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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9): 일본의 야심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동아시아를 독차지하려는 일본의 야심

명나라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에 진출해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했다. 히데요시는 일찍이 천황에게 “조선을 도모하고 중화를 엿보는 것이 신의 평생 포부입니다.”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출병했고 중국사에서는 이를 ‘조선의 역’(朝鮮之役 역주: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 함)이라 한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승리해 한반도를 ‘일본화’시키고 조선에 일본문화를 수출하려 했다. 나중에 명나라와 일본이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대치하던 중 히데요시가 병으로 사망하자 마침내 일본군이 조선에서 전부 철수했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을 다시 통일한 후 도쿠가와 막부(에도 막부)를 세웠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부터 서방의 기독교 전도를 금지하고 쇄국에 들어갔다. 쇄국은 1633년 제1차 쇄국령을 발표한 후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끈 구로후네(黑船)가 일본의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은 이후 내전이 발생해 막부통치를 종식시켰다.

사실 일본도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시국이 매우 불안했다.

“이전 30년 우리 일본의 국사(國事)가 아주 힘겨웠지만 위급함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각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나라는 다급히 옛 정치를 제거하고 시류에 맞게 적절한 조치를 쥐해 새로운 정치로 개혁함을 나라가 존립하기 위한 중요한 계획으로 여겼습니다.”

(《이토 스케유키가 정여창에게 보내는 투항을 권하는 편지(伊東佑亨致丁汝昌勸降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해 아시아를 뛰어넘어 유럽에 들어가려 했고 국력이 날로 강성해졌다. 메이지 천황은 《역경》에서 “성인이 남쪽을 향해 앉아 천하의 소리를 듣고 밝음을 향해 통치한다(聖人南面而聽天下,向明而治)”에서 ‘명치(明治 메이지)’를 따서 연호로 삼았다. 유신(維新)은 《시경‧대아‧문왕》에서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지만 그 명이 새롭다(周雖舊邦,其命維新)”에서 따온 말이다.

천황은 《어필신(禦筆信)》을 반포해서 “역대 조종(祖宗)의 위업을 계승하여 일신의 어려움을 따지지 않고 사방을 경영해 억조창생을 편안히 다스리며 마침내 만 리의 파도를 개척해 사방에 국위를 펼치길 바라노라.”라고 명시했다.

손중산은 일본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관건적인 원인이 중국철학에 있다고 개괄한 바 있다.

“첫째 일본의 옛 문명은 모두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50년 전 메이지유신의 영웅들은 중국철학대가 왕양명(王陽明)의 ‘지행합일(知行合一)’ 학설에 심취해 모두들 독립적인 상무(尙武)정신을 지녀 이 4천5백만 백성을 도탄에서 구한 큰 공을 세웠다.”

(《중국을 구하려면 마땅히 구제도를 개혁해 공화를 실행해야 한다(救中國應改革舊制實行共和)》 1905년 8월 13일 도쿄 중국유학생 환영대회 연설)

장개석 역시 일본이 강해진 원인을 중국철학에서 찾았다.

“일본인들은 현대과학의 총과 대포를 제외하고 그들 국내의 모든 것은 완전히 중국을 배운 것이다. 특히 정신방면에서는 완전히 우리 중국의 것을 배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중국을 침략하고 중국을 소멸시킨 가장 큰 무기는 유형적인 총이나 대포가 아니라 그 밖의 무형의 정신이란 점이다. 일본이 강해진 원인은 구미의 과학에서 힘을 얻은 게 아리나 중국의 철학에서 힘을 얻었음을 알아야 한다. 저들 일본이 나라를 세운 후 거국적으로 위아래가 보편적으로 배운 것은 우리 중국의 무엇이었는가? 바로 중국의 유도(儒道)인데 유도 중에서도 가장 힘을 얻은 것은 왕양명의 지행합일과 ‘치양지(致良知)’ 철학이었다. 그들은 ‘치양지’ 철학의 찌꺼기를 훔쳐가 쇠약해진 일본을 개조하고 분열되어 있던 봉건국가를 통일하고 마침내 지금처럼 패권을 다투는 민족으로 성공했다. 우리 중국인은 스스로 자신의 입국을 망각했고 우리 고유의 가장 좋은 무기를 포기했다.”

(《혁명철학을 연구하며 겪은 단계를 자술하다(自述研究革命哲學經過的階段)》 1932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시대에 청나라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일으켰다. 당시 손중산은 이홍장(李鴻章)에게 편지를 써서 양무운동이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를 추구함은 인재와 교육을 소홀히 한 것으로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쫓는 것이라고 했다.

“듣자 하니 유럽이 부강한 근본은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 견고한 보루와 강력한 병사에만 달려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그 재주를 다할 수 있고 땅은 그 이로움을 다할 수 있으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고 재화는 그 흐름을 원활히 함(人能盡其才,地能盡其利,物能盡其用,貨能暢其流)’에 달려 있습니다. 이 4가지야말로 부강의 큰 길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입니다.

우리나라가 웅대한 포부를 펼치기 위해 부지런히 원대한 계획을 구하고 서양 법을 모방해 자강(自强)을 꾀하면서 이 4가지에 힘쓰지 않고 단지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에만 힘을 쏟는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쫓는 것입니다. 소위 사람이 그 재주를 다할 수 있는 것은 교양(敎養)에 도리가 있어야 하며 격려하는 방법은 임용이 적절해야 합니다. 자고로 교양의 도리를 중화(中華)만큼 갖춘 곳이 없지만 애석하게도 오랫동안 버려졌고 상서(庠序 고대 하상주 시대의 학교) 역시 겨우 그 이름만 남았을 뿐입니다. 근세에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굴기한 것은 삼대(三代)의 남은 풍속을 깊이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홍장께 올리는 편지(上李鴻章書)》)

메이지 유신과 양무운동의 결과는 청일전쟁(淸日戰爭 중국에서는 갑오전쟁이라고 함)으로 명백히 드러났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통제하지 못한 고종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조선을 두고 전쟁이 벌어졌다. 그중 갑오년의 해전은 중국이 치른 최초의 현대 해전이었다. 당시 청나라 육군과 해군은 서양의 총과 대포 및 철갑선으로 무장해 일본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음에도 결과는 오히려 대패였다. 일본이 대승을 거두고 북양함대가 전멸하자 청나라는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때부터 조선, 대만, 팽호(澎湖 복건성과 대만 사이의 열도)를 잃게 되었다.

한편 일본이 요동반도를 얻은 일은 러시아 극동함대의 전략을 위협했다.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이 중국 동북부에서 개전해 일본이 육군과 해군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이로써 일본은 중국 동북부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관동군’(關東軍)이 중국에 진출하며 세계열강의 하나로 발돋움 하게 했다. 러시아는 패전으로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는데 레닌과 볼셰비키 당원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본래 당시 해군을 놓고 말하자면 중국 해군의 실력이 일본보다 훨씬 막강했다. 그러나 결과는 황해 전투에서 내원(來遠), 양위(揚威), 치원(致遠), 초용(超勇), 광갑(廣甲) 등의 함정이 모두 격침되었고 전군이 복멸되었다. 갑오전쟁에서 우리는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도 왜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며 저 작은 일본에 굴복했는가? 첫째는 내부적으로 일치단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갑오패전은 만청(滿淸 청나라) 정부는 어리석고 부패했으며 인민들은 우매하고 무지했기 때문이다. 갑오패전의 그 다음 원인은 정부가 적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몰랐고 전체적인 정략(政略)과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자면 갑오전쟁에서 패전한 이유는 중국의 무력이 일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력 이외 다른 각종 원인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 각종 실패 원인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지금 침략에 항거하고 나라를 구하는데 가장 소중하고 가장 절실한 교훈이다.”

(《정부와 인민이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중요한 도리》 1936년)

사실 일본은 청나라 말기부터 이미 중원에 들어와 대화(大和) 민족이 아시아 대륙에서 활개치고 다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일본에 대해 아주 분명한 인식이 있었다. 그는 일본은 9.18(역주: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군벌 장작림을 암살하고 만주를 차지하기 위한 공격을 일으켰다) 이전부터, 즉 1차 러일전쟁 이후부터 동북을 점령할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사실상 이미 30년의 공부가 있었던 셈이다.

(《외국의 침략을 막고 민족을 부흥(抵禦外侮與複興民族)》,1934년)

“근대 일본의 중국침략은 9.18에서 시작된 게 아니며 작년 12월 화북사건(華北事件 역주: 1935년 일본군이 화북지방을 침략한 사건)에서 시작된 건 더욱 아니다. 멀리는 1874년 동치(同治) 13년 우리의 대만을 침략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1879년에는 오키나와를 침범했고 1894년에는 조선을 침략해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중국이 일패도지했다! 그 결과 대만과 팽호 열도를 정식으로 일본에 할양해야 했으며 1910년에는 조선 역시 일본에 병탄되었다. 현재에 이르러 우리 동부의 4성(역주: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는 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 외에 열하성이 있어서 동 4성으로 불렸다)을 다시 점령하고 더 나아가 화북을 침략하고 있다. 일본이 한걸음씩 중국을 침략한 과정을 연구해보면 모두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며 메이지 유신 이래 일찍부터 일관된 정책이었다. 즉 소위 말하는 북진하는 대륙정책과 남진하는 해양정책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대륙정책을 관철하자면 반드시 만주와 몽골을 차지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극동에서 소련세력을 몰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을 제압한 후 탐욕스런 자세로 대륙과 해양 두 방면에서 동아시아를 독차지하려는 야심을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런 야심은 만주와 몽골에 대한 적극정책을 주장하는 다나카(田中) 내각의 상주문의 몇 단락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상주서에는 ‘역대 내각의 만주와 몽골 정책은 메이지 대제(大帝)의 유훈을 따라 그 규모를 확장하고 새로운 대륙정책을 완성하지 않은 바가 없다.’

‘지나를 정복하자면 반드시 먼저 만주와 몽골을 정복해야 하고 세계를 정복하자면 반드시 먼저 지나를 정복해야 한다.’

‘만주와 몽골에 대한 권리를 진실로 손에 넣으려면 만주와 몽골을 근거로 무역의 가면을 쓰고 지나 4백여 주를 풍미해야 한다. 그 후 만주와 몽골의 권리를 사령탑으로 전체 지나의 이익을 약탈한다. 지나의 재부로 인도, 동남아 여러 섬 및 중부 아시아와 유럽을 정복하는데 사용한다. 우리 야마타민족이 아시아 대륙에서 활보하자면 만주와 몽골의 이권을 움켜쥐는 것이 첫 번째 큰 관건이다.’

이를 통해 보자면 일본의 만주와 몽골침략은 지금에 와서 발동된 것이 아니며 이미 일찍부터 결심과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정부와 인민이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중요한 도리》 1936년)

손중산 역시 일본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최근에 중국을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이다.” “중국이 만약 일본과 절교한다면 일본은 10일 내에 중국을 망하게 할 수 있다.”라고 했다.(《민족주의》 제5강, 1924년)

1912년 장개석은 일본에서 월간지 《군성(軍聲)》을 창간해 중국의 가장 큰 위협은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에서 온다고 지적하고 중국이 반드시 자립(自立)자강(自强)의 힘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땅이 좁고 인구가 조밀하며 자원은 빈약하고 공업이 발달한데다 해군이 강력하니 이 모든 것이 확장정책의 동력이 되었다. 손중산, 장개석의 우려는 중국에게 피할 수 없는 악몽이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0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