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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27): 토번과의 화친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토번과의 화친

송찬간포(松贊幹布)는 야루짱부강(雅魯藏布江)남안의 택당(澤當)에서 출생했다.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잘 받았고 엄격한 훈련을 거쳐 말 타기와 활쏘기,씨름,격검(擊劍)등에 능통했으며 무예가 아주 출중했다.또 노래를 잘 부르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왕자(王子)였다.

13살 때 찬보(贊普토번의 왕)가 되어 부족을 이끈 후 반란을 평정하고 멀리까지 원정에 나서 영토를 넓히고 통일된 토번왕조(吐蕃王朝)를 정식으로 건립했다.그 영토는 지금의 청장(淸藏)고원지역이다.티베트족 백성들은 본래 고대 강족(羌族)의 후예로 화하민족의 선민(先民)이었고 중원의 화하자손들과 다방면에서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대당성세(大唐盛世)에 온 천하가 신복(臣服)하는 가운데 송찬간포도 중원문화를 몹시 숭앙하고 흠모했다.이에 정관8년(634년)장안에 사신을 보해 당나라에 귀의했고 정관10년에는 표를 올려 혼인을 청했다.처음에 태종은 동의하지 않았다.

정관12년(638년)송찬간포는 사신을 통해 토욕혼이 당나라와의 교류를 방해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구실로20만 대군을 지휘해 토욕혼을 공략한 후 여세를 몰아 당나라 송주(松州지금의 사천성 아바장족 자치구)를 공격하며 무력으로 혼인을 압박했다.

송찬간포는 또 장안에 사신을 파견해 공주를 시집보내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태종은 후군집을 당미도(當彌道)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5만의 부대를 지휘해 집실사력(執失思力),우진달(牛進達),유간(劉簡)등과 함께 송주를 구원하게 했다.이때 토번군이 마침 송주성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우진달이 지휘하는 당나라 선봉부대에 크게 패했다.

송찬간포는 일단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지만 대당의 강력한 위엄을 직접 겪어본 후 혼인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정관14년(640년)그는 다시 녹동찬(祿東贊)을 장안에 사신으로 보내며 황금5천 냥 및 수많은 보물을 예물로 바치며 혼인을 요청했다.

태종은 그의 인품이 마음에 들고 또 강력한 토번을 공주에게도 어울린다고 생각해 이듬해 마침내 혼인을 허락하고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또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이도종(李道宗)에게 특별히 공주를 호송하게 했다.

정관15년(641년)문성공주가 토번에 들어갔다.일행이 납살(拉薩라싸)에 도착하자 토번 사람들이 명절 때 입는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나와 만 리 먼 곳에서 찾아온 찬당(贊唐왕후)을 영접했다.또 천막 생활이 불편할 공주를 위해 따로 성곽과 화려한 궁궐을 건축해주었다.당시 만든 궁궐에는999칸으로 수행실(修行室)을 더하면 모두1천 칸이었다.이것이 바로 포탈라궁의 전신이다.지금도 포탈라궁 안에는 두 사람의 상(像)과 결혼했던 방이 보존되어 있다.

문성공주는 풍채와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남달리 지혜로운 여인이었다.또 그녀의 배후에는 또 고도로 발달한 당나라의 전체 문명이 있었다.이 모든 것은 통치에 전력을 기울이던 송찬간포를 깊이 매료시켰고 또 탄복하게 했다.그는 문성공주에게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마련해주고 지극히 공경했으며 중화의 신전문화・사상・예술 및 생산기술 등의 전파를 주관하게 했다.

문성공주의 이 모든 공헌은 또 송찬간포의 위대한 업적 속에 융합해 들어갔고 그 혜택은 토번왕조 각 방면에 두루 미쳤다.문성공주는 또 대소사(大昭寺)와 소소사(小昭寺)건축을 주관했다.이 두 절은 티베트 역사상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티베트 지역에서 불교를 확립하고 성대하게 빛내기 위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송찬간포는 일찍이4년간 은거하면서 전심으로 불전(佛典)을 학습했다.다시 세속에 나온 후로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을 권장했고 석가모니가 남겨놓은10가지 선행(계율)에 따라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 민중을 교화했다.송찬간포는 문성공주의 도움 하에 토번의 전장(典章)제도를 혁신했다.또 대신들과 귀족 자제들에게 성심으로 한족의 문화를 학습하도록 명령했고 그들을 이끌어 시(詩)와 서(書)를 깊이 연구했다.또 귀족 자제들을 장안에 보내 태학에 입학시켜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배우게 했으며 중원의 문사들을 초빙해 토번의 표소(表疏)를 관장하게 했다.

당나라 역시 끊임없이 각종 장인들을 토번에 파견해 다양한 기술을 전수해주었으며 이는 토번측에 당시는 물론이고 후세까지 많은 이익을 얻게 했다.

고창 정복

고창국(高昌國)은 천산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실크로드의 지리적 요충지로 나라는 안정되고 물산이 풍부했으며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중국과 서역의 사절이나 상인 및 승려들이 자주 통과하던 곳으로 한당(漢唐)시기 중국과 서역 경제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태종은 동돌궐을 멸망시킨 후 서역(지금의 신강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서돌궐 및 서돌궐과 연맹한 일부 국가들에 대해 무력을 행사해 양한(兩漢)이래 서역에 대한 관리를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창왕 국문태(麹文泰)는 서돌궐의 욕곡설(欲穀設)과 연합해 서역과의 교역로를 가로 막고 또 당나라 이주(伊州)를 공격했다.고창은 나라는 비록 작았지만 지리적 중요성이 커서 이곳이 막히면 당나라와 서역은 서로 통행할 방법이 없었다.

정관13년(639년)태종은 조서를 내려 국문태를 비난하고 아울러 아사나구(阿史那矩)를 파견해 국문태더러 장안에 입조(入朝)하도록 했다.하지만 국문태는 입조를 거절하고 국옹(麹雍)을 사신으로 파견해 사죄를 청했다.태종은 동돌궐이 멸망한 후 그 치하에 있던 한인들 중 상당수가 고창에 있다는 말을 듣고 국문태에게 그들을 당나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그러나 국문태는 이를 거절하고 설연타의 진주가한을 설득해 함께 당나라를 배반하게 했다.

태종《고창 토벌 조서(討高昌詔)》(일부)

“형벌제도를 엄하고 분명히 함은 악(惡)을 징계하는 성인의 도(道)고,군대를 보내 토벌하는 명령은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한 왕자의 덕(德)이로다.그러므로 순(舜)임금 때 삼묘(三苗)가 지형이 험한 것을 믿고 불복하자 순임금이 군사를 일으켰고,상나라 때 귀방(鬼方)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복하자 무정(武丁상나라 왕)이 토벌에 나섰던 것이다.…그러나 고창의 국문태는 오히려 이런 전철을 따르지 않고 상국(上國)에 불경하며 백성들을 잔혹하게 해치고 있다.당나라는 고창에 사신을 보내고 조정에서 알현할 때도 예를 갖춰 대우했으나 만족함을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니 금수(禽獸)의 마음으로 마침내 흉악하고 간교함을 품었도다.지엄한 조명(詔命)을 받드는데 성의가 이미 없으니 임금을 중시하고 공경하는 예법 역시 이지러졌노라.

짐은 하늘의 명을 받은 황제로서 백성의 부모가 되니 포악한 도를 금지함에는 안과 밖의 차이가 없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밤낮으로 간절히 걱정했노라.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파견해 조정의 뜻을 일일이 설명하고 선량한 규범을 권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여 가급적 무력을 사용하는 번거로움을 피하려했노라.그러나 그대는 본성이 혼미하고 나쁜 습관으로 가득 찼으니 하늘이 망하게 할 때가 이미 도달한 것이다.

훌륭한 장수가 위엄을 떨치고 예리한 병사가 비할 바 없이 용맹한 우리의 대군이 신속하게 진격해 공성장비를 동원해 적을 제압하기란 마치 썩은 고목을 부러뜨리고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로다.허나 짐은 가련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생을 피하려 하며 어쩔 수 없이 포악함을 제거하더라도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노라.만약 국문태가 자신을 묶고 군문(軍門)에 찾아와 머리를 숙여 죄를 청한다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그대가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나머지 신민(臣民)들이 악을 버리고 진심으로 귀부한다면 기왕의 허물은 따지지 않겠노라.만약 그를 도와 함께 악을 저지르며 감히 왕의 군대에 저항하려 한다면 대군의 기세를 다하게 하여 하늘의 벌을 내릴 것이다.더 분명히 깨닫게 함이 짐의 뜻이다.”

정관13년(639년)겨울 태종은 후군집을 교하도(交河道)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고창왕 국문태를 공격하게 했다.정관14년(640년)당군(唐軍)이 예상을 깨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고창 인근의 적구(磧口)에 이르자 너무 놀란 국문태는 병이 들어 며칠 후 죽고 말았다.이 때문에 고창왕 국문태는 당군의 위세에 놀라 사망한 첫 번째 왕으로 역사책에 이름이 남게 되었다.

아들인 국지성(麹智盛)이 왕위를 이었으나 후군집이 성을 포위하자 결국 당군에 투항하고 말았다.고창국의3주5현22성8천호3만여 명의 백성이 당에 귀속하니 고창국은 이후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당나라는 이곳에 서주(西州)를 설치했다.당시 고창과 동맹을 맺었던 서돌궐도 대당의 무위에 눌려 감히 고창을 지원하지 못했고 오히려 멀리 도망갔다.대당은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인심을 굴복시켰고 이때부터 서역과 왕래하는 길이 새로이 열리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