 서로 조화되어 어그러짐 전혀 없고 백관들 진실로 서로 보호하였네.나는 이 아름다운 틈에 옛이야기 이끌어 심오한 진리 이야기하노라.시경과 서경을 끝없이 토론하며 깊이 있게 토론하며 경서를 뒤적이네.심오한 견해는 진실로 우러러보기 어려우니 배움이 얕은 자는 여전히 배워야 하네.대도(大道)를 듣고서야 영화를 깨달으니 붓 잡은 누가 부끄러움 잊겠는가?

대략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을 낳고 태극이 이의(二儀)를 낳으니 이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천지인 삼재(三才)가 위치를 정하니 신(神)이 신주(神州 중국)를 개창했다. 뭇 천국의 중생들이 세상에 내려와 중원에 들어와 끊이지 않고 연면히 조대(朝代)를 이어갔다. 화하는 유독 신이 전한 문자로 중단 없이 한 왕조의 천자에 한 왕조의 백성, 복식, 문물, 율령(律令), 예의(禮儀), 율려(律呂), 문장, 천문, 전장(典章), 오행(五行), 백관(百官)을 기록해 우주천지만물에 대응한다.

《당회요(唐會要)》 63권에는 “정관 10년 정월 20일 상서좌복야 방현령(房玄齡), 시중 위징(魏徵), 산기상시(散騎常侍) 요사렴(姚思廉),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 이백약(李百藥)과 공영달(孔穎達), 예부시랑(禮部侍郎) 영호덕분(令狐德棻), 중서시랑(中書侍郎) 잠문본(岑文本), 중서사인(中書舍人) 허경종(許敬宗) 등이 주, 수, 양, 진, 제 오대(五代)의 역사를 편집해 황제에게 올리자 각기 (공에 따라) 차등을 주어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는 6520부 5만 6881권에 달하는 서적을 각각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도(道), 불(佛)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이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적을 분류한 최초의 시도였다. 지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경(經)・사(史)・자(子)・집(集)’ 4부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나라 때 분류법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친다.

이중 사(史)류만 보면 정사(正史), 고사(古史), 잡사(雜史), 패사(霸史), 기거주(起居注), 구사(舊事), 직관(職官), 의주(儀注), 형법(刑法), 잡전(雜傳), 지리(地理), 보계(譜系), 목록(目錄) 등 13종류로 모두 역사기록들이다. 하지만 당나라 때의 6분류법은 나중에 후인들에 의해 도(道)와 불(佛) 두 가지가 삭제되고 4류만 남으니 후세에 도덕이 미끄러져 내려온 궤적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정사란 《사기》나 《한서(漢書)》처럼 제왕의 본기(本紀)를 핵심으로 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를 말한다. 물론 《사기》는 사마천(司馬遷) 가문의 개인 저술로 조정에서 정식으로 편찬한 역사는 아니다.

고사(古事)란 지금 편년체라 부르는 것으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예로 들 수 있다. 즉 연도 순서대로 편찬한 역사서를 말한다.

잡사란 《전국책》이나 《오월춘추(吳越春秋)》처럼 박식한 인사가 널리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패사(覇史)는 지금은 별사(別史)라 부르는 것으로 천하가 분열되어 있을 때 여러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기거주(起居注)는 실록이라고도 하는데 임금의 말과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구사(舊事)란 지금은 재기(載記)라 하며 《한무제고사(漢武帝故事)》나 《진건무고사(晉建武故事)》 등을 말한다.

또 잡전(雜傳)이란 지금은 전기(傳記)라 부른다. 예를 들면 유향(劉向)의 《열선전찬(列仙傳贊)》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완효서(阮孝緖)의 《고은전(高隱傳)》,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 반고(班固)의 《동방삭전(東方朔傳)》,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 간보(干寶)의 《수신기(搜神記)》, 도잠(陶潛 도연명)의 《수신후기(搜神後記)》 등 각종 특이한 인물이나 방외지사(方外之士)를 기록한 것이다. 고대의 사관(史官)이 기록하는 범위는 아주 넓어서 단순히 제왕이나 장상(將相)의 일만 기록했던 것이 아니다.

허신(許慎)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사(史)란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다. 우(又 손)로 중(中)을 잡음을 따르는데 중(中)은 정(正)이다(史,記事者也;從又持中,中,正也).”라고 했다.

사실 역사를 기록하는 체재(體裁)라든가, 인물이라든가 연대를 막론하고 한 조대(朝代) 억만이 넘는 수많은 중생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사서(史書)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런 일이다.

《당회요》 63권에는 “정관 20년 윤삼월 4일 황상이 조서를 내려 《진서(晉書)》를 다시 편찬하게 했다. 이에 사공(司空) 방현령, 중서령 저수량(褚遂良), 태자좌서자 허경종이 관장하고 또 중서사인 내제(來濟), 저작랑(著作郞) 육원사(陸元仕), 저작랑 유자익(劉子翼), 주객낭중(主客郎中) 노승기(盧承基), 태사령(太史令) 이순풍(李淳風), 태자사인(太子舍人) 이의부(李義府)와 설원초(薛元超), 기거랑(起居郎) 상관의(上官儀),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郎) 최행공(崔行功), 형부(刑部)원외랑 신구어(辛邱馭), 저작랑(著作郞) 유윤지(劉允之), 광록시(光祿寺) 주부(主簿) 양인경(楊仁卿), 어사대(御史臺) 주부 이연수(李延壽), 교서랑(校書郎) 장문공(張文恭)이 함께 업무를 나눠 실록을 편찬했다

또 전 아주자사(雅州刺史) 영호덕분(令狐德棻), 태자사의랑(太子司儀郎) 경파(敬播),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郎) 이안기(李安期),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郎) 이회엄(李懷儼) 등에게 조례를 상세히 하고 고증을 더해 장영서(臧榮緒)의 《진서(晉書)》를 기본으로 여러 가의 학설 및 진나라 시대의 문집들을 수집해 10기(記), 10지(志), 70열전(列傳), 30재기(載紀)를 만들었다.

특히 태종이 직접 선제(宣帝 사마의)와 무제(武帝 사마염) 두 황제의 본기 및 육기전(陸機傳)과 왕희지전(王羲之傳) 등 4론(四論)을 지어 제지(制旨)라 하고 방현령 이하를 사신(史臣)이라 했으며 범례는 다 경파가 혼자 창안했다. 이 책을 황태자와 신라 사자에게 각 1부씩 하사했다.”

태종이 조정 중신(重臣), 대도(大道) 및 명유(名儒)들을 총집결시켜 사서를 편찬하고 아울러 친히 4론을 지었으니 역사편찬을 어느 정도로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이중 재기 30권에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저(氐), 강(羌) 등이 건립한 16국 정권을 기록했다. 이것은 기전체 체제의 《진서》가 지닌 한 가지 특징이다. 진서는 또 《수신기(搜神記)》 등 잡전(雜傳) 역사서에서 대량의 신이한 일화와 도가수련전기 등을 채록해 실었다.

《수진서조(修晉書詔)-진서 편찬의 조》

“짐이 재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한 후 군대를 돌려 사방을 순시하는 예를 마치자 천하에 변고가 사라졌고 백관들이 많이 한가해졌다. 마침 한가한 날을 이용해 문서와 전적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복희씨 시대의 거북의 글을 상고하고 헌원황제 때 오전서(鳥篆書 새 발자국 모양의 서체)로 된 간책을 변별하니 도서관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 년 전의 일들 알 수 있고 상고 시대 여러 제왕(帝王)들의 자취를 직접 본 것처럼 살필 수 있었다. 우사(右史)는 말을 기록해 없어지지 않게 했고 좌사(左史)는 일을 설명해 오래도록 남게 하였다. 문자의 근본을 발휘하고 서계(書契)의 근원에 통달하게 하니 사적(史籍 역사서적)의 쓰임이 가히 크다고 할 수 있도다!”

“헌원황제는 저송(沮誦)을 우사로 삼아 서계로 일을 기록했고 주(周)나라 때 백양(伯陽)이 태사가 되어 변천을 기록한 이래 조대를 거치면서 역대 사신(史臣)의 저술이 끊이지 않았다. 공자는 《도올(檮杌)-초나라 역사서》을 채집해 《춘추》를 저술했고 초나라 영왕의 좌사 의상(倚相)은 삼분(三墳) 오전(五典) 팔색(八索) 구구(九丘) 등 여러 고전에 통달했다.

서한(西漢)에 들어와 사마천의 《사기》가 통사(通史)의 선구가 되었고 반고는 《한서》를 지어 단대사의 시조가 되었다. 동한에 들어와 범엽(范曄)과 사침(謝沉)이 《후한서》를 찬하고 사마표는 《속한서(續漢書)》를 저술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진수의 《삼국지》 남조 송(宋)나라에 들어와 심약(沈約)의 《송사(宋史)》가 나타났다.

짐이 칙명으로 《양서》,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및 남북조 및 수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했다. 여러 사서들은 정기(正氣)를 바로 세워 선(善)을 날리고 악(惡)을 억누르지 않음이 없으니 도덕을 숭상함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각 조대의 사적(事跡)과 전장(典章)을 기록했다.

진(晉)나라는 오행 중에서 금덕(金德)에 상응하여 탄생했고 조(曹)씨의 위(魏)나라를 대신해 흥기하여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꿔 새로운 천지를 만들었다. 나중에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으로 천도해 중흥하니 서진과 동진은 큰무대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비록 18가(家)가 진나라 역사를 기록했으나 어느 것 하나 전면적이고 정확하게 그 특색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특별히 사관에 명하니 《진서》를 새로 편찬해 그 역사를 완벽하게 만들도록 하라.”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