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6장 무위를 떨쳐 사방에 신전문화를 전하다
대당(大唐)은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운(風雲)이 격동하며 활기가 넘치던 시대였다.태종은 단지 중원 황조(皇朝)를 당시 세계 역사상 가장 강성한 국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국가와 민족들도 잊지 않았다.왜냐하면 이들 역시 상고(上古)성왕(聖王)의 후예들로 이전 조대(朝代)에 중원과 인연을 맺어 연기를 끝낸 후 중토를 벗어난 중생이거나 민족이기 때문이다.
후세에 비록 만(蠻남쪽 이민족),융(戎서쪽 이민족),이(夷동쪽 이민족),적(狄북쪽 이민족)등으로 불리긴 했지만 사실 이들 대부분은 신주(神州)인 중토의 후예들이다.역대 천고영웅인물들은 모두 이 중생들이 줄곧 중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은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을 돌보고 애호해왔으며 종래로 이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화의 전파는 대부분 종교의 전파나 무역 소통,문화 교류 및 전쟁을 통해 실현된다.전쟁 중에 서로 죽이고 때리는 와중에 사상과 교화(敎化)문학예술,기술 등은 새로운 지역과 국가로 전파된다.중원 신전문화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과거 중토의 후예들 역시 종종 중토(中土)를 넘보거나 심지어 직접 중원을 침범하거나 혹은 중원에 새로 들어오는 등 각종 방식으로 신전문화의 정수를 얻고 이를 통해 중원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으면서 이미 맺은 만고의 기연을 잃지 않게 했다.
정관 연간에 태종은 과거 한무제의 서역 개척을 계승해 문화・무역・종교・기술 등 여러 방면에서 동서방이 교류하게 했고 계속해서 서역을 개척해나갔다.아울러 나중에 세계 군왕(君王)칭기즈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개척하고 유럽 및 세계체계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동시에 남북으로 원정과 토벌에 나서 사방을 편안히 하고 중화 신전문화를 사방에 전파했다.
제1절 만 리에 떨친 기개
정관 시기는 당나라의 변경개척이 가장 맹렬했던 시기이자 또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시기였다.당은 차례대로 동돌궐,토번,토욕혼(土谷渾),고창(高昌),언기(焉耆),서돌궐,설연타(薛延陀),고구려,구자(龜玆)를 정벌했고 심지어 인도 용병에서도 승리했다.이런 승리들은 대당 삼백년의 기업(基業)을 다지게 했다.
대당의 웅장한 기풍은 문학에서도 변새시파(邊塞詩派)를 탄생시켰다.
이중 몇 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대숙륜(戴叔綸)《새상곡(塞上曲)》
당나라 군대의 깃발 음산(陰山)에 가득하니
오랑캐는 하나도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금생에 오래도록 나라 위해 보답하려니
어찌 다시 살아서 옥문관을 들어간다 말하는가!
漢家旌幟滿陰山한가정치만음산
不遣胡兒匹馬還불견호아필마환
願得此生長報國원득차생장보국
何須生入玉門關하수생입옥문관
왕창령(王昌齡)의 종군행(從軍行)제5수
대사막의 바람과 먼지로 날은 지는데
붉은 깃발은 반을 말아 군문을 나선다.
선봉은 밤에 조하강 북쪽에서 전투 치러
이미 토욕혼을 생포했노라 알리는구나.
大漠風塵日色昏대막풍진일색혼
紅旗半卷出轅門홍기반권출원문
前軍夜戰洮河北전군야전조하북
已報生擒吐穀渾이보생금토욕혼
왕창령의 종군행 제4수
청해호 건너 구름 속에 설산 희미한데
외딴 성에서 멀리 옥문관 바라보네.
사막의 숱한 전투에 갑옷은 헤졌어도
누란을 깨지 않고는 끝내 돌아가지 않으리라
青海長雲暗雪山청해장운암설산
孤城遙望玉門關고성요망옥문관
黃沙百戰穿金甲황사백전천금갑
不破樓蘭終不還불파누란종불환
왕한(王翰)의 양주사(涼州詞)
포도주 맛좋은 술에 야광주 술잔,
마시려던 참에 말 위의 비파 소리 아니 마시지 못하게 하네.
사막에 취해 누운 사람 그대는 웃지 마소
예부터 싸움터에 나가 살아 돌아온 사람 몇이나 되랴.
葡萄美酒夜光杯포도미주야광배
欲飲琵琶馬上催욕음비파마상최
醉臥沙場君莫笑취와사장군막소
古來征戰幾人回고래정전기인회
당나라 시인들의 이런 호방하고 웅장한 시어(詩語)는,뒤를 이은 여러 왕조에서 무공(武功)을 내려놓고 문치(文治)만을 숭상한 풍조 때문에,역사상 고대 중국인들의 상무(尙武)정신은 맥이 끊겨 버렸다.특히 정관 연간 대당제국은 용맹한 군대가 사방으로 출격해 만 리에 사나운 기개를 떨쳤다.
동돌궐 평정
수당이 교체될 무렵 아사나돌궐(阿史那突厥)이 알타이산맥 부근에서 신속히 성장해 단시간에 대부분의 돌궐 부락들을 통일하고 동쪽으로는 흥안령 산맥,서쪽으로는 카스피 해,북쪽으로는 북해,남쪽으로는 중국에 이르는 대돌궐 한국(汗國)을 수립했다.하지만 곧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대체로 알타이산맥을 경계로 삼아 서돌궐의 중심은 이리(伊犁)하류 유역에 있으면서 타림분지와 트랜스옥시아나 지역의 여러 소국들을 통제했다.그 나머지 땅이 동돌궐이었다.
당 고조 무덕9년(626년) 8월,태종이 즉위한 직후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이 현무문의 변과 황제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중국 국내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십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관중(關中)을 침범해왔다.돌궐의 선봉 부대가 무공(武功지금의 섬서성 무공현)과 고릉(高陵)등지를 격파하자 장안에는 계엄령이 내려졌다. 8월8일 힐리(頡利)는 군사를 이끌고 위수 북쪽에 진을 치고는 심복인 집실사력(執失思力)을 장안에 사신으로 보내 형세를 관찰하게 했다.
태종은 돌궐의 의도를 파악하고 즉시 그를 억류시켰다.그리고는 고사렴,방현령 등6기만을 이끌고 위수 남쪽으로 가서 힐리와 대화하면서 그가 신의를 저버렸다고 질책했다.그 사이에 당나라의 여러 부대가 도착해 깃발과 갑옷이 들판을 덮으며 왕성한 군대의 위용을 과시했다.힐리는 태종의 말에 이치가 있고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당군(唐軍)의 진용이 성대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대화를 요구했다.
태종이 제군(諸軍)을 뒤로 물리고 단독으로 나아가 힐리와 담판을 지으려하자 재상인 소우(蕭瑀)가 말머리를 잡고는 적을 너무 가볍게 보지 말라며 제지했다.
하지만 태종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나의 계획은 이미 심사숙고한 것으로 경이 알 바가 아니요.…돌궐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것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경은 지켜만 보시오.”(《자치통감》)
결국 담판을 통해 힐리가 화의를 청하자 태종이 이를 허락했다.이튿날 태종은 힐리와 편교(便橋장안성 편문과 연결되는 위수의 다리)위에서 백마를 잡아 의식을 거행하고 맹약을 맺었다.힐리는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사막 원래 주둔지로 돌아갔다.
나중에 소우가 물었다.
“돌궐과 화의하기 전에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싸우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아 신들이 의심을 품었었는데 오랑캐들이 스스로 물러갔으니 그 계책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태종이 대답했다.
“내가 보니 돌궐의 무리가 비록 많긴 하지만 정돈되지 않았고 군신(君臣)의 뜻이 뇌물을 요구하는데 있었소.…장손무기와 이정 등에게 명령을 내려 돌궐이 돌아가는 길목에 매복해 기다리게 하고 대군이 그 뒤를 밟아 갔다면 아마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오.허나 싸우지 않은 까닭은 내가 즉위한 날짜가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아직 편안하지 않고 백성들도 아직 부유하지 않으니 마땅히 안정시키고 위무해야 했기 때문이오.”(《자치통감》)
정관 원년(627년)동돌궐 내부에 분열이 발생했다.설연타,회흘(回紇위구르),발야고(拔也古),동라(同羅)등 여러 부락들이 수년간 전쟁을 일으키고 형벌을 남용하며 무거운 세금을 물려온 힐리가한에게 불만을 품고 떨어져나왔다.세력이 강했던 설연타는 별도로 가한을 세웠다.힐리의 숙부 돌리가한(突利可汗)역시 몰래 당나라와 연락을 취하며 힐리가한과 결별했다.
태종은 정관3년(629년) 8월 이정(李靖),이적(李績이세적),시소(柴紹),이도종(李道宗)을 각각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아 총10만에 달하는 동돌궐 토벌군을 출병시켰다.
정관4년(630년) 3월 이정이3천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힐리가한의 아장(牙帳가한의 장막)이 소재한 정양(定壤)을 기습해 무너뜨렸다.힐리가 음산산맥 북쪽인 철산(鐵山)까지 물러났지만 이정이 계속 추격에 나섰다.이정은 당나라와 강화협약에 들어간 적이 방심한 틈을 타서1만의 정병으로 한밤중에 음산을 기습해1만여 명을 참수하고10만이 넘는 인원을 포로로 잡았다.힐리가한은 탈출해서 서욕혼으로 도망갔지만 나중에 무리의 배반으로 결국 당군에 포로로 잡혔다.
당군(唐軍)이 정양을 습격해 돌궐을 섬멸하고 힐리가한을 생포한 것은 당나라 전체 역사상 변경전투에서 세운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였다.힐리가한은 곧 장안으로 압송되었다.당나라는 동돌궐 돌리가한이 다스리던 지역에 순주(順州),유주(裕州),화주(化州),장주(長州)등4주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힐리가한이 다스리던 곳에는 정양도독부와 운중(雲中)도독부를 설치했다.북방의 근심이 마침내 해소되었다.이 전투는 대당의 위풍을 크게 떨치게 했고 주변에 있던 적대적인 모든 부락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태종은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정을 칭찬하며 말했다.
“옛날 한무제 때의 장수 이릉(李陵)은 보병5천을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 적의 대군을 만나 용감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흉노에 투항했음에도 청사에 이름을 남겼소.지금 경은 불과3천의 기병으로 적진 깊이 들어가 정양을 공략하고 북쪽 오랑캐들에게 위명을 떨쳤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없던 일이오.”
이에 이정을 대국공(代國公)에 봉했다.
돌궐이 사라진 후 막북(漠北)은 설연타가 차지했고 동돌궐의 나머지 영역은 당나라가 차지했다.당은 순주(順州),유주(裕州),화주(化州),장주(長州),정양,운중에 모두 도독부를 설치했다.이때 당나라의 영토는 음산 북쪽으로6백리에 이를 정도로 광대해졌고 막남(漠南고비사막 남쪽)이 모두 당나라 세력범위에 들어왔다.
태종은 또 힐리가한을 죽이는 대신 장안으로 이주해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했다.돌리가한도 따라서 투항해오자 북평군왕(北平君王)에 봉했다.설연타의 진주가한(真珠可汗)이었던 이남(夷男)도 표문을 올려 귀순의사를 표시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