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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4): 국부(國父)를 따르다

글/찬란한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3.국부(國父)를 따르다

1912년 잠시 일본으로 피해 있던 장개석은《군성(軍聲)》이란 월간지를 창간해6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중국과 세계의 군사,정치,경제,영토,외교 등의 문제에 관한 독창적인 견해들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20세기 이후 태평양 연안은 여러 나라가 각축하는 다툼의 장이 될 것이며” “만국이 경쟁하는 초점은 오직 우리 중화(中華)토지일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그는 만청(滿淸만주족 청나라)은 무능하기 때문에“천혜의 요새를 남에게 빼앗기고 땅을 떼어주고 돈을 바쳐 화의를 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장수가 무능하니 영웅은 의기소침해진다.헌원 황제 이래4천년이 넘는 문명의 후예들이 모두 파란 눈과 노란 머리의 노예로 전락하니 비통하지 않은가!”라며 지적했다.그는 민족을 통일하려면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군성(軍聲)발간사》,1912)

그는 중국 각 성(省)의 도독(都督)이 군정(軍政)대권을 좌우지하는 위험을 분석하며 중앙집권으로 군대를 통솔할 것을 주장했다. “만약 정식 대총통이 혁명정신과 민주사상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조지 워싱턴과 같은 포부와 나폴레옹의 수단을 사용해 민주공화의 모델을 설립할 것이다.”“성의 경계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을 하지 않으면 공화국을 튼튼히 할 수 없고 관할구역을 개설해 군정(軍政)을 통일하지 않으면 공화로 인도하기에 더욱 부족하다.그러므로 중앙집권의 요점은 군정 통일문제 관해 더욱 절실할 따름이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정이 문란해져서 수습할 방법이 없어지며 재정(財政),인구(人口),물자의 폐단이 어디까지 이를 지 알 수 없다.”(《군정통일문제(軍政統一問題)》,1912)

당시 장개석의 시야는 국내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발칸전쟁이 중국과 여러 나라의 외교에 끼치는 영향(巴爾幹戰局影響於中國與列國之外交)》이란 문장에서 그는 유라시아의 교차점에 위치한 발칸반도의 복잡한 정세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면서 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과 연계해 중국인들에게 경고했다.

또《몽골과 티베트 문제의 근본해결(蒙藏問題之根本解決)》에서는 러시아,영국,일본 삼국이 몽골,티베트,만주를 분할하려는 기도에 대해 상세한 대책을 제안하고 힘껏 영토를 지키려 했다.이 논문들은 스물네댓 살 청년군인이 제출했다고 보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장개석의 해박한 지식,웅대한 기개와 광활한 시야를 드러냈다.

1912년 겨울 장개석은 일본에서 귀국했다.이때 임시대총통은 이미 원세개에게 넘어갔고 수도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겨졌다. 1913년3월 국민당(國民黨)을 이끌던 대리(代理)이사장 송교인(宋教仁)이 원세개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자 손중산은 원세개에 반대해 무장한2차 혁명을 발동했다.장개석은 이에 호응해 상해로 진격해 강남제조국(江南制造局)을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1월 원세개는 국회를 해산하고‘중화민국 임시약법(臨時約法)’을 폐지했다.

1914년6월 장개석은 일본에서 손중산이 조직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에 가입했고 이후 여러 차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원세개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 수배령이 떨어졌다. 1914년에서1915년까지 장개석은3차례 일본에 건너갔고 손중산과 자주 만났다.

1916년 원세개가 제정(帝政)을 부활시키려다 실패한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여원홍(黎元洪)이 후임 총통이 되었다.그는 임시약법과 국회를 다시 회복시켰다.그러나1917년 폐위되었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仪선통제)를 다시 황제로 옹립하려던 장훈(張勳)의 복벽(復辟)이 실패하자 권력을 장악한 단기서(段祺瑞원세개 휘하의 군벌)가 다시 임시약법을 폐지하고 풍국장(馮國璋),장작림(張作霖)과 연합해 군벌의 독재를 부활시켰다.

1917년 손중산은 임시약법을 수호하기 위해 광주에서 호법군정부(護法軍政府)를 만들고 대원수(大元帥)에 취임했다.그는 호법전쟁을 계획해 군사를 일으켜 북벌에 나섰다.당시 호법군은 운남(雲南)군벌 당계요(唐繼堯),광서(廣西)군벌 육영정(陸榮廷),광동 군벌 진형명(陳炯明)의 군대가 주체가 되었다.

장개석은 손중산에게‘북군(北軍베이징을 장악한 군벌의 군대)에 대한 작전계획서’를 제출해 북군의 실력을 상세히 분석했다. “북방정부가 관할하는 군대는 약30만 명 이상이지만 실제로 병력동원이 가능한 자는 풍국장,단기서 두 파 세력을 합해6만을 넘지 못한다.” “북군은 숫자는 많지만 단(段)씨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남쪽을 공격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면서 그는 작전계획을 제출했다. “우리 군은 장강(長江)연안을 주 작전지역으로 삼아 먼저 무창을 공략하고 이후 남경을 안정시켜 장강 일대의 적군 세력을 격파한 후 북경을 직접 공격해야 한다.”장개석의 계획은 손중산의 인정을 받았다.

장개석은 여러 차례 광동군에서 군사보직을 맡으며 발군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진형명은 이런 장개석을 중시했고 일찍이 장개석에게 쓴 편지에서“월군(粵軍광동군)이 백번을 패배하더라도 그대와 같은 사람은 없어선 안된다.”고 했다.옛말에‘숲에 나무가 빼어나면 반드시 바람이 불기 마련이다.’장개석의 능력이 비범했기 때문에 구식 군인들로 구성된 월군에서 다른 이들의 질투와 배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직위에 연련하지 않았으며6년간12번이나 사직했다.하지만 그때마다 아주 빨리 불려와 새로운 직책을 맡기곤 했다.장개석은 점차 손중산이 가장 신뢰하는 군사적 조수가 되었다. 1920년 손중산의 조수였던 주집신(朱執信)이 전사하자 그는 장개석에게 전보를 쳤다. “집신이 갑자기 사망하니 내게는 팔다리를 잃은 것과 같네.우리 당(黨)에서 군사를 알고 또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용감하고 성실함에서 집신과 비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대뿐이고 병사에 관해서는 그대가 집신보다 낫다.”

이를 보면 손중산이 장개석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1921년 장개석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효자였던 그는 몹시 비통해 했다.손중산은 직접 제문을 써서 말했다. “저 손문은 아드님인 개석과 십여 년을 함께 지내며 온갖 위험을 겪었고 생사를 넘나들며 아침저녁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개석은)뛰어난 자질을 완벽히 하여 위험을 예측할 수 없고 성패를 기약할 수 없음에도 원칙을 지키면서 임기응변에 능통했으니 마치 유유자적한 강물과 같고 움직이지 않는 산악과도 같았습니다.” “나중에 개석을 만나 그의 근기가 심후하고 양육이 신령함을 알아보았고 곧 옛날이 지금만 못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중산은 장개석의 모친을 추도하면서 장개석을 찬양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말은 자신의 심복이자 아끼던 장수인 그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분명히 드러냈다.

1922년6월16일 비상대총통(非常大總統)으로 있던 손중산은 총통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광동군 사령관 진형명의 공격을 받았다.손중산은 몰래 총통부를 빠져나와 영풍함(永豐艦)에 올라 겨우 화를 면했다. 18일 손중산은 장개석에게“일이 긴급하니 빨리 오기 바람.”이라는 전보를 쳤다.

6월29일 절강에 머물던 장개석이 광주로 달려와 영풍함에 올랐다.손중산은 크게 기뻐하며“장(蔣)군 한 사람이 이곳에 온 것은2만의 지원군이 늘어난 것과 같다.”라고 했다.

장개석이 영풍함에 승선했다는 말을 들은 진형명은 몹시 긴장하며 장개석이 손 선생 신변에 있으면 분명 많은 뛰어난 계략을 낼 거라고 말했다.이처럼 장개석은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영수(領袖)와 함께 배위에서42일을 지내며 손중산의 안전을 지켰고 위험한 국면을 전환시켰다.나중에 장개석은‘손대총통 광주 몽난기(孫大總統廣州蒙難記)’를 썼다.

손중산은 책의 서문에서“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개석이 위험을 무릅쓰고 광동에서 달려와 배에 오른 후 날마다 내 옆을 지켰다.또 그가 낸 계책이 많이 적중했고 그는 나와 해군 장병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 했다.”라고 하며 밤낮으로 자신을 따르며 동고동락한 장개석의 품행을 높이 평가했다.

1921년 소련 대표 마링(馬林)이 계림(桂林)으로 찾아와 손중산에게 물었다.

“선생의 혁명사상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손은“중국에는 하나의 도통(道統)이 있으니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로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나의 사상기초는 바로 이 도통이며 나의 혁명은 바로 이 정통사상을 계승하고 널리 알리고 빛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현장에 있던 장개석의 회고에 따르면 마링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묻자 손중산은 의연히 똑같이 대답했다.장개석은“사실 당시 총리는 삼민주의는 우리나라 고유의‘천하위공(天下爲公)’윤리사상과 정치사상을 기초로 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삼민주의의 철학기초와 본질(三民主義的哲學基礎和本質)》)

창세주로부터 천하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영웅인물로서 손중산이 이루지 못한 위업을 이은 장개석이 평생 노력한 목표는 바로 중화 도통을 계승하고 삼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손중산의 눈에 청년 장교 장개석은“용감하고 성실하며 군사를 아는 사람”으로 민족 영수(領袖)에게 필요한 모든 소질을 갖추고 있었다.

원문위치https://www.zhengjian.org/node/155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