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현장의 서행
정관 19년(645년) 현장(玄奘)이 서쪽 천축에 가서 경전을 얻어 당나라로 돌아온 후 태종은 그를 홍복사(弘福寺)에 주석하게 했다. 필요한 모든 경비는 조정에서 지급케 하고 친히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서문을 지으니 이것이 바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教序)》다. 현장이 불경을 번역한 역경(譯經)의 위업은 천년동안 공명(功名)을 이뤘으며 당나라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불가의 수련이 끊이지 않도록 다지는 역할을 했다.
현장은 속성이 진(陳), 이름은 위(褘)로 낙주(洛州) 구씨(緱氏 지금의 하남성 언사) 사람이다. 세간에서는 흔히 ‘당삼장(唐三藏 여기서 삼장이란 원래 불교의 경장, 율장, 논장을 가리키는데 이 모든 불교전적에 정통한 사람을 존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므로 ‘삼장’이란 일반적인 존칭으로 현장만의 전유 명칭은 아니다.)’
현장은 수나라 문제 개황(開皇) 16년(596년)에 태어나 당나라 정관 3년(629년) 서역 여행을 시작했다. 이 여행에서 약 17년에 걸쳐 온갖 고생을 두루 겪었다. 현장이 장안에 돌아왔을 때는 조야(朝野)에서 위아래를 막론하고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정관 19년 2월 현장은 낙양에 와서 태종을 알현했다. 태종은 그가 몹시 맘에 들어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환속해서 조정에 들어와 달라고 권했지만 현장이 고사했다. 이에 태종은 그더러 서역여행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게 했다. 현장은 제가 변기(辯機)의 도움 하에 1년의 시간을 들여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완성하니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대당삼장성교서—대당 삼장의 성스런 가르침에 대한 서문》
“짐이 듣건대 천지(天地)에는 형상이 있어서 덮고 실어줌으로써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포용하고, 사계절은 아무 형체가 없으나 추위와 더위를 번갈아 만물을 화육(化育)시킨다. 그러므로 천지를 관찰하면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도 모두 그 이치의 단서를 알 수 있지만, 음양의 이치를 명확히 살피려면 현명하고 명철한 사람이라도 그 규칙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천지가 음양에 포함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형상이 있기 때문이며, 음양이 천지에 존재하지만 명확히 알기 어려운 것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상이 밝게 드러나 징험할 수 있다면 어리석은 자라도 미혹(迷惑)되지 않을 것이며, 형상이 없어 보지 못한다면 지혜로운 자라도 오히려 미혹됨을 알 수 있노라.
하물며 불도(佛道)는 허(虛)를 숭상하고 깊은 명상을 통해 적멸(寂滅)을 통제함에 있어서랴? 불도는 널리 만물을 제도하고 시방(十方)을 제어하나니, 위령(威靈)을 높임에는 위가 없고 신력(神力)으로 누름에는 아래가 없도다. 확대하면 우주에 가득 차고 축소하면 터럭 끝에도 거둘 수 있으며, 소멸되거나 생겨남도 없어 천 겁(千劫)을 지나도 쇠하지 않노라.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운용하며 지금까지 이르렀도다.
오묘한 도(妙道)는 현묘함에 응축되니 그것을 따르려 해도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법의 흐름(法流)은 고요함에 침잠하니 그 물을 퍼내려 해도 근원을 찾을 수 없도다. 그러므로 우둔하고 비천한 자들이 그 취지(趣旨)를 추구한들 의혹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큰 가르침(大敎)은 서역에서 일어나, 후한 명제(明帝)의 꿈에 나타나 동쪽 땅을 비추고 자비를 전했노라. 예전에 형체와 자취에 따라 나뉘던 때에는 말이 이르지 않아도 교화를 이루었으나 상도(常道)를 드러내는 시대가 되자 백성이 덕을 우러러 존귀함을 알게 되었노라. 그림자를 숨기고 참다움으로 돌아가(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많은 세월이 흐르니 금빛 얼굴은 색이 가려져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지 않게 되었고 아름다운 존상은 그림으로만 남아 헛되이 32상(相)을 헤아리게 되었노라.
이에 은미한 말씀(微言)이 널리 퍼져 삼도(三途 축생 아귀 지옥 삼악도)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남겨진 가르침은 멀리까지 전해져 뭇 생명을 십지(十地)로 인도했노라. 허나 참된 가르침(眞敎)은 우러르기 어려워 그 뜻을 하나로 할 수 없었고, 잘못된 가르침은 따르기가 쉬워 삿된 것(邪)과 바른 것(正)이 이에 분분해졌노라. 이리하여 공(空)과 유(有)의 이론이 때로는 습속에 따라 시비를 따지게 되었고, 대승과 소승도 잠깐 사이에 흥하거나 쇠퇴하였다.
현장법사는 법문(法門)의 영수(領袖)다. 어려서부터 바르고 총명해 일찍이 삼공(三空)의 마음을 깨달았고 장성해서는 신정(神情 정신과 감정)이 불가의 가르침에 부합해 이미 사인(四忍)의 수행을 쌓았도다. 소나무에 이는 바람이나 물에 비친 달조차도 그의 깨끗하고 아름다움에는 비할 수 없으며, 신선의 이슬과 빛나는 구슬일지라도 그의 맑고 깨끗함에는 비할 수 없노라.
그의 지혜는 얽매임이 없는 경지에 통하고 정신은 형체로 드러나지 않는 세계까지 알 수 있었고, 육진(六塵 속세)을 멀리 벗어났으니 천고(千古)에 비길 자가 없노라. 마음을 한마음으로 내경(內境)에 모으고 정법(正法)이 점차 쇠잔해짐을 슬퍼했으며, 생각을 불문(玄門)에 옮기니 불경이 와전됨을 통탄했노라. 조목을 나누고 이치를 분석해 이전에 들었던 내용을 확충하고, 잘못된 것은 삭제하고 올바른 것을 이어 후학(後學)을 깨우치고자 했노라.
그리하여 서방 정토(淨土)를 사모해 서역으로 유학을 떠났도다.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니 지팡이 짚고 홀로 길을 갔노라. 쌓인 눈 날리는 새벽에는 중간에 길을 잃었고, 거센 모래바람 부는 저녁에는 텅 빈 교외에서 방향을 잃기도 했노라. 만리 이역의 산천을 지나며 안개와 노을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했고, 모진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서리 밟고 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노라. 큰 정성으로 고생을 가벼이 여기고 깊은 진리를 추구해 소원을 이루려 했노라. 서역을 두루 다닌 지 17년 만에 여러 나라를 두루 편력하며 바른 가르침(正敎)을 구했도다.
사라쌍수(雙林 석가모니 열반장소)와 팔수(八水 인도의 여러 강)에서는 길에서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었고 녹야원과 영취산에서는 기이한 풍경을 두루 보았노라. 옛 성인의 지극한 말씀 이어받고 뛰어난 현자에게 참된 가르침(眞敎)을 전해 받아, 불가의 오묘한 아치(妙門)를 탐색하고 심오한 경전의 의미를 정밀하게 연구했노라.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를 마음으로 체득했고 팔장(八藏 부처님의 8가지 가르침)과 삼협(三篋)의 경문이 입에서 막힘없이 흘러나왔노라.
이에 직접 여러 나라를 다니며 삼장의 중요한 경문을 거두니 모두 657부였다. 이것을 번역하여 중국에 펼쳐 수승한 업적을 선양했노라. 서역 끝에서 자비로운 구름을 끌어와 동쪽 끝 중화에 불법(佛法)의 비를 내리게 했노라. 이에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빠진 부분이 다시 온전해졌고 창생(蒼生 중생)이 죄를 짓다가 다시 복을 받게 되었노라.
번뇌로 가득한 인생의 불길에 비를 내려 미혹의 길에서 함께 벗어나게 했으며, 애욕으로 가득한 혼탁한 물결을 잠재워 함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였도다. 이로써 악한 자는 업(業)으로 추락하고 선한 자는 인연(緣)으로 올라감을 알 수 있나니, 올라가고 떨어지는 단서는 오직 사람의 행동에 달려 있도다.
이는 마치 계수나무가 높은 봉우리에서 자라니 구름과 이슬이 그 꽃을 적시고, 연꽃이 푸른 물결에서 나오니 먼지가 그 잎을 더럽힐 수 없음과 같도다. 연꽃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곧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계수나무가 붙어 자란 곳이 높기 때문에 미물이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이고, 연꽃이 의지하는 곳이 깨끗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들이 붙을 수 없기 때문이로다.
무릇 앎이 없는 저 초목조차도 선(善)에 의지해 선을 이룰 수 있는데, 하물며 식견(識)을 지닌 사람으로서 선행(慶)에 의지해 선을 이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야흐로 이 경전이 널리 유포되어 일월(日月)과 같이 다함이 없고, 이 복이 멀리까지 전해져 천지(天地)와 더불어 영원하기를 바라노라.”
태종의 지지하에 정관 연간에는 불법(佛法)이 극도로 선양되었다.
당나라 서적에 기록된 ‘불(佛)’
당나라 때 편찬된 《수서(隋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불경(佛經)이란 서역천축 카필라 왕국 정반왕의 태자 석가모니의 말씀이다. 석가모니는 주나라 장왕(莊王) 9년 4월 초파일 모친의 우측 옆구리로 태어났는데 외모가 기이해서 32상(相)과 82호(好)가 있었다.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해 도(道)를 배웠으며 근면히 정진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깨달았다. 이에 그를 불(佛)이라 했는데 불타(佛陀) 또는 부도(浮屠)라고도 했으니 모두 서역의 말이다. 중국말로 번역하면 정각(淨覺)이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사람몸(人身)은 비록 생과 사의 차이가 있지만 정신(精神)은 항상 존재하며 불멸한다고 한다. 이 몸이 있기 전에 무량한 몸을 거쳤다. 누적되어 닦고 익히면 정신이 청정해져서 불도(佛道)를 성취한다. 천지 바깥 사유(四維) 상하에는 또 천지가 있는데 이 또한 끝이 없으니 이룸(成)이 있고 파괴(敗)가 있다. 일성일패(一成一敗 한번 이루고 한번 파괴함)를 가리켜 일겁(一劫)이라 한다. 그런데 이 천지 이전에 또 무량한 겁이 있다. 매 겁마다 반드시 제불(諸佛)이 도를 얻고 세상에 나와 교화하는데 그 수는 같지 않다. 이번 겁 중에 천불(千佛)이 존재하는데 맨 처음부터 석가모니에 이르기까지 이미 칠불(七佛)이다.
그 다음은 미륵(彌勒)이 세상에 나오는데 반드시 세 차례 모임을 거쳐 법장(法藏)을 연설하고 중생을 개도할 것이다. 불도를 얻은 사람에는 4가지 등급의 과위가 있다. 첫 번째는 수다원(須陀洹), 두 번째는 사다함(斯陀含), 세 번째는 아나함(阿那含), 네 번째가 아라한(阿羅漢)이다. 나한에 이르면 들고 나며 살고 죽으며 오고가며 숨고 나타남이 자유자재하다. 아라한 이상 보살(菩薩)에 이르면 불성을 깊이 보아 성도(成道)에 이른다.
매 차례 부처님이 멸도(滅度)한 후로도 남은 법이 전해지는데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차이가 난다. 햇수와 멀고 가까움은 각기 다르다. 말법 이후로는 중생이 우둔해져서 다시 부처의 가르침을 회복할 수 없고, 업행(業行)이 악해져 수명도 점차 줄어들고 수백 년에서 천년이 지나면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게 된다. 그 후 큰 물이나 큰 불, 큰 바람의 재앙이 닥쳐 모든 것을 제거한 후 다시 사람을 만들고 다시 순박함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을 소겁(小劫)이라 한다. 매 한 차례 소겁에 한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다.”
”처음에 천축에는 여러 외도(外道)들이 있었으며 또 수화(水火)와 독룡(毒龍)을 모시며 여러 가지 환술을 잘했다. 석가모니의 고행 중에도 이들 여러 사도(邪道)들이 찾아와 괴롭히며 그 마음을 어지럽히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불도(佛道)가 성취되자 모두들 굴복했고 아울러 제자가 되었다. 부처의 제자는 남자는 상문(桑門 사문)이라 하는데 중국말로 번역하면 식심(息心)이며 또는 승(僧)이라 하는데 중국말로 번역하면 걸식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49년간 세상에서 교화하자 천룡인귀(天龍人鬼)가 모두 찾아와 법을 들었고 도를 얻은 제자가 백천만억에 달했다. 그 후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에서 2월 15일 열반에 들었다. 열반이란 니원(泥洹)이라고도 하며 중국어로 번역하면 멸도(滅度) 또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한다. 처음에 석가모니가 법을 설하자 사람의 본성과 식견 근기와 업력이 각기 달라서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설이 생겨났다. 그러다 열반에 들자 제자 대가섭과 아난 등 5백 명이 함께 모여 찬술해 문자로 정리해 12부를 만들었다. 나중에 수백 년 후 나한과 보살이 이어서 논을 저술해 그 뜻을 밝혔다. 그러나 부처님은 내가 멸도한 후 정법 5백년, 상법 1천년, 말법 3천년이라 하셨으니 그 뜻이 이와 같았다.”(《수서》35권 《지(志)30》)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