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선장
【정견망】
여래는 당승에게 몇 권의 경서만을 골라서 주게 하는데 왜 전부 주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인간세상이 너무나 타락해 그만한 복(福)이 없고 더 많은 불경을 읽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 인간세상에 완정(完整)한 불법(佛法)이란 없다. 사람이 정말로 신불(神佛)의 비호를 받고자 한다면 그럼 스스로 덕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면서 부처님께 절하면서 보우해 달라고 한다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한 가지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는데 바로 의도적으로 완정한 불법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여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이로 인해 후인을 속박하지 말게 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각종 신(神)이 세상에 내려와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한 진정한 목적은 인류에게 수련문화를 다져주기 위한 것으로 최종의 큰일을 위한 준비였다. 말법시기인 오늘날에는 더는 예삿일이 아니다.
당승은 진경을 얻어 곧 귀로에 올랐다. 하지만 구구 팔십일 난(難)에서 한 개의 난이 모자랐고 이에 금강이 또 하나의 난을 만들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대해 큰 곤혹을 느낄 것이다. 모두 정과(正果)를 이뤘는데 왜 여전히 하나의 난을 더해야만 하는가? 이는 단지 숫자를 채우기 위한 것인가?
사실 표면적으로 보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 사람을 제도해 신(神)으로 성취되게 하자면 사실 상사(上師)가 아주 많은 방면의 일을 해야 하며 수많은 인연관계를 개변시켜야 한다. 수련인의 인생의 길을 개변시켜야 하고 수련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과위를 준비해 주어야 하며 심지어 우주 중의 보다 많은 구조에 영향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이런 모든 계획들은 아주 엄밀한 것으로 만약 수련과정 중에 변화가 발생한다면 그럼 이런 수많은 것들을 다시 개변시켜야 한다. 이미 끝난 일마저도 다 되돌려 새롭게 안배해야 하는데 시간마저도 되돌려야 하므로 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미리 설정된 과위의 요구에 부합해야만 하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원만이라 할 수 있다.
당승 일행은 마침내 진경을 얻었고 대당으로 돌아와 중생에게 전했다.
그 후 다시 여래가 계신 곳으로 돌아온다. 경을 얻는데 참가한 이들은 각자 마침내 원만했고 각자의 과위를 얻었다. 손오공이 부여받은 투전승불(鬥戰勝佛)이란 칭호는 정식 출간된 불경 중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 부처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유(西遊)의 수련과정 역시 마땅히 진실로 존재할 것이다. 단지 소설에서 묘사한 것처럼 산 넘고 물을 건너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것이다.
수련인이 공성원만(功成圓滿)해 도를 얻고 신선이 되거나 부처가 되거나 신이 되는 것은 우주 중에서 한 가지 큰 사건으로 비할 바 없이 수승한 일이다.
“사람 몸은 얻기 어렵고 중토에서 태어나기는 더 어렵고 정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이 세 가지가 두루 갖춰진다면 정말 말할 수 없이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종교에서는 윤회를 말하는데 매 한 세에 사람이나 동물 또는 식물이나 돌 등으로 전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직 사람만이 수련할 수 있으며 다른 것들은 설령 영기(靈氣)를 얻어 요정이 될지라도 반드시 천살(天殺)을 받아야 한다. 종교 중에서는 또 사람은 사람이 되는 게 목적이 아니며 반본귀진(返本歸真)해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생생세세 윤회 중에서 사람 몸을 얻었다면 그럼 절대적으로 이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중토(中土)란 중원대지를 가리키는데 또 신주대지(神州大地)라고도 불린다. 지상에 사는 사람의 국가와 민족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며 모두 천국의 신과 모종의 대응관계가 있다. 중토는 바로 아주 특수한 곳으로 신과 보다 특수한 관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사람으로 전생했고 아울러 중토에서 태어날 수 있다면 정말이지 기연을 얻은 것이다.
사람이 되어 중토에 출생하더라도 여전히 속세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만약 이 사람이 진일보로 도(道)에 입문해 법을 얻을 수 있다면 그럼 정말이지 만고의 기연이다. 인간세상에는 정법(正法)과 사법(邪法)이 함께 존재하며 아울러 사법이 정법보다 훨씬 더 많다. 만약 한 사람이 이중에서 정법을 식별하고 정법문 수련에 진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대단한 것이다.
애석한 것은 많은 이들이 장기간 ‘과학’에 주입당해 자신이 아주 총명하다고 여기고 눈앞의 파리대가리 만한 작은 이익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평생 업을 짓고도 아쉬워하지 않으며, 진정한 불법을 눈앞에 가져다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늘 마음이 아프다.
더 심한 자는 뜻밖에도 감히 정법 수련자를 박해하는데 이는 역사상 기독교도들을 박해한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 기독교도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당시에 저지른 죄악을 갚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과학을 미신하지만 많은 진정한 과학자들이 과학체계의 결함을 발견했다. 사람이 신을 믿지 않으면 곧 자신의 친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 정신이 나간 사람은 사람이 하늘과 싸워 이긴다고 함부로 말하는데 이건 마치 양이 자신을 키우는 목자(牧子)와 싸우려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는 ‘나무(南無)’라는 말로 귀의를 표시하고 기독교에서는 ‘아멘’이라고 한다. 여러분이 두 발음을 비교해보라.
비록 인류의 서로 다른 종족의 문화는 차이가 아주 크지만 신화를 말할 때는 오히려 일치하는 것이다.
(English Translation: http://www.pureinsight.org/node/5042)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8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