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소련의 양아들
모택동은 일찍이 “중국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찾아낸 것은 러시아 사람들의 소개를 거친 것이다. 10월 혁명 이전에 중국인들은 레닌이나 스탈린은 물론이고 마르크스나 엥겔스에 대해서도 몰랐다. 10월 혁명의 포성이 우리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공산주의는 전 세계에 출현했고 중국 공산당의 생성 역시 이렇게 외래의 변이된 산물로 오천년 중국 전통문화와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다.
‘중국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부’로 불리는 이대조(李大釗)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해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대조가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할 때 한 독일인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다.
“만약 오십이 안된 사람이 마르크스의 학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을 속이는 말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책은 방대하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공산주의 운동을 국경 없는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럼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처음 사회주의 학설을 받아들인 후부터 러시아혁명과 그 지도자의 동향에서 정보를 얻었고 공산주의 운동을 모색하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계 사회주의 사조 및 세계적인 공산주의 운동과 밀접하며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장개석은 《중국 안의 소련》이란 책에서 명확하게 지적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산물이 아니며 소련 공산제국의 양아들이다. 소련 공산주의는 인류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세에는 더욱 부적합하다.” 여기서 양아들란 보통 혈연관계가 없는 사이에 맞이하는 양자를 가리키는데 중공을 소련의 양아들에 비유한 장개석의 표현은 절묘한 데가 있다.
장개석은 자신이 경험한 중공의 발전사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공산당은 이것(중공)을 동방에 뿌린 공산주의의 종자로 보았고 그들이 와서 계급투쟁을 만들어낼 가장 좋은 정원으로 보았다. 민국 7년 즉 1918년 치체린의 보고서와 민국 8년 카라한 선언은 소련이 중국내 특권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성명해 즉각적으로 중국인들의 동경을 불러 일으켰고 아울러 전에 없던 광범위한 호감을 얻었다. 이에 소련은 외교사절을 파견해 북경 정부(역주: 북양군벌)와 담판을 시작하는 한편 코민테른 요원을 파견해 국부인 손 선생(손문)과 연계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은 소련은 동시에 또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인 중국공산당 창립을 추진하면서 재정적인 원조와 함께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조종했다.”(《중국 안의 소련》)
“민국 9년(1920년) 봄 코민테른 극동 책임자 보이틴스키(Gregori Voltinsky 즉 보로딘)가 중국에 와서 이대조, 진독수 등과 중국공산당 창당을 준비했다. 민국 10년(1921년)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모스크바에서 파견한 마링(Maring 본명은 Sneevlietet)이 참가해 지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소련제국주의자들이 중국을 침략한 도구인 중공 비당(匪黨)의 기원이다. 당시에는 소수 지식인들이 결합해서 마르크스의 교조를 받아들이고 친소 감정을 지니면서 노조에 들어가 조직을 발전시키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중공의 자연스런 발전을 허락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인위적으로 가공하려 했으며 그것을 폭동을 음모하는 간첩집단으로 만들려 했다.”(《중국 안의 소련》)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코민테른 상해 대표 마링 등의 감독 하에 소집된 것이다. 당시 진독수를 대신해 상해공산당을 지도했던 이달(李達)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6월 코민테른에서 마링과 니콜스키 두 사람을 상해로 파견했다. 그들은 우리와 접선한 후 우리 당의 상황을 알아보고는 즉각 당대표대회를 소집해 정식으로 중공 창립을 선포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당의 조직에는 모두 7개 지방 단위가 있었다. 나는 7통의 서신을 각 지역 당에 보내 대표를 선발해서 상해로 파견하도록 했다.”(《이달자서전(李達自傳)》) 지역 대표들은 개회통지 외에 1인당 백 위안의 돈을 여비로 받았다.
중국공산당 창립멤버이자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을 역임한 포혜승(包惠僧)의 회고에 따르면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사람이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며 중국 노동자계급이 어떠한지 여부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진독수가 우리를 담식당(譚植棠)의 집으로 소집해 니콜스키를 만나게 했고 이어서 상해 이한준(李漢俊)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코민테른과 국제적색노조에서 상해로 두 명의 대표를 파견해 중국공산당 발기대회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으며 진독수더러 상해로 돌아와 광주에 두 사람을 파견해 출석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2백 위안의 여비를 보내왔다.”(《포혜승 회고록(包惠僧回憶錄)》)
당시 1백 위안이면 한 가족이 1년을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20년대 초 4~5인가구의 노동자 가정이나 또는 삼대가 같이 사는 가정의 일년 생활비가 132.4원이었다.”(《1918~1980년 북경사회상황조사》)
제1차 대표대회가 열린 후 약 1년이 지난 1922년 6월, 중공의 활동경비 약 1만 7천여 위안 중 1만 6천여 위안은 코민테른이 원조한 것이고 중공 독자적으로 준비한 자금은 겨우 1천 위안에 불과했다.
공산주의 사상은 중국에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1933년 호적(胡適)은 《독립평론(獨立評論)》에 발표한 어느 논문에서 유신변법시기 중국인들의 서양문명에 대한 인식은 “큰 의심이 없었고” 그때 중국 지식계의 이상적인 서양문명은 소위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서구문명이었다. 이 시대의 정신은 자유를 사랑하는 개인주의였고 생산방법은 사적(私的) 자본주의였으며 정치조직은 영국풍의 대의정치였다.
하지만 유럽에서 전쟁(1차 대전)이 있은 후 소련공산당의 혁명이 세계인들의 이목을 놀라게 했으며 최근 10년 사이 소련이 거둔 성과는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에 마르크스레닌주의파의 사상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참신하고 감동적인 사조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의 찬란한 빛은 사회주의의 빛에 가려져버렸고 사유재산은 신성하다는 이론은 공산 및 계획경제의 유행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세계가 부러워마지않던 영국의 의회정치 역시 자본주의의 부산물로 폄하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가장 찬란했던 서구문명은 이런 새로운 평가 아래 모두 범죄로 변했고 피비린내와 함께 더럽혀졌다. 설령 중공에 반대하는 사상가일지라도 “마르크스주의가 날로 거대한 조류가 되어간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0년 간의 중국사상사 요강(一百三十年來中國思想史綱)》)
중공 ‘1차 대표대회’ 대표였던 주불해(周佛海)는 1941년 회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정말 꿈과 같았다. 당시 우리 몇몇 젊은 학생들이 이렇게 큰 혼란을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난 20년간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마을이 불타올랐고, 얼마나 많은 원기를 손상시켰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 몇몇 청년학생들이 심은 화근(禍根)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나라에 미안하고 인민들에게 미안하다. 나라가 지금 이 정도로 위험하고 열악한 상황에 처한 것에 대해 우리는 군벌과 관료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길 수 없으며 당시 가흥 남호의 작은 배에 탔던 몇몇 청년들(역주: 중국공산당 창립멤버들) 역시 아주 큰 책임을 져야 한다.”(《중공의 시작(中共之初)》)
공산당 창립을 이끌고 5번이나 중공 총서기를 역임했던 진독수는 만년에 《나의 근본의견(我的根本意見)》에서 “소위 무산계급전정이란 근본적으로 이런 게 아니며 바로 당의 독재이고 결과적으로 단지 영수의 독재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독재든 모두 폭력, 은폐, 기만, 탐오, 부패한 관료정치와 뗴어 놓을 수 없다!”라고 했다. 진독수는 또 “공산당이야말로 파쇼의 원조!”라고 지적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