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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22): 소련방문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5장 공산군과 싸워 중원을 지키다

중국의 유명한 민간 전설 중 유백온(劉伯溫)의 《금릉탑비문(金陵塔碑文)》에 “금릉탑 금릉탑 유기가 세우고 개석이 부수네. 금릉탑이 부서진 후 군사와 백성이 스스로 죽이고 초두가 초두의 사람을 상대하네(金陵塔金陵塔 劉基建介石拆 拆了金陵塔 軍民自己殺 草頭相對草頭人).”라고 했다.

이것은 장개석이 공산당과 반드시 결전을 치른다는 예언이다. 공산당에 대한 장개석의 인식은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몇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장개석은 손중산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직접 소련을 방문해 공산당의 본질을 고찰한 후 ‘공산혁명은 중국에 적합하지 않다’는 유명한 결론을 내렸다.

1. 소련여행

속 빈 약속

장개석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에 몹시 흥분했고 중국이 러시아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공산당선언’, ‘자본론’, ‘마르크스학설 개요’ 및 ‘레닌총서’ 등의 서적을 읽으며 체계적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다.

손중산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한 후 소련공산당 및 소비에트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지녔지만 그렇다고 소련의 군사적 원조를 통해 국민혁명을 실현한다는 목표를 배제하진 않았다. 1923년 1월 26일 손중산은 국민당 총리의 자격으로 소련 특사 요페(Adolf Abramovich Joffe)와 상해에서 회담을 갖고 국민당과 소련의 합작에 대해 논의했다.

쌍방은 ‘손문-요페 연합선언’에 서명했으며 선언에서 “(손일선 박사는) 공산조직이나 소비에트 제도까지도 사실상 모두 중국에 이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국은 이런 공산조직 혹은 소비에트 제도를 성공시킬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명확히 규정했다.

두 사람은 또 소련이 제정 러시아 시기 중국과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아울러 외몽골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것에 반대한다고 표시했다. 얼마 후 소련은 재정 및 군사원조를 제공해 국민당의 중국통일을 도와주는 것에 동의했다.

1923년 3월 초 손중산은 광주(廣州)로 돌아와 대원수부(大元帥府)를 설치하고 육군대원수에 당선되었다. 동시에 그는 적극적으로 소련을 방문하는 일을 준비했다. 손중산은 레닌에게 편지를 써서 장개석이 이끄는 방문단을 파견한다고 알리면서 장개석에 대해 ‘나의 총참모장이자 가장 믿을만한 대표’로 ‘이미 전권을 부여했으니’ ‘내 이름으로 공작을 진행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1923년 8월 16일부터 11월 29일까지 석달이 넘는 기간에 장개석은 4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해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칼리닌 및 치체린 등 정계요인들을 두루 만났다. 레닌은 당시 와병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장개석은 군사학교, 무기 공장을 시찰해 소련 홍군(紅軍)의 편제 및 정치공작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는 방문단을 대표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모색하면서 손중산에게 충성을 바칠 국민혁명군을 만들어 오패부(吳佩孚) 등 북방 군벌을 격퇴하고자 했다. 당시 손문, 장개석이 세운 서북군사계획은 몽골의 고륜(庫倫 지금의 울란바토르)에 국민당 군사기지를 만든 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몽골에서 남쪽으로 출병해 북경을 차지한 직계(直系) 군벌 오패부를 토벌해 중국을 통일하려던 것이다.

몽골은 신해혁명 이후 중국에서 독립했고 러시아가 이 틈을 노려 군대를 파견해 몽골을 차지하고 있었다. 1917년 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한 후 소련은 계속해서 몽골을 자신의 세력범위로 삼았고 1921년에는 소련 홍군이 몽골에 들어와 주둔했다.

1919년 레닌은 과거 제정 러시아 시대 때 맺었던 중국과의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지한다고 제안했다. 당시 이 약속은 중국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고 소련이 몽골 문제에 있어서도 중국을 존중할 거라고 생각했다. 손중산은 레닌의 이런 약속에 근거해 서북군사계획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소련의 약속은 공수표가 되고 말았으니, 홍군이 몽골을 차지한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방문단을 대표한 장개석이 고륜에 군사기지 설치를 제안하자 소련 측에서는 시간을 질질 끌며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았고 협상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소련을 방문한 가장 큰 이유였던 서북군사계획에 대한 소련 측의 모호한 태도는 장개석을 몹시 곤혹스럽게 했다. 소련은 방문이 끝나기 직전인 11월에 이르러서야 답변을 명확히 했다.

11월 11일 소련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스클리안스키와 소련혁명군 총사령관 카메네프 등이 다시 장개석 등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스클리안스키는 단도직입적으로 국민당의 계획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손일선(孫逸仙 손문)과 국민당은 마땅히 전력을 기울여 정치공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재 조건 하에서 일체 군사행동은 모두 실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국민당은 마땅히 소련 공산당을 본받아 선전에 나서고 신문이나 잡지를 꾸리며 선거운동을 하는 등의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군대 설립은 급하지 않다고 했다.

장개석은 이 대답에 크게 실망했고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개인을 위해서든 국가를 위해서든,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구하는 것만 못하다. 친우, 맹우가 아무리 친밀하다해도 언제나 그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크든 작든 성공과 실패를 막론하고 본인의 기업(基業)을 소홀히 하거나 방치할 수 없다. 만약 성공하려면 본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부의 힘은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다.”

11월 27일 장개석은 소련혁명군사위원회 주석 트로츠키를 만나 다시 한 번 몽골문제를 언급했다. 그러자 트로츠키는 무시하는 표정으로 국민당이 만약 꼭 기지를 건립하고 싶다면 마땅히 중국 본토에서 해야 하며 몽골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대답했다. 당시 소련은 겉으로는 여전히 몽골을 중국 영토라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트로츠키는 은연 중에 몽골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장개석은 몹시 화가 났고 나중에 대표단에게 “트로츠키가 사리에 맞지 않는 말로 생떼를 쓴다!”면서 “만약 몽골이 독립하려면 우리의 승인이 필요하며 우리가 그것의 독립을 허락해야만 가능하다. 몽골 스스로 자신을 승인할 순 없다!”라고 했다.

중공 입당 거절

방소(訪蘇) 기간 코민테른은 장개석에게 중공에 가입할 것을 권했다. 장개석은 완곡히 거절하면서 손중산 선생의 뜻을 확인해봐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요중개(廖仲愷)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공산당 가입문제는 제가 손 선생께 하명을 청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충신(忠臣)이라 여기며 개성이 이렇다고 해도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충신이 군주를 모심에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지만, 매국노가 된다면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을 해칠 뿐입니다. 저는 빛나는 매국노가 되기보단 비루해도 충신이 되고 싶고 형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장개석연보초고(蔣介石年譜初稿)》)

트로츠키와 회담한 후 장개석은 철저히 실망했는데 석 달간의 소련 방문에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틀 후 대표단은 상해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일기에서 장개석은 “억울하고 무료하기 그지없었다”면서 당시 심정을 표현했다.

손중산에게 보낸 《러시아 방문 보고서(遊俄報告書)》에서 장개석은 “러시아 당(소련공산당)은 진실로 믿을 수 없으며,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제국주의와 비교하면 오십 보 백 보에 불과합니다.”라고 했다.

손중산의 ‘연소용공(聯俄容共)’은 국민당 내부에서도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손 총리는 여러 차례 당과 나라의 원로들에게 “공산당이 우리 당의 범위를 지킬 수 있다면 조용히 감화할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내게 처리할 법이 있소.”라고 장담했다. 분명한 건 손중산은 소련과의 연합은 부득이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있었고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적이었다는 점이다. 장개석은 자신의 뜻과 다르긴 하지만 영수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황포군관학교 설립에 몰두했다.

항장의 칼춤

1924년 3월 14일 요중개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장개석은 “중국에 대한 소련공산당의 유일한 방침은 바로 중국공산당을 정통으로 만들려는 것으로, 결코 우리 당과 끝까지 합작해 성공을 꾀한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중국에 대한 정책도 만주, 몽골, 회족, 장족 등 여러 부족을 모두 그 소비에트의 하나로 간주하지만 중국 본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손댈 의도가 없었습니다. 매사에 자립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남에게 구하는데 능히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이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또 “저들이 말하는 소위 국제주의와 세계혁명이란 것도 모두 제국주의가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며 그저 사람을 미혹시킬 뿐입니다. 소위 러시아(소련)와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은 제가 보기에 본국을 이롭게 하고 타국을 해치려는 마음이 실로 오십 보 백 보 차이에 불과합니다!”라고 했다.

석 달이 약간 넘는 소련 방문 기간에 장개석은 근거리에서 소련 내부의 많은 문제점들을 관찰했다. 그는 일기에서 “소수민족 출신이 국정을 맡아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데 내가 보기엔 위험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분명 그루지야 출신인 스탈린이 소련에 잠재적인 위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비록 스탈린 본인을 만나진 못했지만 장개석은 이미 이 사람이 선량한 부류가 아님을 예감했다.

1931년 4월 13일 장개석이 옛문서를 정리하다가 전에 요중개에게 보낸 편지 사본을 보고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전에 옛날 원고를 정리하다 민국 13년(1924년) 봄 요중개에게 보낸 편지를 봤다. 소련의 본심이 음흉해서 예측하기 어렵다고 상세히 말한 것을 보고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그럼에도 다만 총리께서 이미 소련과 연합하기로 결심하셨고 그 방침을 바꿀 수 없다고 여겨 광동에 가서 일(황포군사학교 창립)을 맡은 후 점차적으로 보완하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다. 큰 처형과 아내가 탄식한 것처럼 만약 내가 처음부터 철저히 반공해서 광동에 가서 일을 맡지 않았더라면 총리께서 서거하신 후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소멸되었을 것이며 중국 역시 구원할 희망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암리에 운명이란 게 존재하는 건 아닐까?”

장개석은 잠시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뒤로 물러났다고 여겼는데 사실상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장개석에게 군사학교 설립을 맡긴 것이야말로 손중산이 남긴 탁월한 계책이었다.

수년 후 장개석은 《중국 안의 소련》이란 책에서 “(소련방문은 내게) 소비에트의 정치제도는 전제(專制)와 테러조직으로 우리 중국 국민당 삼민주의 정치제도와는 근본적으로 서로 용납할 수 없음을 더 잘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 그는 소련의 중국원조는 그야말로 항장이 유방을 죽이기 위해 칼춤을 추는 것임을 알고 이에 대해 크게 걱정했다.

장개석은 “소련에 가기 전에 나는 우리 국민혁명에 대한 소련의 원조를 몹시 신뢰했고 그들이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진심이며 절대 사심이나 악의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단 소련에 가서 시찰해본 결과 나의 이상과 믿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우리 당의 연소용공정책은 비록 일시적으로 서방식민주의에 대항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국가의 독립과 자유라는 목적에는 도달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소련의 소위 ‘세계혁명’ 전략과 목적은 동방민족의 독립운동에 서방식민주의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중국 안의 소련》)라고 회고했다.

“석 달 간의 소련시찰에서 얻은 인상을 총괄하자면 무형 중에 내게 한가지 감각이 생겨나게 했다. 그것은 바로 소련공산 정권이 일단 강성해지면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정치적 야심이 부활할 것이며 우리 중화민국과 국민혁명에 대해 후환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크고 장차 상상하기조차 힘든 위협이 될 것이다.”

장개석이 예견한 소련공산당의 위협은 나중에 과연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