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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21): 끝내 강적을 이기다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평생의 경사

1942년 4월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을 통해 ‘뉴욕타임스’에 ‘나는 이렇게 본다(如是我觀)’는 문장을 발표해 영국과 미국 측에 중국에 대한 불평등 조약을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석 달간 우리 중국인들은 경이롭고 믿기 힘든 눈빛으로 서양 군대가 곳곳에서 적에게 불복하거나 항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무기를 들고 적에게 대항했다. 이제 곧 있으면 5주년이 된다.”

“우리 중국의 정신역량이 우리로 하여금 가장 열악하고 가장 힘겨운 난관들을 지날 수 있게 했으니, 서양 사람들이 이런 정신역량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송미령은 서방세계에 중국인들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분명히 알렸다.

송미령의 문장은 많은 미국인들의 공명을 얻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국이 영국이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연합국의 핵심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처칠을 설득해 1942년 10월 9일 미국과 영국이 중국에서 지녀온 특권을 포기한다고 선포했다. 장개석은 격동했고 당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는 총리(역주: 손중산)께서 혁명한 이래 평생 분투하신 최대의 목적이었다. 지금 마침내 내손으로 직접 달성했으니 마음속으로 기쁘기 그지없고 실로 평생 유일한 경사다.”

미국과 영국이 앞장서자, 프랑스, 캐나다, 벨기에,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의 여러 나라들이 아주 신속하게 중국에 대한 불평등 조약을 취소했다.

장개석의 인격은 국제적인 벗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루스벨트는 1943년 3월 마셜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반드시 장 위원장이 힘겨운 역경을 거친 후에야 4억 중국인들의 확고한 지도자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황인우 ‘장제스 일기를 읽다’)라고 했다.

1943년 11월 중국, 미국, 영국 세 나라 원수들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항일전략 및 전후 배치에 대해 상의했다. 장개석은 “만주, 대만, 팽호(澎湖) 등 일본이 중국에서 침탈한 모든 영토는 전부 중화민국이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본의 국체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조선과 베트남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두 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장개석은 또 “중국은 태국, 미얀마, 베트남 등에 대해 아무런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전후 중국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이 독자적으로 점령하게 한다”고 표시했다. 이는 소련이 일본에 출병할 기회를 막고 일본의 분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와 처칠도 장개석의 입장을 지지했고 카이로 선언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연합군 중국전구 참모장을 지낸 웨더마이어 장군은 중국의 항전에 대해 충심으로 탄복하면서 회고록에서 “나는 처음으로 국민정부가 항일전쟁 중 드러낸 놀랄만한 참을성과 인내력을 이해하게 되었고 결코 스틸웰 장군 및 다른 기자들이 묘사한 것처럼 그들이 싸우려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프랑스는 독일이 공격한 후 불과 6주 만에 항복하고 무릎을 꿇었지만 일본이 침략전쟁을 발동한 지 7년이 지난 1944년에도 중국은 여전히 고통을 참으며 버티고 있다.”(《웨더마이어보고서(魏德邁報告)》 1958년)

1944년 미국 공군 ‘비호대(飛虎隊 플라잉 타이거즈)’가 중국 공군과 합작해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1945년 초 미국은 폭격기를 동원해 일본 본토 주요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다. 도쿄도 공습을 당했다. 중국 육군은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에 대한 포위토벌 작전계획을 차례차례 진행했다.

1945년은 큰 전환의 해였다. 4월 28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급사했고 4월 30일에는 독일 총통 히틀러가 자살했다. 5월 초 이탈리아와 독일이 잇따라 항복하면서 추축국이 와해되었고 유럽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투항을 거부하면서 적극적으로 소위 ‘1억 총옥쇄(일본 본토에서 1억 명의 일본인들이 끝까지 저항한다는 의미)’작전을 준비했다.

7월 26일 미국, 영국, 중국 3개국이 독일 포츠담에 모여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에 일본의 모든 무장부대에 대해 무조건적인 투항을 즉각 선포하라고 통보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은 신속하게 완전 소멸될 것이다.” 미국이 열흘 전 원자폭탄이란 가공할 핵무기를 실험한 사실을 몰랐던 일본은 ‘신속한 완전 소멸’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완강히 저항할 것을 선택했다.

보다 많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역주: 1944년 4선 연임에 성공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하자 부통령인 트루먼이 직위를 승계함)은 원자폭탄을 이용해 일본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8월 6일과 9일 미군 폭격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섬광이 번쩍이며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린 후 충격파가 대지를 쓸어버린 후 버섯구름이 상공을 뒤덮자 두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고 14만 명의 일본인이 사망했다.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종전조서’를 발표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전역에서는 국민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장사(長沙)의 한 상인은 상점 입구에 “중화중산중정(中華中山中正) 민족민권민생(民族民權民生)”이란 대련을 붙였다. 이때 장개석의 성망은 하늘에 뜬 태양과 같았다.

덕으로 원한을 갚다

히로히토가 항복한 당일 장개석은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의 항전은 오늘에야 승리했다. 정의는 반드시 강권(强權)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진리가 마침내 증명되었다.” “우리 중국동포들은 반드시 ‘옛 악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람을 선량하게 대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지극히 높고 고귀한 덕성(德性)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관되게 주장해왔다시피 우리는 오직 일본에서 무력을 남용한 군벌(軍閥)만을 적으로 삼을 뿐 일본 백성들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늘 적군은 이미 우리 연합군에게 타도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보복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적국의 무고한 백성들에게 모욕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폭력으로 적의 이전 폭행에 대해 보복을 가하고, 과거 적들의 잘못된 우월감에 대해 모욕으로 화답한다면 원한이 원한을 낳으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우리 군대의 목적이 결코 아니다.”

(《항전승리 후 전국 군인과 국민 및 세계 인사들에게 알리는 편지(抗戰勝利告全國軍民及全世界人士書)》 1945년)

당시 연합국에게 일본 천황제도의 존폐는 아주 까다로운 문제였다. 서방 연합국들은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카이로 회담기간에 장개석은 “전쟁을 발동한 사람은 오직 한줌밖에 안 되는 일본 군벌들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군벌을 제거해 그들이 다시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라고 본다. 일본의 국체(國體)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가장 좋기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일시적인 전쟁 때문에 그 나라의 국체에 간섭한다면 장차 민족 사이에 영원한 잘못을 조성하게 될 것이다.”(《장총통비록》)

장개석은 루스벨트, 처칠 등을 설득해 천황(天皇)이란 이름을 남기고 일본 영토를 완전히 보존할 수 있게 했다. 전후 일본은 정치가 개명하고 경제가 발달해 공산세력의 확장을 억제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원한을 덕으로 갚은 장개석의 위대한 흉금에 대해 어떤 대만 학자는 “장개석이 일본에 대해 관대한 흉금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일본 국민을 적으로 삼는 대신 중일 양국을 본래 형제의 나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단지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도발한 일본 군벌이 제거되기만 하면 중일 양국은 적에서 친구로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후 중국이 아시아의 영도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일본은 반드시 자발적으로 귀부할 것이다.”라고 했다.

전쟁 중에 장개석은 일본 군벌들의 적수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 민족의 보호신이 되었다. 장공이 서거한 후 일본 아이치현에는 그를 모시는 ‘중정신사(中正神社)’를 세워 감사의 정을 표현했다.

건곤을 되돌리다

1945년 10월 24일 중화민국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등과 함께 공동으로 유엔을 창립했고 중국은 5대 상임이사국의 하나가 되었다. 장개석은 중국 최도 지도자의 신분으로 유엔창립자의 한명이 된 것이다.

장개석이 항전을 영도한 공적에 대해서는 심지어 그의 적들조차도 부정할 수 없었다. 1964년 이종인(李宗仁)이 공산당에 투항한 후 주은래에게 장개석이 무릎 꿇는 조각상을 천안문에 설치해 민중들에게 보여 주자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이에 대해 큰 불만을 나타내며 “이야말로 주인을 팔아서 영화를 구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를 어떻게 욕하든 그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북벌과 항전 중에서 그의 지위는 여전히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해선 안 된다.”[정사원(程思遠),《정해비신(政海秘辛)》]

모택동은 또 1971년 12월 한차례 내부 담화에서 “장개석에게 몇 가지 우수한 장점이 있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며 우리가 역사를 말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하나는 북벌해서 중국을 통일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항일전쟁을 한 것이며 세 번째는 대만과 팽호를 수복한 것이며 네 번째는 연해지역을 개척한 것이다. 1946년 장개석은 프랑스로부터 남해(南海)의 여러 섬들을 돌려받았는데 그 면적이 37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해 외몽고 3개와 맞먹는다.”라고 말했다.

장위국(蔣緯國 장개석의 둘째 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만약 부친이 카이로 회담에서 몇 가지 정파(正派)의 전략지도를 건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후의 발전은 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세계정세가 비록 엉망이긴 하지만 만약 카이로 회담에서 부친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세계는 아마 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의 노력은 이후 얄타회담에서 파괴되었다. 때문에 얄타회담이야말로 세계 분란을 조성한 근본원인이다.”라고 했다.

장위국은 “당시 피할 수 없는 세계대전이 곧 발생할 것이며 그것은 바로 공산세력과 반공세력의 전쟁이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를 주의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 전구(戰區)는 간고한 승리를 거둬왔고 그분(장개석)은 서양인들이 얄타회담에서 드러낸 이기심을 보완하기 위해 덕으로 원한을 갚는 방법을 제출했다. 본래 부친의 관념은 세계적이었는데 단순히 중국이 일본에 대해 덕으로 원한을 갚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유럽과 미국 연합국 측에도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덕으로 원한을 갚을 것을 제안하셨다.

그분의 목적은 장차 공산세력을 아시아 대륙 북부에서 차단해 태평양까지 뻗치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다. 그분은 또 유라시아 대륙에서 공산주의의 발전에 주의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유럽 각국은 일찍이 일부 조치를 취한 적이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유럽인들의 이기심 때문에 큰 혼란이 형성되었다. 맥아더 원수는 부친의 통지를 받은 후 공산주의 확산 방지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고 일본 천황제도를 보존해 공산주의가 전후 일본에서 즉각적으로 퍼지지 못하게 했다. 다른 한편 미국이 독자적으로 점령군을 파견하고 다른 참여국들은 상징적인 행정 군대만 파견해 소련군이 일본 본토에 진입할 수 없게 하셨다.”(《장위국 구술 자서전》)

장공이 서거한 후 일본 정부는 조전을 보내 “장(蔣) 총통은 일본을 다시 만든 커다란 은인이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 장중정의 대일정책은 전후 일본의 재건과 부흥을 가속화시켰다. 장 총통의 서거는 일본 국민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으며 양심을 지닌 일본국민이라면 누구라도 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같은 날 일본 전(前) 수상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일본은 앞으로 영원히 장 총통이 제2차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베푼 큰 은혜와 덕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일본인들이 가장 잊기 힘든 한 가지 일이라면 바로 장 총통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대해 덕으로 원한을 갚는 은혜를 베푼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장중정의 영광은 8년 대일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최고봉에 올랐으며 아편전쟁 이래 열강의 능욕을 받아온 반식민지 상태의 중국은 단번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더불어 5대 강국에 들었다. 일본 천황제도 폐지에 반대하고 분할점령에 반대하며 덕으로 원한을 갚았으니 그의 관대한 흉금은 우리로 하여금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라고 했다. 이때 일본과 중공은 이미 수교한 지 약 3년이 지났지만 일본 조야에서 모두 장공을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들이 여전히 흘러넘쳤다.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도 특별성명을 발표해 “장 총통은 단지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는데 위대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장 총통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세계평화와 질서의 기초를 다지셨고 아주 많은 공헌을 하셨다. 한국 국민들은 셀 수 없이 많은 그의 이런 위업을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추도사에서 “본인과 한국 동포 및 전 세계에서 그의 위대한 업적을 숭상하는 모든 사람들은 장 총통이 겪은 간고한 고생과 그럼에도 신념을 지키며 의연하게 버텨낸 정신에 대해 가장 숭고한 존경을 보낸다.”라고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