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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26): 천가한(天可汗) 존호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천가한 존호를 받다

정관4년(630년) 3월3일 대당제국은 또 한 번의 역사적 순간을 맞이했다.사방 여러 부족의 추장들과 수령들이 앞 다퉈 장안에 들어와 태극궁(太極宮)앞에 모인 후 공동으로 당태종 이세민에게 역사상 한 번도 유례가 없는 존호(尊號)를 바쳤으니 바로 천가한(天可汗)이었다.

태종은“나는 대당의 천자인데 또 아래로 가한의 일을 한단 말인가?”라고 했다.”(《자치통감》193권)이 순간 문무백관과 사방의 군장(君長)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이때부터 태종이 사이(四夷)군장들에게 조서를 내릴 때 일률적으로‘천가한’을 자칭했다. “이후 서북(西北)지역의 군장에게 새서(璽書)를 내리면서 모두 황제천가한(皇帝天可汗)이라 칭했다.”

천가한이란 명칭의 뜻은 바로‘가한 중의 가한’으로‘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가한’이다.이 역시 하늘의 뜻이다.중토신주(中土神州)의 황(皇)은 왕(王)위에 존재하며 황은 왕을 봉할 수 있고 천하에 군림할 수 있다.이때 모든 이들의 바람은 오직 대당의 태종에게 있었다.

토욕혼 정벌

토욕혼(土谷渾)은 원래 선비족 모용(慕容)부의 한 지파였다.원래는 하청산(河青山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에서 유목하다 나중에 농서(隴西지금의 감숙성 청해성 일대)로 이주했다.이곳에 옮겨와 나라를 세우니 영토가 동서로는4천리에 남북으로 2천리에 달했다.당나라 초기 토욕혼은 여러 차례 난주(蘭州),양주(涼州)등을 침범해 당나라와 서역간의 중요한 교통로인 하서회랑(河西回廊)을 차단했다.당나라가 서역과 문화,사상,기술,종교 등의 교류를 하려면 반드시 이 통로를 열어야 했다.

정관8년(634년)토욕혼의 왕인 모용복윤(慕容伏允)이 대군을 이끌고 양주 북서쪽을 침범해왔다.이정(李靖)이 자발적으로 출전할 것을 요청하자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그를‘서해도행군대총관(西海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당나라는 물론이고 서역 여러 나라들(돌궐과 계필 등)의 연합군을 총지휘해 토욕혼을 토벌하게 했다.

태종의《토욕혼 토벌 조서(討土谷渾詔)》

“짐이 제업(帝業)을 이은 후 널리 지극한 도(道)를 생각하며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의상을 늘어뜨린 지 이미9년이 지나 문덕(文德)을 닦아왔노라.천하를 편안히 만들자 변방 및 해외의 여러 군장(君長)들이 아무리 멀어도 찾아오지 않음이 없었고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그러나 토욕혼은 자그마한 번국임에도 농서의 험한 지형을 믿고 땅은 천리가 되지 않고 군사는1만도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역량은 생각하지 않고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멋대로 명령을 거부하고 상국(上國)에 맞섰노라.

짐은 사자를 보낼 때마다 타이르고 일깨워주었으며,또 사신을 맞이할 때마자 친히 경계하고 타이르며 선한 길을 보여주고 화친을 권했노라.이를 통해 나라에 근심이 사라지고 각자 생업에 편안히 종사할 수 있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허나 수 년 간의 훈도(訓導)에도 흉악하고 완미함을 고치지 않고 변경을 노략질하여 편안할 수 없게 했노라.지금 올린 편지가 오만하기 그지없고 우리 사신을 억류했으니 내외 문무백관은 물론이고 화이(華夷)의 만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분노해 모두들 토벌을 원하였노라.토벌의 기회에 올라타 용맹한 뜻을 펼치고 신속한 원정에 나서 그 소혈을 공격함이 마땅하도다.다만 죄는 토욕혼의 늙은 가한과 천주왕(天柱王)등 한두 명의 사악한 신하에게만 있을 뿐 나머지 부락은 모두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흉악을 다스리고 포악함을 잠재워 짐의 뜻에 부합하게 하라.”

첫 전투에서 이도종(李道宗)이 이끄는 군대에 패한 모용복윤은 연도의 들판에 불을 질렀다.초원을 모두 제거하면 말먹이가 모자란 당군이 추격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하지만 이정은 그의 예상과 달리 승세를 타고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병력을 남로군과 북로군 두 갈래로 나눠 추격에 나섰다.

이정이 직접 이대량(李大亮)등과 함께 북로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아가 기련산과 통하는 토욕혼의 퇴로를 차단했다.또 적의 수도인 복사성(伏俟城지금의 청해호 서쪽)까지 우회해 복윤의 부락을 대파했다.

정관9년(635년)이정이 적석산(積石山지금의 청해 아니마칭산)에서 차말(且末)까지 추격했다.도중에 물이 부족해 말을 찔러 그 피를 마셔야했지만 마침내 복윤의 아장(牙帳)을 습격해 대파했다.수천 명을 참수하고 가축20여만 마리를 노획했다.처자가 포로가 잡힌 복윤이 낭패해 사막으로 도망갔으나 많은 이들이 배반했고 결국 측근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모용복윤의 아들 모용순(慕容順)이 천주왕을 참하고 부족을 이끌고 와서 당나라에 항복했다.마침내 토욕혼 전체가 당나라에 귀의한 것이다.태종은 모용순을 토욕혼의 새로운 가한으로 책봉했다.정관10년(636년)모용순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모용낙갈발(諾曷缽諾曷缽)을 가한에 책봉했다.정관11년 태종은 토욕혼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이정을 위국공(衛國公)으로 고쳐서 봉했다.

정관14년(640년)당은 교하성(交河城지금의 신강 투르판 근처)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해 서돌궐과 서역 전체를 관리하게 했다.정관18년(644년)서돌궐의 동맹국인 언기(焉耆)가 서주(西州고창)를 공격하자 안서도호 곽효각(郭孝恪)이 서주도행군총관이 되어 서돌궐에 붙은 언기를 토벌하고 언기땅을 점령하고 국왕인 용돌기지(龍突騎支)를 포로로 잡았다.

나중에 언기는 또 당나라를 배신하고 서돌궐에 붙었다.정관22년(648년)태종이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와 곽효각를 파견해 서돌궐에 붙은 언기와 구자(龜茲지금의 신강 아커쑤阿克蘇)를 토벌해 두 나라를 정복했다.그 후 소륵(疏勒)과 우전(于闐)이 당나라로 귀부해왔다.이에 당나라는 안서도호부를 구자로 옮겨 서역을 다스리고 구자,언기,우전,소륵 등4나라를 통치하게 했다.사서에서는 이를 가리켜 안서4진(安西四鎮)이라 부른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