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2절 경학(經學) 통일
태종의 대대적인 제창 하에 당나라 초기 사(士 독서인)와 관료(官僚) 교육은 전례 없는 성황에 도달했다. 하지만 교육기구에 비하면 교육내용이 부족해 태종의 의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에 태종은 경학을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참여하에 당나라 초기 경학연구는 대일통(大一統)시대의 규모와 기개를 체현해냈다.
“정관 4년 태종은 경서(經書)가 성인을 떠난 지 오래되어 문자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 전임 중서시랑(中書侍郎) 안사고(顏師古)에게 칙령을 내려 궁궐 내에서 서적을 담당하는 비서성(秘書省)으로 불러들여 오경(五經)을 조사해 바로잡도록 했다. 이 일이 완료될 때를 기다렸다가 또 상서좌복야 방현령에게 유학자들을 소집해 다시 상세히 심의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유학자들은 자기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설만을 전했으며 잘못된 것을 서로 전한 지 오래되어 모두들 안사고의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이설(異說)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안사고는 진송(晉宋 진나라와 남조 송나라)이래 옛 판본을 인용하고 원문에 따라 명백하게 답변했는데 근거를 인용해 상세하면서도 분명하게 답변했다. 이는 여러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으로 많은 유학자들이 탄복했다. 태종은 그를 표창해 비단 5백필을 하사하고 기존 벼슬에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를 더했다. 그리고 그가 교정한 책을 천하에 배포해 학자들이 배우도록 했다.
태종은 또 문학(文學)에 문파가 많고 장구(章句)를 해설한 저작 또한 번잡하다고 여겨 안사고에게 조서를 내려 국자좨주(國子祭酒) 공영달(孔穎達) 등의 유학자들과 오경의 소의(疏義)를 편찬하게 했다. 총 180권으로 《오경정의(五經正義)》라 이름 지었으며 국학(國學)에서 교재로 사용하게 했다.(《정관정요‧숭유학(崇儒學)제27》)
오경을 고정(考定)
당나라 초기 경학의 통일은 먼저 오경을 고증해서 정하고 나중에 《오경정의(五經正義)》를 만드는 두 단계로 나눠 실시되었다.
일단계로 태종은 전 중서시랑 안사고에게 《오경정본(五經定本)》 통일을 주관하게 했다.
여기서 오경이란 원래 유가에서 중시하던 6경 중에서 이미 실전된 《악경(樂經)》을 제외한 나머지 《시(詩) 시경》, 《서(書) 상서》, 《예(禮) 예기》, 《역(易) 주역》, 《춘추(春秋)》를 말한다.
이 6부의 고서들은 대부분 공자의 저술이 아니다. 공자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을 공자가 일부 삭감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중 《역(易)》은 연원이 아주 깊고 박대정심(博大精深)한 저작으로 그 근원이 하도(河圖)・낙서(洛書)로 올라가는데 즉 복희시대에 시작된 것이다. 상고시대에 《역(易)》에는 3가지 판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바로 《연산(連山)》, 《귀장(歸藏)》과 《주역(周易)》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조대(朝代)에 이루어졌고 주나라 때는 《주역》이라 불렀다. 이는 일정한 고층우주공간이 인류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는 도(道)를 드러낸 것이다.
《상서(尚書)》는 주나라 왕실의 외사(外史)에서 소장하던 기록으로 상고시대 선왕(先王)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명(天命)을 서술한 것이다.
《시경》은 화하 역사상 최초의 시가집으로 선성(先聖)과 신적(神跡)이 일부 기재되어 있다.
《주례(周禮)》는 주나라 왕실과 종백이 관리하던 전장제도다.
《춘추(春秋)》는 원래 선진(先秦)시기 사람들의 사서(史書)에 대한 통칭이었는데 후인들이 《춘추좌전(春秋左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등으로 정리해냈다.
“대체로 경적(經籍)이란 기신(機神)의 오묘한 뜻이자 성철(聖哲)의 능사이다. 때문에 천지를 날실로 삼고 음양을 씨실로 삼아 기강을 바로잡고 도덕을 널리 알릴 수 있다. 어짊(仁)을 드러내면 사물을 이롭게 하기에 족하고 쓰임(用)을 갈무리하면 홀로 선할 수 있다. 경적이란 것은 선성(先聖)이 용도(龍圖 용의 그림)에 근거하고 봉기(鳳紀 봉황의 기록)를 장악해 남면하여 천하에 군림하는 것으로 모두 사관(史官)이 있어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夫經籍也者,機神之妙旨,聖哲之能事,所以經天地,緯陰陽,正紀綱,弘道德,顯仁足以利物,藏用足以獨善。經籍也者,先聖據龍圖,握鳳紀,南面以君天下者,咸有史官,以紀言行)(《수서》 〈지(志)제27〉)
공자 이전의 육경은 요순우(堯舜禹) 등 성왕(聖王)과 선황(先皇)이 하늘이 부여하고 신이 수여한 천명과 군권 및 이에 관련된 상서로운 일들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춘추》에 이르러 공자 및 후인들의 이른바 ‘공유학설(孔儒學說 공자의 유학설)’에서는 고층의 신언(神言) 및 대도(大道)의 이치를 말하지 않고 저층의 ‘중용(中庸)학설’을 채용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그러므로 도를 잃어버린 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어버린 후에 인이 있고 인을 잃어버린 후 의가 있고 의를 잃어버린 후에 예가 있게 된다. 예라는 것은 충심과 믿음이 옅어진 것으로 혼란의 시작이다.(故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라고 했다.
또 “대도가 없어지자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도와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타났다.(大道廢,有仁義;智慧出,有大偽;六親不和,有孝慈;國家昏亂,有忠臣)”라고 했다.
공자 유학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이미 신(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후 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간 이후의 산물이다. 이는 또한 인류사회 성주괴멸(成住壞滅)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고대 성황(聖皇)시대에 남겨진 고전문헌은 중화문화의 경적과 정수로 결코 ‘공자의 유학’이 창립한 것이 아니다. 유학자들이 그것을 떠받들어 경전으로 삼았지만 그렇다고 단독으로 차지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삼을 순 없다. 마치 고대의 유생 역시 가부좌를 틀고 마음을 조용히 하며 호흡을 조절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런 수련의 기본동작을 ‘유교의 방법’이라 부를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중화전통을 이어받은 성황인 한 무제나 당 태종 등은 늘 오경을 새로 정리해 요순우 등 성황이 남겨준 중화의 도통(道通)을 회복하고 조대(朝代)를 거치며 내려온 각가(各家)와 각파의 교란과 파괴를 깨끗이 제거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부패한 유생(腐儒), 소도(小道), 지상불(地上佛) 등을 포함한다.
한 무제 때 조정에서는 정식으로 《시(詩)》, 《서(書)》, 《예(禮)》, 《역(易)》, 《춘추(春秋)》를 오경(五經)이라 불렀다. 동시에 부서(符瑞)나 천인감응(天人感應)・천인합일(天人合一)・신언(神言)신적(神跡) 등 실전된 중요한 역사사실들을 오경에 되돌려놓았다. 한 무제가 정한 오경은 우주 고층 신(神)・도(道)의 사실을 보충한 것으로 공자의 유학이 포함하는 범위를 대대적으로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역사상 빗나간 문화의 방향을 신이 전한 궤적으로 되돌린 한차례 중대한 사건이었다.
“수나라 말기 동란이 그치지 않자 학교 교육이 사라지고 유도(儒道)가 진흙땅에 떨어지고 시서(詩書)가 구덩이를 메웠다.”(《구당서‧소덕언전(蕭德言傳)》)
바로 이때 안사고가 《오경(五經)》의 판본을 통일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안사고는 어려서부터 가업(家業)을 이어 수많은 서적들을 두루 읽었고 훈고를 정밀하게 연구했으며 특히 경학에 대해 깊고 두터운 기초가 있었다. 안사고는 비서성에 보관된 황실도서관의 수많은 장서를 이용해 정성을 다해 교정했고 2년 반에 걸쳐 《주역》, 《모시(毛詩)》, 《상서》, 《예기》 및 《좌씨춘추(左氏春秋)》 등 《오경》을 개정해 정본으로 확정했다.
태종은 이 판본을 몹시 중시했고 특별히 재상 방현령에게 명령해 유학자들을 두루 소집해 ‘득실을 토론’하게 했다. 당시 여러 유가들은 학파가 달랐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설이 벌떼처럼 일어나 말들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안사고는 “진송(晉宋 진나라와 남조 송나라)이래 옛 판본을 인용하고 원문에 따라 명백하게 답변했는데 근거를 인용해 상세하면서도 분명하게 하여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많은 유학자들이 탄복하며 떠났다.”
당태종은 이에 대해 오랫동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관 7년 11월 당태종은 “이렇게 정해진 서적을 천하에 반포해 학자들이 학습하게 했다.”
이에 안사고가 교정한 《오경정본(五經定本)》이 전국에 배포되었고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각급 학교의 표준교과서가 되었다. 이것은 또 여러 학파가 난립되어 어느 것을 경사(經史 경전과 사서)의 정본으로 취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해주었고 사실상 위진(魏晉)이래 오경판본 및 문자에 대한 한 차례 대대적인 청리에 해당한다.
오경정의
경학통일의 2단계로 태종은 당시 저명한 경학자였던 공영달에게 《오경정의》를 주관하게 했다.
여기서 ‘정의(正義)’란 바로 본래 뜻에서 벗어난 것들을 변별해 진정한 함의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다. 오경의 의소(義疏 각종 주석)에 대한 정리는 “유학의 여러 문파들이 장구를 번잡하게 해석해” 경서 해독을 혼란하게 만드는 행동을 겨냥해 원시경전(原始經典)에 대한 이해를 통일하려 했다.
공영달은 오경에 정통했고 남조와 북조의 경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공영달 등 20여 명의 유명 인사들은 태종의 칙령을 받들어 오경정의를 편찬함으로써 오랫동안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경문 해석을 소통시켰다. 공영달은 비록 북조 출신이긴 하지만 오히려 오경정의 중에 남조의 학설을 많이 채택했다. 이는 황제의 뜻을 받들어 자신만의 견해를 벗어나 원본을 지켜낸 근엄한 작법이었다.
각각의 경서는 대부분 자고로 수많은 전거들이 있었다. 특히 양한(兩漢)과 위진남북조에서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의 주석을 정리해 산정하여 책으로 만드니 “그 화려함을 버리고 실질을 취하여 믿을 만한 증거가 있게 했다.”
“비서랑(秘書郞) 왕현도(王玄度)가 《상서》와 《모시》에 주를 달아 공안국(孔安國)과 정현(鄭玄)의 옛 뜻을 훼손하면서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구 학설을 폐지하고 자신의 주를 달도록 청했다. 이에 예부(禮部)에 조칙을 내려 여러 유학자들을 소집해 상세히 의론하게 했다. 현도의 구변이 좋아서 여러 박사들이 모두 반박하지 못했다.…인사(仁師)는 현도가 경학에 대해 깊이가 없고 또 그의 조문이 대의(大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하면서 이를 중단할 것을 청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마침내 인사의 뜻에 따랐다.”(《구당서》 〈열전(列傳)제24〉)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당시 경학의소는 장구를 엄밀하게 지켰고 멋대로 내용을 폐지하라는 주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서 경서의 정종(正宗)과 순정(純淨)함을 보증할 수 있었다.
2년이 넘는 노력을 거쳐 무려 180권에 달하는 《오경정의》가 정관 14년 2월에 편성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공자가 정리한 육경을 다시 편찬한 게 아니라 한나라 및 육조 이래 몰락해가던 경학의 퇴폐한 국면을 바로 잡은 것이다. 최종 원고는 정관 16년(642년) 완성되었다. 태종은 공영달의 이 작업에 찬사를 보내며 일찍이 조서를 내려 “경(卿) 등이 고금의 학설을 종합하고 의리를 취합해 전유(前儒)들의 이설(異說)을 고증해 성인의 그윽한 뜻에 부합하였으니 실로 불후의 업적이다.” (《구당서‧공영달전》)라고 했다.
그러나 태종은 ‘의찬(義贊 역주: 원래 공영달 등이 올린 책의 제목이 오경의찬이었다.)’이란 명칭이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특별히 조서를 내려 《오경정의》로 고치게 했다. 아울러 국자감에 내려 교재로 삼도록 했다. 《오경정의》는 태종에 의해 불후의 저작으로 불렸으며 고금의 학설을 종합하고 이설을 고증 정리해 의소의 으뜸이 되었다. 또 신언(神言)신적(神跡)을 드러냈고, 도(道)로 유(儒)를 해석했으며, 《노자》로 《주역》을 해석했다.
또한 참위서(讖緯書) 중에서 우주천체 층차에 대한 인식을 더하여 위서(緯書)로 경전을 주소하고 경(經)과 위(緯)가 서로 입증하도록 했다. 이 책은 문화의 근본을 바로잡고 문사(文史 문학과 사학)의 연원을 청리하려는 태종의 심모원려에 부합했다. 중화 경사(經史)의 정전(正傳)과 문화 내함의 정통을 보호하기 위해 멀리 내다본 태종의 식견은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황실에서 정한 《오경정의》 ‘교재’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 역사, 작문(作文), 사람됨(爲人), 도덕, 벼슬을 구하고 관리가 되는 전방면의 지식을 일체로 융합한 것이다. 대도(大道)는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라 태종의 풍모를 충분히 체현해냈다.
다만 《오경정의》는 부피가 너무 커서 정관 말년 박사 마가운(馬嘉運) 등이 수정 작업에 들어가 고종(高宗) 영휘 4년 작업을 끝내고 전국에 반포해 흠정(欽定)교과서로 삼았다. 이후 송대(宋代)에 이르기까지 명경과(明經科 과거의 일종으로 주로 경전에 대한 이해를 기준으로 선발한다)에서 선비를 뽑을 때 경전의 뜻은 모두 이 책을 표준으로 삼도록 했다.
정관 21년(647년) 태종은 또 조서를 내려 좌구명(左丘明 역주: 춘추좌전의 저자) 복자하(卜子夏 공자의 제자) 등 21인을 “지금부터 태학에 모시고 안자(顏子 역주: 공자의 제자 안연)와 함께 공자 사당에 배향하도록 하라.”고 했다. 이들은 단순히 뛰어난 학자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천문과 역리 및 십가구류(十家九流 다양한 학문유파)에 통달한 기인한 인사들로 대도(大道)수련에서 성취를 이룬 이들이었다. 태종은 단순히 경학의 문파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금문(今文), 고문(古文), 정학(鄭學 정현의 학문과 그를 따르는 학파), 왕학(王學 위나라 때 왕숙의 학파), 남학(南學 남조의 학파), 북학(北學 북조의 학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등하게 보았으며 천지를 융합하고 관통하는 홍대한 흉금으로 대했다.
한당(漢唐)의 상승(相承)
한 무제가 일찍이 질문했다.
“삼대(三代 하은주)가 천명을 받았고 하는데 그것을 입증하는 부절(符)는 어디에 있는가? 재이(災異 천재지변)의 변고는 무슨 이유로 일어나는가? 성명(性命)의 실상을 보면 어떤 이는 요절하고 어떤 이는 장수하며 어떤 이는 어질고 어떤 이는 비열하다. 그들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지만 아직 그 이치는 환히 모르겠노라. 덕의 바람이 사방에 흐르고 정령(政令)이 잘 시행되어 형벌을 줄이고 간사한 자들이 행실을 고쳐 백성이 화목하고 즐겁게 만들며 정사를 밝게 펼치려면 어떤 덕을 닦고 어떤 시책을 정비해야만 하늘에서 감로가 내려 온갖 곡식이 풍요롭고 은덕이 사해를 적셔 덕택이 초목에까지 미칠 수 있는가? 삼광(三光 해 달 별)이 온전하고 추위와 더위가 순조로우며 하늘의 복을 받아 귀신이 제물을 잘 흠향하며 덕과 은택이 흘러넘쳐 방외(方外 세상 밖)까지 뻗어나가 뭇 생령들에게 두루 미치게 할 수 있겠는가?”(《한서‧동중서전》)
태종 역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분명히 밝혔다.
“짐이 들으니 하늘이 크고 땅이 크니 처음으로 백성을 퍼뜨렸고 여와(女媧)와 수인(燧人)씨는 공손하게 원록(元菉)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생명을 베품이 덕(德)이 되며 숭고한 곳에 처해서도 (자신의 선행을) 말하지 않음을 알 수 있노라. 사람을 기르는 일은 공경하고 밝은 사람을 임명해 법규를 관장하게 해야 한다. 삼대(三代 하상주)가 잇달아 건립되고 오운(五運)이 서로 변함에 이르러 성대한 사업이 전분(典墳 고대 전적)에 남아 있고 지극한 도는 아송(雅頌 시경의 일부)으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10대(代)를 거치며 모두 구주(九州)에 살았으니 먼 옛날의 풍문을 들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도다. 우러러보면 칠정(七政 일월과 오성)이 나란하고 굽어보면 백신(百神)이 모이니 상서로운 부절[祥符]로 신령(神靈)을 관찰하고 명백히 알림으로 뛰어난 공에 보답했노라. 태산과 양보산에서 봉선(封禪)을 거행해 운정(雲亭)에 발길이 닿지 않음이 없었노라. 양의(兩儀)에 제사를 지내 선성(先聖)의 뛰어난 능력을 다하고 삼통(三統 하상주)을 널리 알려 옛 철인의 존귀한 이름을 드리웠다. 천구(天衢 하늘 거리)에 거울을 매단 것이 이와 관련되지 않음이 없도다.”(《봉선조(封禪詔)》 출처: 《전당문(全唐文)》8권)
이는 정권에 대한 근심이라기보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이 아닌가! 이는 한(漢)제국과 당(唐)제국의 새로운 문화이상을 하늘이 개시(開示)해줄 것을 질문한 것이다! 황천(皇天)이 맡긴 중책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당당한 표현이 아닌가!
중화 문화사상의 건립이란 이 거대한 공정에 직면하여 한 무제는 관학에 경학을 수립했다. 한나라 때 오경(五經)의 최대 특징은 관방에서 ‘참위(讖緯)’로 경(經)을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참위란 참서(讖書)와 위서(緯書)를 합해 부르는 것으로 양한(兩漢)시기에 특히 두드러졌다.
《설문해자》에서는 “참(讖)은 증험(驗)이다. 증험이 있는 책으로 하락에서 나온 책을 가리켜 참이라 한다.(讖,驗也。有征驗之書,河雒所出書曰讖)”고 했다.
《수서‧경적지(經籍志)》에서는 “한나라 때 또 동평왕 유창(劉蒼 광무제의 아들)에게 조서를 내려 오경의 장구(長句)를 바로잡게 했는데 모두 참(讖)을 따르도록 했다.…이 오경은 모두 참위설에 근거했다.”고 했다.
당나라 때 《오경정의》에는 전적으로 참위에 의존해 경을 해설한 부분이 있는데 참위를 경과 비슷할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또 의심스러운 곳이 있는 참위는 그 허망한 곳을 비평하고 ‘간략히’한 경우도 있다. 이는 단순히 신이(神異)의 출생을 설명하는데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천명(天命)을 받는 상서(祥瑞) 부분을 더욱 강조해서 드러냈다. 때문에 참위의 선택은 정심한 감별을 거쳤으며 경서의 주석과 해설이 가장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선택적으로 역대 주소(注疏)들을 이용했다.
당 태종이 판본을 정하고 간행한 《오경정본》과 《오경정의》는 그 규모가 한대(漢代)를 훨씬 뛰어넘는다. 당 태종은 황제의 신분으로 친히 경학의 통일을 촉성했다. 《오경정의》는 당대(唐代) 경학이 전에 없는 통일국면에 도달하게 했다. 한위(漢魏)이래 분분했던 여러 학설들을 단번에 일소시켜 버렸고 경학 역사상 아주 오래된 문파간의 논쟁, 가령 금고문논쟁, 정학과 왕학 논쟁, 남학과 북학 논쟁 등을 모두 결속시켰다.
한 무제와 당 태종은 일맥(一脈)으로 서로 이어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오경을 새로 편찬했고 이를 통해 중화민족의 사상・도덕・이념을 새로 만들고 중화문화의 본질과 내함을 확립시켰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