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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13): 탁월한 혜안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탁월한 혜안

《진서(晉書)》를 편수하는 과정 중에 태종은 만승지존(萬乘之尊 천자)의 지위임에도 친히 《진선제론(晉宣帝論)》, 《진무제론(晉武帝論)》, 《육기론(陸機論)》, 《왕희지론(王羲之論)》 등 4편의 사론(史論)을 지었다.

이전 사론들은 너무 간략하거나 너무 편파적이거나 또는 공덕을 찬양하는데 치우치거나 또는 개인의 선악(善惡)에 얽매여 언급하는 생명과 사물이 큰 무대에서 부여받은 역할의 특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기 힘들었다. 태종의 사론은 초연히 세상을 벗어난 신필(神筆)을 발휘해 불과 몇 마디 말로 인물과 생명의 특색을 생생히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했고 긴밀히 연계된 구절로 해당 인물의 역할에 담긴 층층의 온의(蘊義)를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문장흐름이 마치 황하의 물처럼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이는 사론 분야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후세에 모범을 수립했으니 천하에 독보적이었다.

《진선제론(晉宣帝論)》

“황제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천지(天地)가 큰 것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의 귀함은 천자를 으뜸으로 삼는다.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무상(無常)하고 흥하고 망함에는 운(運)이 있다. 그러므로 오제(五帝) 이전에는 천자가 되는 것을 근심으로 여겼으나 삼왕(三王) 이후로는 천자의 자리를 즐거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지력(智力)을 겨루고 이해(利害)를 다투며 큰 나라와 작은 나라들이 서로 병탄하고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서로 습격했다. 위(魏)에 이르러 삼국이 대치해 전란이 그치지 않고 어두운 안개가 도처에 드리웠다.

선황제(宣皇 사마의를 가리킴)은 탁월한 재능으로 시운에 응해 임금을 보좌하면서 문(文)으로 이어 다스리고 무(武)로 위엄을 떨쳤다. 사람을 씀에 자신을 대하는 것과 같았고 현인(賢人)을 구함은 늘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깊고 험한 정(情)은 헤아리기 어려웠고 그의 너그러운 성품은 능히 남을 포용할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세속에 있으면서(和光同塵) 시세에 따라 펼치거나 물러났으며, 비늘을 거두고 날개를 숨겨 때를 기다리며 풍운(風雲)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 속이려는 마음을 품고 충성을 가장했으며 장차 위태로워지는 명(命)에 처해 평안을 구했다.

살펴보면 안으로는 웅대한 지략으로 판단하고 밖으로는 좋은 꾀로 결단해, 백일 만에 연왕(燕王) 공손연(公孫淵)을 죽이고 열흘 만에 맹달(孟達)을 사로잡은 것을 보면 스스로 병력을 움직일 때는 신(神)과 같았고 꾀를 씀에는 두 번 헤아리는 일이 없었다. 그 뒤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거동해 제갈량(諸葛亮)과 대치했다. 그는 병사들을 단속하며 본래 싸울 뜻이 없었으나 (제갈량으로부터) 건괵(巾幗 역주: 여인용 머리 수건으로 사마의를 도발한 것)을 전해받자 바야흐로 분노의 마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부절을 지닌 신비(辛毗)가 군문(軍門)에서 제지하니 웅대한 계획으로 뜻을 굽히고 천리 길을 가서 싸움을 청해 거짓으로 위세를 보이려 했다.

아울러 진(秦)과 촉(蜀)지역 사람들은 용감함과 나약함에 있어 대적할 바가 못 되고 길의 험준하고 평탄함이 서로 다르니 그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같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약 이렇게 공을 다퉜다면 이로웠음을 알 수 있다(역주: 여러 가지 조건상 위나라가 유리했음에도 사마의가 제갈량과 맞서 싸우지 않은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 그럼에도 군문을 닫고 보루를 굳게 지키며 감히 싸우지 못하고 살아서는 실(實 살아 있는 제갈량)을 겁내 전진하지 못했고 죽어서는 허(虛 죽은 제갈량)를 의심해 오히려 달아났으니 훌륭한 장수의 도가 여기에서 그르쳤구나!

위문제(魏文帝 조비) 때는 임금을 보필하며 권력이 막중했으니 허창(許昌)에서는 소하(蕭何 역주: 한고조 유방의 승상)와 같은 임무를 맡았고 숭화전(崇華殿)에서는 곽광(霍光 역주: 한무제의 고명을 받은 장군)보다 더한 부탁을 받았다. 응당 정성과 절개를 다했더라면 이윤(伊尹 상나라 탕왕 시기의 어진 재상)이나 부열(傅說 상나라 고종 때의 어진 재상)과 이름을 나란히 했을 것이다.

또 위 명제(明帝 조예)가 임종하기 전에도 동량(棟樑) 같은 나라의 중임을 맡겼다. 두 황제의 유조(遺詔)를 받고 삼조(三朝 문제, 명제, 제왕)를 보좌했으며 명제가 운명하기 전에는 차마 죽지 못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려 후사를 당부했음에도 목숨을 다해 보답하지 않았다. 천자가 밖에 있을 때 안에서 갑병(甲兵)을 일으켰고 명제 능묘를 덮은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급히 서로 주륙하니 올바른 신하의 몸으로써 어찌 이와 같은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선(善)을 다했다는 것이 이에 의심스럽다.

무릇 정벌하고 토벌하는 책략에 있어 어찌 동쪽에선 지혜롭다가 서쪽에선 어리석어졌겠는가? 임금을 보좌하는 마음이 어찌 전에는 충성스러웠다고 나중에 어지러워졌겠는가? 그러므로 동진의 명제(明帝)는 선조가 속임수로 공을 이룬 것을 수치스러워했고 석륵(石勒 역주: 후조後趙 창업군주)은 거리낌 없이 (사마의가) 간교하게 대업(大業)을 정했노라고 비웃었던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길 “3년 동안 선을 쌓아도 아는 사람이 적지만 하루만 악을 행해도 천하에 널리 알려진다(積善三年,知之者少;為惡一日,聞于天下).”고 했으니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비록 당년에는 스스로 허물을 숨기더라도 후대에는 결국 비웃음을 당하게 된다. 이는 마치 종(鐘)을 훔치면서 자신의 귀를 막으면 남들도 종소리를 듣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거나 또는 나쁜 마음을 먹고 황금을 훔치고는 저자 사람들이 보지 못하리라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까운 것을 탐하는 자는 멀리 있는 것을 잃고 이익에 탐닉하는 자는 명예를 손상시킴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손해를 봄으로써 남을 이롭게 하면 남이 화를 당할지라도 자신은 복을 받는 것만 못하다.

순리에 따라 움직이면 일을 이루기 쉽지만 시기를 어겨 움직이면 공(功)을 이루기 어려운 법이다. 하물며 미처 이루지 못한 진(晉)의 기업(基業)으로 아직 복(福)이 남은 위(魏)를 핍박했단 말인가? 비록 다시 천지에 도를 회복하고 창생(蒼生)이 덕을 받아도 하늘이 아직 열어주지 않을 때에는 보위가 오히려 저해되니 지혜로 겨룰 수도 없고 힘으로 다툴 수도 없다. 비록 복이 그 후대에까지 흘렀지만 자신은 끝내 북면(北面)한 채 신하로 죽었구나.”

사마염(司馬炎)은 사마소(司馬昭 사마의의 둘째 아들)의 큰아들이다. 265년 사마소가 병사하자 부친의 뒤를 이어 위나라의 상국(相國)과 진왕(晉王) 왕위를 물려받았다. 266년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曹奐 원제)의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진(晉)’으로 고치니 이가 바로 진무제다.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손호(孫皓)의 항복을 받아 마침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 초기에는 그의 ‘태강(太康)의 치’를 이룰 정도로 선정을 펼쳤지만 나중에 점차 정사를 게을리 하여 진나라가 쇠망하는 화근을 만들었다.

당태종은 또 사마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진무제론(晉武帝論)》

“무황제(武皇 사마염)가 제위를 이으니 천명을 받고 태어나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교화해 편안함으로 수고로움을 대신하고 혼란을 다스렸다. 화려한 비단 공물(貢物)을 끊고 화려한 장식을 없애 사치스런 풍속을 바로잡아 검약하게 만들었고 경박한 사회풍속을 다시 순박하게 만들었다. 좋은 직언이 있으면 마음에 남겨 채택했고 유의(劉毅)나 배해(裴楷)의 직언을 포용했으며 혜소(嵇紹)나 허기(許奇)는 비록 적이었지만 버리지 않았다. 어짊으로 사물을 다스리고 관대함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웅대한 지략과 흉금은 제왕의 그릇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백성들이 화합하고 풍속이 안정되었으며 생활이 풍족해졌다.… 또 마융(馬隆)이 서역을 정벌하고 왕준(王浚)이 남쪽을 원정하니 전대(前代)에 불통되었던 곳을 통하게 했고 전왕(前王)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을 정복했다.

이에 응해 상서로운 현상들이 잇따랐고 풍속과 교화가 엄숙하고 맑아지니 하늘과 사람의 공(功)이 이루어졌고 패왕(霸王)의 대업이 크게 되었다. 비록 봉선의 예는 사양하고 실행하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교만한 마음이 일어났다. 영토가 넓은 것을 보고는 만 가지를 버려도 근심이 없다고 했고, 천하가 편안한 것을 보고는 천년이 지나도 영원히 다스려질 것이라 했다. 넓은 곳에 처해도 좁은 곳을 생각하면 오랫동안 넓은 곳에 처할 수 있음을 몰랐고, 다스림에 머물러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면 다스림이 늘 존재하게 됨을 몰랐다. 게다가 번왕(藩王)을 세우는 실수를 하고 잘못된 인재에게 후사를 맡겼으니 태평을 이루기도 전에 화란(禍亂)이 먼저 닥쳐왔다.

이는 마치 남쪽 월(越)나라로 가면서 북쪽 사막의 길을 따르는 것 같고, 산을 오르면서 뱃길을 찾는 것과 같았다. 멀리 가고자 하면 갈수록 더 어려워졌고 남과 북으로 두 배로 벌어지니 위아래가 서로 배반해 그 지극함을 구할지라도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게다가 흔들리기 쉬운 새로운 제업(帝業)으로 오랫동안 제거하지 못한 근심이 있음에랴. 때문에 가충(賈充)은 간사한 마음을 품고 권력을 손에 쥐었고 양준(楊駿)은 승냥이처럼 재앙을 일으킬 마음을 품고 보좌했다.

진무제(晉武帝)가 붕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번왕들이 소원해져 잇달아 무력을 다투며 그 근본을 멸했고, 나라의 동량들도 충심을 버리고 거짓을 일으켜 각기 무리를 이끌며 무위(武威)를 드러냈다. 불과 몇 년 만에 나라의 기강이 크게 어지러워지고 국내외가 혼란에 빠지니 서진이 멸망하고 동쪽으로 종묘를 옮겨야 했다. 이 틈을 타고 북방의 이민족(오호)들이 중원에 들어와 신주를 차지했다.

큰 것을 버려 남에게 주고 작은 것을 덮어 스스로 밀어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실로 앞에서 신중함을 잃어 후대에 우환을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을 아는 사람은 현부(賢父 어진 부친)이고 신하를 아는 사람은 밝은 임금(明君)이다. 자식이 불초(不肖)하면 집안이 망하고 신하가 불충(不忠)하면 나라가 어지러우니 나라가 어지러우면 편안할 수 없고 집안이 망하면 온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시작을 방비하고 성인은 그 단서를 막는 것이다. 그러나 세조(世祖 진무제)는 순욱(荀勖)의 간사한 음모에 미혹되고 왕혼(王渾)의 거짓책략을 맹신했고 남들의 의견에 따라 마음이 흔들려 자신이 뜻한 대로 정하지 못했다. 마땅히 유원해(劉元海 역주: 전조前趙의 창업군주)를 제거해야 했음에도 제거하지 않아 마침내 천하를 어지럽게 했고, 마땅히 혜제(惠帝 사마충)를 폐립해야 했으나 폐립하지 못해 결국 홍대한 제업을 망쳐버렸다.

무릇 한 사람의 덕을 완전히 함은 가벼운 것이고 천하를 구원하는 공은 중한 것이고, 아들을 버림은 작은 인(忍)이요 사직을 편안히 함은 큰 효(孝)이다. 하물며 3대에 걸쳐 이룬 제업을 아들 때문에 잃었으니 소위 가벼운 덕을 얻고 무거운 공을 버리며, 작은 인(忍)이 두려워 큰 효를 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현(聖賢)의 도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비록 처음에는 시작을 잘했으나 끝에 가서는 정령(政令)이 어그러졌으니 정성을 다한 역사서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노라.”

《육기론(陸機論)》

“옛사람이 말하길 ‘비록 초나라에 인재가 많아도 실제 쓰는 것은 진나라다(雖楚有才,晉實用之)’라고 했다. 대체로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를 보면 실로 뛰어난 인재로 일찍부터 아름다운 재능을 발휘했으니 안목이 맑고 밝았으며 모습이 아주 준수했다. 문장의 웅대하고 화려함은 당시에 독보적이었고 강개(慷慨)한 언사는 고금에 으뜸이었다. 뛰어난 언어(詞)는 마치 보름달처럼 멀리까지 빛났고 깊고 곡절한 뜻은 겹겹이 쌓인 바위처럼 빼어났다. 천 가지 조문을 조리 있게 분석함은 마치 번개를 쳐서 안개를 흩는 것 같았고 한 가지 단서로 문장을 연결함은 마치 구슬이 흐르듯 자연스런 조화를 이뤘다.

그 언어는 깊고도 전아하며 그 뜻은 넓고도 빛이 났다. 그러므로 매승(枚乘 서한의 유명한 문장가)과 사마상여(司馬相如 서한의 유명한 문장가)를 멀리 뛰어넘었고 왕찬(王粲 건안7자의 한명으로 유명한 시인) 유정(劉楨 건안7자의 한 사람)을 밟고 오를 수 있었으니 백대 문단의 종주(百代文宗)는 육기 한사람뿐이었다.”

“무릇 현인(賢人)의 입신에는 공명(功名)을 근본으로 삼고 선비가 세상에 처함은 부귀(富貴)를 으뜸으로 삼는다. 그런즉 영예와 이익은 사람들이 탐하는 바요 재앙과 치욕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편안히 거처하며 명예를 보존할 수 있으면 군자가 거처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현귀(顯貴)함에 몸을 둠은 철사(哲士 밝은 선비)가 떠나는 것이다. 난(蘭)을 길 한복판에 심는 것은 필경 오랫동안 푸르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고 계수나무가 깊은 골짜기에서 자라는 것은 끝까지 붉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난을 미워하고 계수나무를 친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니 어찌 길은 해롭고 골짜기는 이롭기 때문이겠는가? 다만 살고 죽음에 다름이 있고 숨고 드러나는 시세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면 평안한 경우가 드물고 기이함을 감추고 거처를 선택해야만 본성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 육기 육운 형제의 행적을 보면 역시 지혜가 말에 미치지 못한다. 그 문장의 경계를 보고서도 어찌 알기는 쉬워도 행동은 어려웠단 말인가? 스스로 지혜가 충분하다며 편안히 여길 때에야 임금을 보좌하고 명예와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며 이전 사업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 세속에 통달하지 못하고 운의 향방을 모른다면 나아가도 혼란을 바로잡을 수 없고 물러나도 몸을 온전히 숨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용렬한 군주를 위해 마음을 다했다. 하지만 가득한 충심은 인정받지 못했고 무고한 비방에 의심이 생겨났으니 삶은 자신에게 달렸어도 오래가기 힘들고 죽음은 남에게 달렸으니 재촉받기 쉬웠다.

죽기 전에 상채(上蔡)에서 황구와 함께 노닐고 싶다던 이사(李斯 진시황과 진이세 때 승상)의 전철을 경계로 삼지 못하고 화정(華亭 육기의 고향)의 학 울음소리 더 이상 듣지 못하는 후회를 남겼구나! 마지막에는 종족이 몰살당해 제사마저 끊어졌으니 진실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3대(육손 육항 육기)가 장수로 있으면서 투항한 사람들을 주살하는 상서롭지 못한 일을 했으니 후손에게 재앙이 이른 것이다. 서릉(西陵)에서 흉한 단서를 맺어 하교(河橋)에서 그 재앙의 보응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일이겠는가!”

육기(陸機)는 서진의 문장가로 강동의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다. 조부는 삼국시대 촉의 관우를 물리치고 형주를 차지한 오나라 명장 육손(陸遜)이고 부친 육항(陸抗)은 오나라 대사마(大司馬 군사령관)를 역임했다. 육기는 동생 육운(陸雲)과 함께 ‘이륙(二陸)’으로 불렸다. 280년 오나라가 멸망한 후 두 형제는 진의 수도 장안으로 올라왔고 당시 태상(太常)이자 문단의 영수였던 장화(張華)의 중시를 받았다.

육기는 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의 추천으로 평원내사(平原內史)를 지냈다. 팔왕(八王)의 난 때는 후장군(後將軍) 겸 하북대도독(河北大都督)에 임명되어 20만 군사를 이끌고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배하고 여러 사람의 시기를 받아 사마영에 의해 처형되었다. 임종에 앞서 “화정(華亭 육기의 고향)의 학 울음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라고 탄식했다.(고향에 다시 돌아가 학이 우는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의미)

육기는 또 《문부(文賦)》를 지어 문장의 창작 및 형식과 내함에 대해 개괄했다. 육기는 문장 창작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정력을 외부에서 돌려 자신의 내심을 향하게 하고 마음을 조용히 하여 사유를 집중해 잡념을 배제하고 논술하되 문자를 사용해 천지만물을 개괄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작할 때는 모두 시각 청각을 거둬들이고 생각에 잠겨서 두루두루 탐색해야 한다. 정신은 팔방의 끝까지 달라가고 마음은 만 길 높이에서 노닌다.…마음을 맑게 하여 생각을 집중하고 멀리까지 두루 고려해 문장을 짓는다. 문장의 체재 안에 천지(天地)를 포괄하고 붓 끝에 만물을 가득 담아 묘사한다.”

육기는 또 문체를 다음과 같이 10가지로 개괄했다.

“시(詩)는 정감의 흐름을 따라 고운 어휘를 써야 하고 부(賦)는 사물을 묘사하면서 형상을 밝게 그러내야 한다. 비(碑)는 문장의 수식이 내용과 부합해야 하고 뇌(誄)는 잇고 엮어서 슬픔을 드러내야 한다. 명(銘)은 넓은 내용을 축약해 온화한 문장이 되어야 하고 잠(箴)은 말투를 누그러뜨리고 맑고 씩씩하게 써야 한다. 송(頌)은 우아한 내용에 화려한 수사를 해야 하고 논(論)은 정밀한 논리를 유창하게 펼쳐야 한다. 주(奏)는 공평하고 투철하되 점잖게 의견을 개진해야 하고 세(說)는 화려한 언변으로 에둘러 설득해야 한다.

(詩緣情而綺靡,賦體物而瀏亮。碑披文以相質,誄纏綿而淒愴。銘博約而溫潤,箴頓挫而清壯。頌優遊以彬蔚,論精微而朗暢。奏平徹以閑雅,說煒曄而譎誑。)”

육기는 또 문학의 예술성을 제련해 다른 예술과 서로 소통시켰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제사에 쓰는 국에 감칠맛이 없는 것 같고 주현(朱弦 악기 줄)의 소리가 담담히 흩어지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노래하면 세 사람 정도만 감탄할 정도로 대중성은 떨어지지만 진실로 우아하기는 하되 화려하지 않다.”

“비유하자면 무희가 박자에 맞춰 소맷자락을 펼치는 것 같고 가수가 현악기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

육기는 또 문학에 싣는 내함(內涵)은 역사의 의미를 기록하고 천지자연과 상통하는 경계를 지니며 도덕을 널리 알리는 사명이 있다고 천명했다.

“이 문장의 쓰임을 말하자면 진실로 많은 이치가 말미암는 바탕이 된다. 만 리까지 넓혀가도 아무런 막힘이 없고 억 년을 통하는 훌륭한 나루가 된다. 굽어보면 미래에 법칙을 부여하고 올려보면 고인(古人)에게 본보기를 관찰하네. 추락하려는 문왕과 무왕의 도를 구제해 불후의 문장에 교화의 소리를 펼쳐놓았네. 길이 멀다 하여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이치가 미묘하다 하여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다. 만물을 적셔주는 건 구름과 비에 짝할 만하고 무궁한 변화는 귀신과 흡사하구나. 금석악기로 연주해 그 덕을 넓히고 관현악기로 연주하며 날마다 새롭게 하노라.”

태종은 육기의 문학적 성취와 재능을 긍정했으며 그가 문장의 의미를 박대하고 뚜렷하게 드러냈으며 사용하는 어휘가 깊이 있고 우아함을 인정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문장은 당대에 비교 대상이 없었으며 강개하고 격앙된 언론은 고금에 으뜸이었다. 때문에 그의 문학적 성취는 매승이나 사마상여는 물론이고 왕찬이나 유정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태종은 육기가 가문과 나라가 멸망할 때 공명과 부귀를 위해 위험한 경지에 처한 것은 드러나고 숨는 시기(時機)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보았다. 그의 행동을 보면 그의 지혜는 자신이 한 말에 미치지 못했다. 나아가서는 혼란한 정국을 구할 수 없었고 물러나서는 자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 없으면서, 위란에 처한 나라를 위해 힘을 쓰고 용렬한 군주를 위해 진심을 다했으니 사람을 슬프게 한다.

태종은 또 육기의 종족이 멸절되어 후인이 남지 않은 것은 사실 인과응보라고 지적했다. 육씨 집안이 3대에 걸쳐 장수를 지내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후손에게 화가 미쳤다는 것이다. 특히 육항이 서릉(西陵)을 공격할 때 보천(步闡)의 일족을 몰살한 적이 있다. 당시 무고한 어린 아이들까지 죽였기 때문에 아들인 육기가 하교(河橋)에서 재앙을 당한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