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대의를 위해 역적을 주살(大義誅逆)
1912년 1월 14일 새벽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광자(廣慈)의원에서 몇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34세의 한 남자가 몸에 여러 발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의 이름은 도성장(陶成章)이었다. 사망 전 반청혁명당(反清革命黨) 광복회(光復會) 부회장을 지내고 한때 명성이 혁혁했던 ‘혁명의 거인’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도성장을 죽였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시간을 되돌려 청나라 광서(光緖) 20년(1894년) 이홍장(李鴻章)이 이끌던 북양(北洋)수군이 갑오전쟁(甲午戰爭 중일전쟁)에서 큰 타격을 받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청나라는 일본의 도전 앞에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11월 말 손중산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최초의 반청(反淸)단체인 흥중회(興中會)를 창립했다.
1903년 황흥(黃興), 송교인(宋教仁) 등이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화흥회(華興會)를 창립했고 이듬해에는 도성장, 채원배(蔡元培) 등이 상해에서 광복회(光復會)를 만들었다. 광복회 회장은 채원배였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도성장이었다.
1905년 손중산은 일본에서 흥중회, 화흥회 및 광복회 등의 반청조직을 연합해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창립하고 손중산이 총리, 황흥이 총무를 맡았다. 이때부터 손중산과 황흥은 공인된 반청 지도자가 되었다. 연합 후 반청단체에 대한 압력은 점점 커졌지만 손중산의 호소에 대한 해외 화교들의 반응도 점점 강렬해졌다. 화교들은 반청단체가 무장조직을 만들어 중화(中華)를 진흥시킬 수 있도록 아낌없이 돈을 기부하고 또 힘을 보탰다. 이와 동시에 반청조직 내부 각 파벌들 사이에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7년 광복회의 도성장은 해외자금조달 계획이 좌절되자 손중산을 찾아와 경비를 조달하려 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때부터 손중산 타도운동을 시작해 《손문의 죄상(孫文罪狀)》을 발표하고 12항목에 걸친 ‘죄상’을 열거하며 “손문 총리의 이름을 제명하고 국내외에 널리 알릴 것”을 요구했다. 도성장과 장태염(章太炎 장병린) 등은 결국 동맹회를 탈퇴해 다시 광복회 명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반청단체를 분열시켰다.
손중산이 1909년 오치휘(吳稚暉)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성장이 공(功)을 질투하고 명예와 이익을 다투며 사람들을 선동해 형제들을 죽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도성장의 활동이 이미 손중산의 인신(人身) 안전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도성장 등이 또 다시 손문타도운동을 발동해 남양보(南洋報)에 《장병린이 선포한 손문 죄상을 보기 바란다(請看章炳麟宣布孫文罪狀書)》는 문장을 실었다. 도성장은 또 ‘광복회가 동맹회의 근원’라고 선전하면서 광복회를 정통으로 삼고 흥중회와 화흥회의 역사적 지위를 폄하하며 동맹회의 지도권을 다퉜다.
[자세한 내용은 팽검(彭劍)의 《제2차 손문타도 풍조에 대한 새로운 연구(第二次倒孫風潮新探) 2006년》를 참조할 것]
황흥은 손중산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성장을 통렬히 비판했다.
“심보가 험악하고 아주 가증스럽다”거나 “폭군 걸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격이라 비판할 가치도 없다.” “저 사람은 신경증 환자로 미친 사람의 헛소리는 믿을 수 없고 또 식자들 또한 저들을 비난할 뿐이다.”
신해혁명의 원로 마군무(馬君武)는 도성장의 행동에 대해 의분을 토로하며 “저 사람은 분명 뇌에 이상이 있으니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진기미(陳其美)는 일찍이 장개석에게 도성장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영사(英士 진기미의 자)가 내게 말하길 ‘도씨는 사소한 경비문제로 대국을 고려하지 않고 당내에 풍파를 일으키니 실로 개탄스럽다.’면서 나더러 상관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를 건드려 분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중정자술사략(中正自述事略)》)
당시 도성장의 행동이 비뚤어져 여러 사람들에게 멸시 당했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10월 무창기의(武昌起義)가 발생한 후 진기미는 동맹회를 주도하면서 광복회 이섭화(李燮和)와 연락해 11월 3일 상해에서 기의하기로 했고 이튿날 승리를 거뒀다. 진기미는 호군도독(滬軍都督 상해지역을 관할하는 군 책임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광복회는 이에 불복했는데 심지어 어떤 이는 진기미에 대해 ‘명령을 어기고 일을 벌여 명의를 훔친 죄’로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섭화에 의해 이 주장은 부결되었다.
광복회는 상해 교외의 오송(吳淞)에 군정부(軍政府) 지부를 세우고 이섭화가 도독을 자임하며 진기미와 대등하게 나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더 심한 것은 도성장이 오송에 ‘상해절강 주재 광복군 사무실’을 설치해 공공연하게 병력을 모으고 말을 구매하면서 따로 독립한 것이다. 금기를 어긴 이런 행동은 심지어 같은 편인 장태염 조차 너무 지나치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는 도성장에게 “강남의 군사 활동은 이미 끝났으니 병력을 모집하는 것은 아무 명분도 없다. 장부라면 마땅히 원대한 뜻을 품어야지 하찮은 일로 남들과 권력을 다퉈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도성장은 충고를 듣지 않았고 고집스레 진기미를 공격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도발했다.
장개석은 이 소식을 듣고 다급히 보정(保定)군사학교 동창이자 절강군 참모로 있던 여공망(呂公望)을 찾아가 그에게 도성장을 저지해주길 희망했다. 여공망의 회고록에는 “음력 9월 19일(양력 11월 9일) 아침 장개석이 달려와서는 ‘도성장과 이섭화 등이 장백기(張伯岐)선봉대를 조직해 상해로 와서 진영사(陳英士 진기미)를 공격한다니 화해하도록 권해주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방이 혼란해질 터이니 전방에서 어찌 남경을 공격하겠는가!’라고 했다.”
여공망은 깜짝 놀라 황급히 상해로 달려가 도성장에게 물었다.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과 양수청의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서로 살육했기 때문이오.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고 아직 남경을 공략하지도 못했는데 당신들이 서로 살육하려 한다면 우리가 무슨 혁명을 하겠는가? 당신들이 부디 더 멀리 내다보기를 바라오. 지금 당신들이 진실로 내 말에 대답한다면 내가 행동을 중단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남경도 공격하지 않겠소.”
그러자 도성장은 단지 “좋소, 진영사를 공격하지 않겠소. 오송에 와서 작은 지역을 차지하고 대오을 조직하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여공망과 장백기는 모두 광복회 회원들이다. 이제 막 끝난 항주(杭州) 광복전쟁에서 장백기는 바로 장개석 수하의 결사대장이었다.
1911년 12월 2일 남경이 광복된 후 동맹회는 공개적으로 황흥을 대원수로 추천해 손중산이 귀국하기기 전에 혁명정부를 주관하도록 했다. 당시 광복회는 비슷한 인선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여원홍(黎元洪)을 대원수로 천거했다. 도성장은 황흥을 ‘한양(漢陽)전투의 패장’이라 폄하하고 여원홍은 ‘기의의 원훈(元勳)’이라며 떠받들었다. 동맹회와 광복회의 분열은 이에 이르러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히 갈라져버렸다.
1912년 1월 손중산이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지 며칠 안 되어 도성장이 편지를 보내 거듭 ‘남양 자금조달문제’라는 옛날 일을 언급하면서 ‘속임수’로 대총통에 당선되었다며 중산을 비난했다. 손중산은 답신에서 도성장에게 ‘손문의 죄상’을 발표한 이유를 비판하면서 “나는 대총통의 자격으로 당신과 교섭하는 게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교섭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완전한 군자의 풍격을 보여준 것으로 도씨와는 식견이 전혀 달랐다.
도성장은 심지어 직접 나서 장개석을 선동하기도 했다. 장개석의 회억에 따르면 “도성장이 직접 나를 찾아와 동맹회에 반대하고 장병린을 영수로 천거함과 아울러 영사(英士 진기미)를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으며 또 이성을 잃은 그의 파괴행동에 더 이상 구원할 약이 없음을 원망했다. 만약 제거하지 않으면 혁명정신을 보호할 수 없고 당시의 대국을 완전하게 할 수 없었다. 도씨가 이미 자객을 파견해 영사를 살해하려 했으며 만약 그 계획이 실행된다면 상해군은 주인이 없어지고 장강하류는 반드시 혼란이 그치지 않게 될 것이다.”(《중정자술사략》)라고 했다.
지금 사람이 만약 그와 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사실 당시의 험악함과 혁명당 내부의 투쟁이 이미 너 죽고 나 살기 식으로 격화되었음을 보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폭력성향에 광기 증상마저 보인 도성장은 위기가 도처에 잠복된 민국 초기에 언제든지 폭발해서 정치적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1911년 12월 진기미는 여공망을 통해 도성장에게 “더는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라, 만약 계속해서 쓸데없는 일을 벌인다면 도준보(陶駿保)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게 했다. 여기서 도준보는 지방 군관으로 군의 탄약 공급을 파괴하고 군사적 실패를 초래해 12월 13일 진기미에 의해 총살당했다. 도성장은 지은 죄가 무서워 상해 프랑스 조계로 숨어들어갔다.
1912년 정월 14일 장개석은 광복회 회원 왕죽경(王竹卿)과 협력해 상해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광자의원에서 도성장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에 대해 장개석은 나중에 “나는 이 사건으로 영사(英士 진기미)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책임지기 위해 직책을 내려놓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를 통해 우리 당과 진영사에 대한 반대당의 공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중정자술사략》)라고 말했다.
즉, 도성장을 살해한 것은 자신이 직접 계획하고 집행한 것으로 다른 사람과는 무관함을 명확히 했다. 진기미와 손중산은 사전에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장개석은 진기미가 도준보를 총살한 일이 이미 광복회의 강렬한 불만을 야기했고 도성장을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면 양당의 분쟁이 더욱 격렬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라의 해악을 제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정하고 사직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후인들은 진기미가 장개석을 자객으로 파견했다고 추측하거나 심지어 손중상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설들은 모두 뜬소문에 불과하며 실제적인 근거는 없다.
장개석은 1943년 7월 26일 일기에서 “총리께서 오치휘(吳稚暉)선생께 보낸 편지를 보고 더욱 분노가 치밀었고 도성장의 죄는 도저히 주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주 씨를 주살한 것은 혁명을 위하고 우리 당의 대의를 위한 것으로 나 혼자 그 책임을 지고자 했으며 공을 구하거나 알아주기를 바라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총리께서 마지막에 나를 믿고 나를 중용하신 것 역시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총리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당시 청나라가 아직 멸망하기 전으로 중국은 남과 북으로 군사적인 대치 상태에 있었고 광복 후의 상해와 절강도 전쟁상태에 있었다. 도성장 등이 손중산, 황흥, 진기미에 대해 도전한 것은 동맹회 영수들로 하여금 죽고살기 식의 투쟁에 직면하게 했다. 이때 장개석이 과감히 손을 쓴 것은 혁명당의 분쟁을 미연에 제거한 셈이다. 도성장의 죽음은 혁명당과 동맹회 심지어 광복회에 대해서도 모두 좋은 일이었고 더 이상의 유혈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도성장이 처결된 후 광복회는 곧 해체되었다. 동맹회와 나중의 국민당은 손중산의 지도하에 점차 국민혁명의 주력이 되었고 역사라는 큰 연극에서 새로운 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