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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5): 황포군사학교

글/찬란한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4.황포의 군혼(軍魂)

군사학교 설립

손중산은 원래 의사출신이지만 평생 주요활동은 오히려 무장투쟁이 중심이었다. 1895년 광주기의(廣州起義)부터 시작해1911년 황화강(黃花崗)기의에 이르기까지 10차례에 무장폭동은 모두 그가 이끌던 흥중회(興中會)나 동맹회(同盟會)가 발기한 것이다.무창기의는 손문 사상의 거대한 영향과 청군(淸軍)내부에 침투해있던 동맹회 비밀조직에 의해 촉발되었고 최종적으로 만주족의 청나라를 전복시켰다.

임시대총통에 선임된 후 손문의 나라는 호시탐탐 노리는 원세개와 그 휘하의 북양군벌뿐만 아니라 각 지역을 차지한 채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군벌들의 위협을 받았다.그때는 중화민국이 막 서서 대총통 손중산은 당(黨)은 있어도 군대가 없어서 웅지를 펼치기 힘들었다.

1917년9월 손중산은 광주로 남하해 중화민국 군정부(軍政府)대원수에 취임하고 호법군(護法軍)을 조직했다.그는 장개석이 제안한‘북군에 대한 작전계획서’를 채택해 호법전쟁을 발동시켜 북경을 장악한 단기서(段祺瑞)토벌에 나섰다.수개월 사이에 여러 차례 승전보를 전해왔다.하지만 호법군의 주력이었던 운남군벌 당계요와 광서군벌 육영정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단적으로 북방과 강화를 맺고 대원수의 실권을 없애기로 모의했다.

1918년5월 분노한 손중산은 대원수직을 사퇴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그는 전보에서“돌아보면 우리나라의 큰 우환은 무인(武人)이 패권을 다투는 것보다 큰 게 없다.남과 북이 다 한통속이다.”라고 지적했다.

1921년1월 광주에서 다시 비상(非常)국회가 소집되었다. 4월 손중산이 비상대총통(非常大總統)역주:국회에 참석한 의원이 정족수에 미달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회가 아닌 비상국회라 하고 여기서 선출된 대총통이라 비상대총통이라 한다)에 선임되었고 진형명이 월군(粵軍광동군)총사령관이 되어 다시 한 번 중국통일을 위한 북벌을 준비했다. 1922년6월16일 진형명이 손중산을 배신하고 대총통부를 포격하자 손중산은 어쩔 수 없이 광주를 떠나야 했다.진형명 사변은 다시 한 번 국군(國軍)건립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주었다.

1924년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식으로 소련과의 연합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소련고문 보로딘과 여러 명의 중공 영수들이 대회에 참가해 분위기를 주도하려 했다.하지만 막 소련 방문에서 돌아온 장개석이 소련에 대해 찬성하지 않자 손중산은 의도적으로 장개석이 대회준비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대신 그를 황포군사학교 주비(籌備)위원장으로 파견해 자신의 군사학교와 군사역량을 세우게 했다.

장개석은 중공 당원들이‘소련을 끼고 자신을 강화하는’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그러나 손중산은 그를 강력히 만류했다.나중에 장개석은“국부께서 여러 차례 편지와 전보를 보내 독촉하고 책망하시며 나더러 혁명당원은 당연히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사직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또 대계도(戴季陶)동지를 봉화(奉化)로 파견해 내가 당정(黨政)에 간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직 군사학교에 전념하라고 약속하게 하셨다.나는 곧장 광주로 돌아왔고 황포군사학교 교장직을 받으들였다.”(장개석,《중국 안의 소련(蘇俄在中國)》)

2년 전 영풍함 사건 때 손중산은 일찍이 자신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장개석더러 앞으로50년을 준비하라고 당부했다.장개석은1965년‘국부 탄신100주년 기념문’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국부(國父)께서 갑자기 일어나시더니‘곧 배를 바꿔야 하는데 나는 내게 남은 날이 길어야10년을 넘지 않음을 알고 있네.하지만 자네는 적어도 오십년은 있으니 주의(主義삼민주의)를 위해 분투하고 혁명을 위해 자중하기 바라네.’라고 하셨다.당시 이 가르침을 듣고 진실로 그 어떤 말로도 그분의 감정을 위로할 수 없었기에 나는 다만 황공하게‘중정(中正장개석)도 올해 이미 서른여섯입니다.’라고만 대답했다.국부께서 다시 말씀하시길‘우리 당의 혁명이 이렇게 큰 변화를 만났음에도 우리는 아직 반역자들의 해를 입지 않았네.앞으로 만약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자네가 주의를 위해50년을 더 분투한다 해도 많다고 할 수 없을 걸세.’”

하늘은 이미 손중산의 뒤를 이어 민족의 운명을 주도하고 삼민주의를 위해50년을 분투하도록 장개석을 배치했던 것이다. 1922년 영풍함 사건에서1975년 장공(蔣公)이 서거할 때까지 장장53년이 지났다.

장개석이 영풍함에서 영수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한42일간 손중산은 장개석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인물로 보았다.때문에 그를 소련에 파견했고 또 군사학교를 만들게 했으니 실제적으로 그에게 중국의 미래를 맡긴 것이다.

1924년6월 황포군사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기 전 장개석은5월8일 교장의 자격으로 제1기 학생들을 면접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민족은 쇠약하고 민권은 박탈되고 민생은 쇠잔하지만 사람들의 욕심이 횡행하고 국가가 화란(禍亂)에 빠져 정부가 흔들리는 가운데 우리 당의 총리와 중앙집행위원회 여러 동지들이 온갖 어려움을 딛고 고심하여 이렇게 대규모 학교를 꾸린 것이다.이는 실로 아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부터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남의 명(命)을 바꾸려면 먼저 자신의 명부터 바꿔야 한다.만약 자기 스스로는 개혁하지 못하면서 남을 개혁하려 한다면 어찌 개혁할 수 있겠는가?바로 바른 이치에 따라서 해야 하며 궤도에 올라 해야 한다.” “천지가 뒤집히고 흔들리는 시기에 우리는 영웅적인 기개로 우뚝 서서 천지 사이의 정기(正氣)를 지켜내고 인류의 겁운(劫運)을 구원해야 한다.”(장개석,《군사학교의 사명과 혁명의 인생(軍校的使命與革命的人生)》,1924)

그는 또 학생들에게 자아를 희생하는 정신을 요구했다.

“우리 군인의 직분은 오직 한 글자 생사(生死)의 사(死)일 뿐이다.우리 군인의 목적 역시 사(死)란 한 글자가 있을 뿐이다.사(死)자 이외에는 반대로 말하면 바로 구차하게 생을 부지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만약 죽음이 두려워 구차히 살고자 한다면 군인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격이 없는 것이니 바로 사람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운 것도 있고 기러기 깃털보다 가벼운 것도 있다(死有重於泰山,有輕於鴻毛)’고 한 것이다.만약 우리의 죽음이 태산만큼 가치가 있다면 가치 있게 죽은 것이다.만약 주의(主義)를 위해 죽고 나라를 구하고 당을 구하기 위해 죽는다면 그럼 죽음에 또 무슨 애석할 게 있겠는가?”(장개석《군사학교의 사명과 혁명의 인생》)

당시 군사학교에 많은 표어들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 한 대련(對聯)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승진하고 돈을 벌려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고(升官發財請往他處)죽음이 두려워 구차히 살려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貪生怕死勿入斯門).”고 적혀 있었다.이 구절은 황포정신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금갑장성(金甲長城)

황포군사학교 초창기에 교장 장개석은 군복,군모의 디자인부터 교관 초빙,교과과정을 꾸리고 사격훈련을 진행하거나 심지어 기숙사 위생,학생들의 풍기 등 거의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황포학교 제1기는 약5백 명으로 대부분 장개석이 직접 선발한 학생들이었다.그는 또 학생들을 위한 독서목록을 만들었는데 이중에는 전통적인 경서(經書),역사,중국과 외국의 전쟁사,역대 영웅의 문집,근대과학 등42종류100권이 넘는 책들이 두루 망라되어 있었다.

황포군사학교는 원래 매 기당 약3년에 걸쳐 고급 군사인재를 배양하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당시 형세가 워낙 급박했다.때문에 제1기는1924년5월5일 입학해 같은 해11월8일 약 반 년만에 졸업했다.당시 조건이 아주 특수했음을 볼 수 있다.왕백령(王伯齡)의 회고에 따르면 군사학교 초기에는 여러 사람들이 학기가 적어도1년은 될 것으로 여겼지만 장개석은 석달이면 충분하다고 고집을 피웠다.아울러 만약 여기서 더 지연된다면 중국은 이 기간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했다.결국 절충해서6개월이 된 것이다.(왕백령,《황포군사학교 설립을 회고(黃埔軍校開創之回憶)》)

1924년10월 광주 상단(商團)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손중산은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장개석 등6인을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파견했다. 10월9일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보낸 편지에서“지금의 국면은 호한민,왕정위가 유지하고 보호하라.만약 유지하지 못하고 일단 붕괴되면 당장 칼을 뽑아 혼란을 차단하되 성패는 따지지 말라.지금의 혁명위원회는 이런 수단을 내기 위해 주비한 것으로 호한민이나 왕정위는 적합하지 않다.그러므로 각기 길을 나눠 일을 처리 하되 우물쭈물하지 말아야 한다.”(《장중정에게 보내는 편지(致蔣中正函)》)

10월15일 장개석은 황포학생군과 정부군의 지휘를 맡아 신속하게 폭동을 진압했다.

11월13일 손중산은 장작림,단기서,풍옥상의 요청에 따라 북상해 국시를 함께 상의하러 가기 전에 군사학교를 시찰하러 왔다.그는 장개석에게“지금 황포군사학교 학생들을 보니 반드시 나의 생명을 계속해 나의 주의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 학생제군들이 있어 내가 이루지 못한 뜻을 완성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

국부는 이렇게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는 황포에 남긴 유언과 같았다.

1925년2월1일 장개석은 직접 황포군사학교 교도단(教導團)과 학생군 및 월군(粵軍)제2사와 제7여단을 이끌고 동정(東征)에 나서 진형명을 토벌했다.피비린내 나는2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반군은 강서(江西)로 도주했다.신해혁명 북벌군 총사령관 요우평(姚雨平)의 회고에 따르면“장 선생은 식견과 담력이 뛰어나 동정할 때 몸에 수류탄을 가득 걸고는 전선에서 지휘하거나 심지어 선봉에 섰다.”

장개석은 황포학생들에게 언제든 전투에 나서 희생할 준비를 하라고 요구했다.황포1기4백여 명의 학생들은 불과1년 만에 절반 이상이 전투 중 사망했다.장개석은1925년‘제1기 동창록 서문’에서“나를 따라 출정한 제1기 오백 제자는 교도단3천 동지 군대와 함께 약3분의1이 죽거나 부상했으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도다!”라고 했다. 2월10일 장개석은 동정 도중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를 썼다.

직접3천 제자 부대 이끌고악당을 평정하러 동정에 나섰네.힘들고 어려운 혁명 고군분투하며창공에 검 휘두르며 눈물 흘리누나.

親率三千弟子兵친솔삼천제자병鴟鴞未靖此東征치효미정차동정艱難革命成孤憤간난혁명성고분揮劍長空涕淚橫휘검장공체루횡

비분의 정서가 글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1925년4월에서6월까지 장개석은 군대를 이끌고 운남 군벌 양희민(楊希閔)과 광서 군벌 유진환(劉震寰)의 반란을 격퇴했다. 10월에서11월에는 제2차 동정에 나서 진형명의 반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국부의 전략목표였던‘광동평정’을 실현시켰다.그가 이끈 군대는 정부와 민중들 사이에‘기위장성(倚爲長城)’으로 불렸다.

광주 신문‘민국일보(民國日報)’사설에서는“장개석 선생은 우리 당의 금갑신(金甲神황금 갑옷을 입은 천신)이다.” “그는 강하고 사나운 적을 토벌해 이미 추락했던 군기(軍紀)를 다시 정돈시키고 반혁명 불량분자들을 숙청했으며 예상치 못한 변고를 진압했다.그는 진정으로 손중산 선생의 성실한 신도이다….”라고 평가했다.

당시 중공 총서기 진독수(陳獨秀)역시 주간‘향도(向導)’에 발표한 문장에서“지금 장개석 선생은 강력한 당군을 창설했고,군벌을 포위하되 백성들에게는 절대 피해를 주지 않는 당군을 이용해 성패나 운을 따지지 않고 운남,광서,광동 지역 각파의 군벌들을 숙청해 광동 군정과 재정을 통일하고자 했다.이는 국민당을 위해 놀랄만한 공훈일 뿐만 아니라 이미 돌아가신 손중산 선생이 다년간 힘이 부족해 이루지 못했던 뜻을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손중산은 일찍이 삼민주의를 실현하려면 군정(軍政),훈정(訓政),헌정(憲政)의 삼단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그가1914년 제정한 중화혁명당 총장(總章)에는“우리 당이 진행하는 절차는3시기로 나뉘는데 첫째,군정시기로 적극적인 무력으로 일체 장애를 제거하고 민국의 기초를 다진다.둘째,훈정시기로 문명한 법리(法理)로 국민을 감독하고 이끌어 지방자치를 건설한다.셋째 헌정시기로 지방자치가 완비된 후 국민이 대표를 선거하고 헌법위원회를 구성해 헌법을 만들고 헌법을 반포하는 날이 바로 혁명이 성공하는 때다.”라고 규정했다.

황포군사학교를 설립한 지 채2년도 되지 않아 장개석은 진정한 국민군(國民軍)을 창립해‘군정’실현을 위한 관건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곧 전개된 내외전쟁 중에서 황포군사학교 출신 군인들은 국군의 최정예가 되었고 황포의 군혼(軍魂)이 바로 국군의 군혼이 되었다.장공은 국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서 비적(匪賊)들을 소탕했고 항일(抗日)에 나서 국가의 존엄을 지켜냈으며 민족의 혈맥을 보호해‘국군의 아버지’로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나중에 일본‘지나(支那중국)파견군’총사령관을 지낸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는1939년 이렇게 평가했다.

“보아하니 적군(敵軍중국군)의 항일역량의 중심은4억 중국 민중에 있지 않고 그렇다고 각종 잡다한 군사들이 혼합된2백만 군대에 있는 것도 아니다.바로 장개석이 핵심이며 황포군사학교의 청년군관 계층이 주체가 된 중앙군이다.여러 차례 전투 중에서 그는 주요한 전투원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점차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배회하던 지방의 잡군들을 엄하게 격려하고 감독해 그들이 대오에서 떨어지지 않고 보조를 맞추도록 했다.그러므로 그 위력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이런 군대가 존재하는 한 평화적으로 사변을 해결하려는 생각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원문위치https://www.zhengjian.org/node/155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