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3. 당을 청리해 나라를 구하다
중공의 침투 전술
코민테른은 일찍이 1922년 4월 ‘중국공산운동에 관한 요강’에서 “마땅히 두 단계로 나눠서 해야 한다. 첫 번째는 봉건주의를 완전히 전복해 진정한 중국의 독립을 촉성해야 하며 두 번째로 유산계급의 정치를 뒤엎고 우리 손에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라고 중공에 지령했다. 이것이 바로 무장한 혁명으로 무장한 반혁명에 대항하는 것으로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다.
중국 주재 소련대사 카라한은 국민당 개조는 “우리의 영향 아래 있고” “우리의 위망(威望)에 대해 존경과 숭배로 가득하게 하며” “우리의 지시와 코민테른의 결의에 순종하게” 하는 것임을 명확히 표시했다. 코민테른 중국대표 보로딘은 서면 보고에서 “국민당의 모든 지방조직은 우리 수중에 장악되었다.”라고 했다. 중공중앙 주재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는 심지어 “점차 우파를 공격하는 계획”을 제정했다. (《1920년대의 중국》)
중공은 소련의 비호 하에 국민당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은 “국부(國父)께서 북상하신 후 공산당은 우리 당을 분열시킬 음모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군사학교 학생들을 분열시켰으며 더 나아가 군사학교를 탈취하려는 의도가 더 명확해졌다.”고 지적했다.(《중국 안의 소련》)
손중산이 북경에서 서거한 후 왕정위(汪精衛)가 코민테른의 전폭적인지지 하에 국민당 영도인이 되었다. 1925년 7월 1일 광동국민정부가 설립되었고 왕정위는 카라한과 보로딘의 지원하에 국민정부 상무위원회 주석 및 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1월 23일 중국 국민당의 우파 지도자 대계도(戴季陶), 임삼(林森) 등이 손문의 시신이 묻힌 북경 서산 벽운사에서 좌파에 반대하는 ‘서산회의(西山會議)’를 개최해 왕정위 정권의 좌경화에 반대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국민당 침투를 가속화해 국민당 영도권을 탈취하려 했다.
1926년 1월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는데 256명의 대표 중에서 중공 당원과 좌파가 5분의 3을 차지했고 당선된 36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7명이 공산당원이었다. 곧이어 개최된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선출된 9명의 상무위원 중 4명이 공산당원이었다.
또 8개 부서 중 조직부, 선전부, 농민부 및 외사부(外事部)를 공산당원이 장악했고 나머지 4부 중 청년부, 노동자부, 상업부, 부녀부의 비서 역시 전부 공산당원이었다. 대회는 반공의 입장에 선 ‘서산회의파’를 탄핵함과 아울러 그 지도부인 추로(鄒魯)와 사지(謝持)의 당적을 박탈했다. 중공의 ‘침투전술’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이제 국민당은 몹시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국민당 중앙의 권력은 이미 기본적으로 공산당원들에게 찬탈되었고 국민당 각 지방의 당부(黨部) 역시 대부분 공산당원들에게 장악되었으며 국민혁명군 6개 군의 정치주임 중 5명이 공산당원이었다.
중공은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를 열자고 주장해 우파를 공격하고 중립파를 고립시키며 좌파를 확대하는 동시에 날로 우파에 가까워지던 장개석을 공격할 목적이었다.”(《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신우파의 투쟁(中國共產黨同國民黨新右派的鬥爭)》)
장개석은 당시 군사업무에 바빠 당쟁을 피해왔었다. 하지만 ‘광동을 평정’한 군사영웅 장개석은 국민당 내 여러 세력들이 서로 포섭하려고 다투는 대상이었다. 그는 이때 9인 상무위원에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민당 지도부에 진입했다. 보로딘과 중공의 약진에 맞서 장개석은 대책에 고심했다.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개석은 북벌을 추진해 국부의 유언을 실현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그의 북벌 제안은 명분도 좋고 이치에도 맞았기 때문에 보로딘이나 왕정위도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얼마 뒤 보로딘이 업무보고를 위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대신 파견된 소련군사고문단장 키산카(본명은 발레리안 쿠이비셰프)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고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북벌을 강력히 반대하며 장개석과 충돌했다. 키산카는 황포군사학교에서 ‘북벌필패론’을 주장하면서 교장인 장개석이 ‘혁명을 하지 않는다’며 선동했다.
중공은 소련의 요구에 협력해 광주에서 전단지를 살포하면서 장개석을 ‘신군벌(新軍閥)’로 공격했다. 장개석은 왕정위를 찾아가 혁명의 실권이 소련 사람들의 손에 떨어졌다며 통렬히 비판했고 심지어 왕정위에게 키산자를 몰아내야 한다면서 만약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자신은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중공과 깊이 결탁한 왕정위는 장개석의 요청에 대해 명확히 답변하는 대신 차일피일 시간만 끌었다. 장개석은 자신이 이미 왕정위와 소련의 결탁에 장애가 되어 위험한 지경에 처했음을 깨닫고 내심으로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는 일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민국 15년(1926년) 3월 5일 : 한 자루 총에 필마로 앞으로는 호랑이 뒤로는 이리를 둔 위태로운 상황이 바로 오늘 나의 환경이다. 총리와 여러 선열들의 영령이 하늘에 있다면 마땅히 내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동정하고 가호해주실 것이다.
3월 15일 : 우환과 의심이 이미 극에 달했다. 사람을 씀에 있어 말과 안색을 살피지 못한 것을 스스로 후회한다. 끝내는 핵심에서 곤경에 처하니 천하 일을 할 수 없구나.
3월 17일 : 오전 공무를 논하면서 받은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차마 말로 할 수 없고 또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생활이 이에 이르렀으니 부처님이 지옥에 들어간 것과 무엇이 다르랴?”
중산함 사건
1926년 3월 18일 해군 대리국장이자 공산당원인 이지룡(李之龍)이 교장(장개석) 명의를 도용해 무단으로 장개석이 타던 중산함(中山艦 전에 손문이 탔던 영풍함의 이름을 고친 것)을 광주에서 황포로 몰고 왔다. 장개석을 위협하기 위한 의도였다.
“3월 18일 해군대리국장 이지룡(공산당원)이 명령을 고쳐 내가 타던 중산호를 광주에서 황포로 몰고 왔다. 그는 군사학교 교육주임 등연달(鄧演達)에게 ‘교장의 명령을 받고 배를 움직여 특별히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때 나는 광주시내에 있었는데 등 주임이 전화로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왔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망연자실했다. 뒤이어 이지룡도 전화를 걸어 ‘중산함이 광주로 영접하러 나갈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다. ‘누가 중산함을 황포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나?’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지룡은 황포로 오기 전에 미리 석탄을 가득 실어 장거리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19일 저녁 중산함이 광주로 돌아왔을 때 배 위에서는 밤새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경비가 아주 삼엄했다. 나는 이곳에서 공산당의 음모가 발생할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단지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를 해치려한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들의 의도가 대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나중에 반란을 평정한 후에야 그들의 계획이 바로 배를 타고 광주에서 황포군사학교로 가는 도중에 나를 협박해 광동을 떠나게 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데려간 후 소련으로 소환하려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이 국민혁명을 구실로 ‘무산계급 전정(專政)’을 실행하는데 유일한 장애였던 나를 제거하려던 것이다.”
“19일 밤 나는 혁명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다면 개인적인 목숨 따위는 아까울 게 없지만 당과 혁명의 존망을 위해 더는 주저할 수 없다고 보았다.”(《중국 안의 소련》)
3월 20일 마침내 결단을 내린 장개석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지룡을 체포하고 공산분자들의 무기를 몰수한 후 중산함을 회수했다. 아울러 소련고문단과 중공기관들을 포위했고 군사학교에서 중공 당원들의 직위를 박탈했다. 장개석의 과감한 조치는 공산당의 전열을 흔들어놓았다.
소련에 돌아가 있던 보로딘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즉각 키산카와 다른 고문단을 귀국시키고 4월 말에 광주로 돌아왔다. 보로딘은 장개석에게 사과하고 장개석이 제안한 중공을 제한하는 8개 조항의 협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한편, 지도력을 상실한 왕정위를 병 치료를 핑계로 멀리 프랑스로 떠났다. 장개석은 국민당 영도권을 장악했다.
장개석의 정당한 자위(自衛)행동은 명분이 충분했기 때문에 심지어 중공 영수들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독수(陳獨秀)는 1926년 4월 3일과 6월 4일 《향도(向導)》에 연속으로 몇편의 문장을 발표해 이렇게 지적했다.
“장개석은 중국민족 혁명운동의 기둥이자 주춧돌이다. 공산당이 만약 제국주의의 도구가 아니라면 절대 중국혁명세력의 통일을 파괴하는 이런 정책을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
“황포군사학교 설립에서부터 3월 20일까지 장개석에게 단 한건이라도 반혁명적인 행동을 찾아내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이 만약 장을 쓰러뜨리려는 음모를 했다면 마땅히 일어나 공산당을 타도해야 하며 공산당원이 만약 장을 음모로 쓰러뜨리려 했다면 마땅히 총살시켜야 한다.”(《진독수전(陳獨秀傳)》)
소련 측에서도 키산자 등 고문을 비난했다. “그들이 경거망동했다.… 그들은 국민당이 만약 광동에서 실패하면 공산당도 생존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진립부회고록(陳立夫回憶錄)》)
중산함 사건에 대한 과감한 처리는 장개석이 소련-중공-왕정위 동맹과의 대결에서 거둔 최초의 실질적 승리였다. 장개석은 공산당에 반대해 나라를 구하는 첫걸음을 힘차게 내디뎠다.
공산 부체(附體)의 침투
장개석은 1926년 5월 14일 일기에서 “공산당측에 제출한 조건이 비록 가혹하긴 하지만 큰 당이 작은 당의 당내활동을 허락한다면 이는 스스로 멸망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1926년 북벌을 개시한 후 소련은 중공에 “중공 당원들은 국민정부의 기관을 이용해 농민에게 접근해 소위 ‘농촌강령’을 실현하고 소위 ‘농민혁명’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목적은 바로 농촌폭동 중에서 무력을 조직해 공산당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보이틴스키(중국이름 오정강吳廷康)이 코민테른에 올린 보고서에는 “공산당이 실제로 국민당을 영도하고 있으며 작디작은 공산당이 국민당 기구 중에서 국민당을 조직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공산당의 영향이 너무 커서 두 당간의 경계를 짓기란 아주 곤란하며 거의 모든 영도권은 다 공산당원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고 했다.
북벌 기간에 코민테른은 중국군대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중공 군사방면을 지도함에 있어 코민테른 중국대표는 군대의 정치공작을 아주 높은 정도로 끌어올려야 하며 국민당 군대 속에서 정치공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당내에서 전문적으로 일부 사람들을 선발해 국민당 명의로 이런 공작에 종사하게 하면서 실질적인 영도권은 공산당원의 수중에 장악했다. 국민당 군대 기층(基層)에 공산당 지부를 설립하고 국민혁명군 각 사단에 정치기구를 설치했으며 심지어 연대 단위에 이르기까지 이런 공작을 하는 정치위원을 두었다”(《코민테른-소련공산당 비밀문서와 중국혁명사신론》)
“추로(鄒魯 국민당 우파인사)에 따르면 북벌군이 장강에 이른 후 코민테른은 중공측에 ‘장개석을 타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무한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연합해 ‘당권(黨權)강화’ 연구회의를 개최해 장개석의 ‘군권(軍權)’을 누르려 했다. 장개석 동지는 처음엔 이에 대해 깨닫지 못하다가, ‘장개석 타도’ 구호가 호남과 호북에 널리 퍼진 후에야 비로소 크게 깨달았다.”(《진명추회고록(陳銘樞回憶錄)》)
1926년 12월 13일 “보로딘이 마침내 무한에서 일부 중앙위원과 국민정부위원회 위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어 소위 ‘연석회의(聯席會議)’라는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서겸(徐謙)을 주석으로 삼아 소위 ‘당의 최고직권’을 집행하게 했다.”(《중국 안의 소련》)
얼마 후 유럽에서 돌아온 왕정위가 무한정권을 맡았다. 한편 장개석을 지지하던 당원들은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면서 ‘영한분열(寧漢分裂 역주: 영한이란 남경의 옛 지명 강령江寧의 영과 무한의 한을 말한다)’이 형성되었다.
“왕정위는 상해에 와서 진독수와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일체 피압박계급의 민주독재를 조직해 반혁명을 제압하자고 주장했다.”(《중국 안의 소련》)
혼란한 와중에 공산당은 거짓과 이간질을 통해 국민당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한편 여러 가지 사단을 일으켜 호남과 호북에서 ‘농민운동(農民運動)’을 책동해 살인, 약탈, 사기, 갈취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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