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중국 소수민족의 신전문화(2): 신은 세 종류의 사람을 창조했다

【정견망】

(2) 신이 세 종류의 사람을 창조

인류의 탄생에 관해 세계 각 지역 민족의 사시와 고시 중에는 모두 신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족(彝族)의 서사시 《매갈梅葛》 (운남 초웅楚雄 이족 자치주에 전해지는 고대 서사시)에는 신이 인류를 창조하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일찍이 세 종류의 인류를 창조했다고 한다.

”천지만물을 다 만들고 격자천신(格滋天神)이 와서 사람을 만들었다. 하늘에서 세 번 눈을 뿌리자 땅에 떨어져 3대(代)의 사람으로 변했다.

처음에 뿌린 것은 외다리인(獨腳人)이었는데 키가 한 자 두 치(약 40센티미터) 밖에 불과해 혼자서는 걸을 수 없고 두 사람이 손으로 목을 안고 가면 나는 듯이 빨랐다. 먹는 것은 진흙이었으며 반찬은 모래였다. 달이 비추면 살 수 있었으나 태양에 쬐면 살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생존할 수 없어 말라 죽었다.

두 번째 뿌린 사람은 키가 한 장 삼 척이었다. 이 시기 사람들은 나뭇잎을 두르고 숲속의 과일을 먹었으며 동굴에 살았다. 사계절은 구분이 없었고 하늘에는 9개의 태양과 달이 있었다. 활동을 하다 졸리면 잠을 자는데 한번 자면 수백 년을 자서 몸에서 푸른 이끼가 자랐다. 이 사람들은 말라 죽었다.

격자천신은 왼손에 끌을,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태양과 달을 쪼아 만들어 각자 하나씩 하늘에 남겨놓았다. 그 후 사계절이 구분되고 풀과 나무가 자라나도록 했다.

세 번째 사람을 뿌렸다. 사람의 두 눈이 아침에 생겼다. 격자천신은 메밀 세 줌을 쌀알 위에 뿌리고 곡식을 석산령(石山嶺)에 뿌리고 보리 세줌을 수연산(壽延山)에 뿌렸다. 보리에서 싹이 나고 좁쌀에서 싹이 나고 메밀이 자라났다. 불이 없었는데 하늘에서 용이 부싯돌 두 개를 세 번 때리는 방법을 생각해내어 이때부터 불이 있게 되었고 무엇이든 다 있어서 살기 좋았다.”

이 부분의 서사시에는 신이 일찍이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인류를 장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천상에서 세 번 눈을 뿌렸는데 땅에 떨어져 3대인이 되었다.”는 문장에서 “눈”과 “번식”은 이족의 발음으로 모두 ‘악(喔)’이 된다. 즉 여기서 “눈(雪)” 두 가지 뜻을 지녔다. 이족 문장에서 눈이란 바로 번영하는 내원 혹은 생명의 내원이 된다. 처음의 두 종류 사람 즉 “대인과 소인은 둘 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었다. (그림1) 세 번째 인류를 창조하는 과정에 신도 그들 생존환경을 조정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남았다. (아래의 서사시에 이 무리의 사람이 도덕이 패괴되어 신의 징벌을 받게 된다. 후편을 보라)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중의 소인국과 대인국

운남의 민간에 어느 나무꾼이 ‘봉두국(棒頭國)을 돌아다닌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여기서도 매우 오래전에 대인, 중인, 소인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우주 사이에 상중하 삼층으로 나뉘었다. 상층은 천상(天上), 중층은 지상(地上), 하층을 지하(地下)라 불렀다. 각층마다 사람도 달랐다. 천상의 사람은 몸이 집채만큼 크고 키가 대나무 장대만큼 높아서 ‘죽간인(竹竿人)’이라 했다. 지상의 사람은 몸이 방아공이만 했고 키는 멜대만 했고 ‘편담인(扁擔人 역주: 편담이 멜대란 의미)’이라 불렀다. 지하의 사람은 몸이 손바닥만큼 작았고 키도 약초를 두드리는 방망이만해서 ‘봉두인(棒頭人 역주: 봉두는 구어로 몽둥이나 방망이란 뜻)’이라 불렀다.

어느 날 지상에서 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 실수로 칼(柴刀 역주: 나무꾼이 나무할 때 쓰는 큰칼)이 동굴 안으로 떨어졌다. 그는 동굴로 내려가 칼을 찾으려고 했다. 그가 들어갈수록 동굴은 깊어졌고 동굴 속이 컴컴하여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꾼이 조급하게 찾을 때 갑자기 먼 곳에 희미한 불빛이 보여 그쪽으로 더듬어 갔다. 갑자기 발이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는데 지하세계로 떨어져 내려갔다.

나무꾼은 땅에 떨어져 기절했다. 그가 깨어났을 때 그곳에도 산이 있고 강이 있었으며 온갖 풀과 나무 및 각종 동물과 새, 벌레 등이 있었고 ‘지상’ 세계와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나무꾼이 봉두국에 떨어진 일이 그 나라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국왕은 큰 수탉을 타고 그를 보러왔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비록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표정으로 보아 국왕은 그를 신선이 떨어져 온 것처럼 존중했다.”

이런 훌륭한 서사시와 민간고사는 결코 헛되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오랜 세월 중에 줄곧 이족 선조들에게 전승되어 불리고 있다. 무신론에 세뇌된 현대인들은 그것을 동화로 여긴다. 사존께서 2003년 설법에서 인류는 “대인, 중인과 소인”이 있던 시기를 지나왔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비로소 활짝 깨달았다. 알고 보니 이족의 창세 서사시에 기록된 일이 진실한 역사였구나. 사존께선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체로 이 지구의 1억 년은 두 개의 큰 시기로 나누는데 5천만 년이 한 시기이다. 전 5천만 년은 대인(大人), 소인(小人), 중인(中人)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기였다. 대인(大人)은 평균 5미터였고, 중인(中人)은 현재 우리 오늘날의 인류인데 평균 2미터가 되지 않았고, 소인(小人)은 불과 몇 치(寸)였다. 당시 신(神)이 사람을 만들 때 어찌하여 동시에 이 세 종류 사람을 만들었는가? 이는 이 세 종류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지구에서 최후의 그 일보까지 생존하고, 법을 얻는 데에 적합한지 실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5천만 년의 과정 중에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세계에 대한 사람의 인식능력을 키우고, 한편으로는 어느 종류의 사람을 남길 것인가를 확정 지어 왔다. 최후에 대인(大人)은, 그의 신체가 크므로 지구에서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단축되고,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아지며, 대인의 물질자원 소모와 지구자원의 비례도 조화롭지 않아 적합하지 못함을 발견했다. 나중에 발견하였는데 소인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지구 전반은 모두 삼림(森林)으로 뒤덮여 토지 한 뙈기도 없었는데, 그가 개간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았는바, 만약 오늘날의 이러한 문명을 창조하게 한다면 그들로서는 몹시 어려웠다. 동시에 지상(地上)의 시간도 소인으로서는 지나치게 길었고, 거리도 지나치게 길었으며, 소인이 대양(大洋)을 횡단하려면 그것은 정말 너무 어려웠으므로 소인도 적합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어 대인과 소인은 도태되었다. 한 번에 도태된 것이 아니며 5천만 년 이후부터 시작하여 점차 역사에서 도태되었다. 대인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진 것은 2세기 전으로, 다시 말하여 2백여 년 전 대인은 비로소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소인은 7, 80년 전까지도 본 사람이 있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그러나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고 일부는 다른 공간으로 갔고 일부는 지하로 갔다. 그들은 도태인(淘汰人)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과 접촉하지 않는다.”(《북미순회설법》)

사실 소인과 대인이 한때 존재했다는 증거는 이미 과학계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2004년 10월 고인류학 전문가들이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의 어느 섬 동굴 속에서 여덟 구의 사람 뼈를 발견했다. 키는 3.5척(약 1미터)에 두개골은 포도송이만 했고 대뇌는 현대인에 비해 3분의 2 정도였다. 연대를 측정해보니 지금부터 1만 8천 년 전이었다.

또 베를린 대학 고고학자들이 멕시코 중부의 한 동굴에서 12센티미터 크기의 소인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측정해보니 이 유해는 이미 성년이었고 지금부터 5천 년 전이었다. 이런 소인의 발견은 인류가 진화해왔다는 가설을 완전히 뒤흔드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고인류학 전문가 제이콥(Jacob) 교수가 200411월 가자마다(Gadjah Mada) 대학에 전시한 2003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에서 발견한 소인Homo floresiensis)

2016년 8월 한 촬영팀이 중국 귀주 평암촌(平岩村)에서 거대한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길이 57cm 폭 20cm 깊이는 3cm였다. 정상인 남자 발의 평균 길이가 18cm이고 여자는 16.5cm임을 감안하면 발자국 주인의 키가 정상인의 세배 이상이란 의미다. 화학 실험을 해보니 이 암석의 족적은 사전(史前)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림 3)

 
중국 귀주 평암촌에서 발견된 거인 발자국

소인과 대인 외에도 사존께서는 일부 설법에서 다른 인종에 대해 말씀하셨고 끊임없이 우리의 사유와 용량을 확충해주셨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많은 신화 전설은 모두 진실한 역사기록이며 인류 역사 중 여러 차례에 걸쳐 반신반인(半神半人) 시대가 나타났으며 각종 부동한 생명형상이 나타났는데, 이는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명에 대한 인식을 끌어올리게 하신 것이다. 단지 무신론과 진화론이 사람의 정상 사유를 완전히 혼란시켜 사람을 물질세계 내에 국한시켜 방향을 잃게 했을 뿐이다. 소수민족 문화 중에도 꽤 많은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족의 창세서사시 《사모(查姆)》와 《아흑서니마(阿黑西尼摩)》에도 신이 몇 가지 종류의 인류를 창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각각 독안인(獨眼人 눈이 하나), 직안인(直眼人 혹은 수안인豎眼人 눈이 수직이라는 의미)과 횡안인(橫眼人 눈이 수평이라는 의미)이다.

독안인은 키가 한 자 두 치, 직안인은 한 장 삼자였는데 모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었고 세 번째인 횡안인은 “6조 12세(六祖十二世)”의 매우 긴 시기를 거쳤다. 제12대가 되었을 때 신은 보통사람으로 변하여 인간세상에서 인심을 시험해보았다. 이 시대의 사람은 도덕이 부패하여 신은 홍수를 내려 만물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했고 단지 마음씨 착한 한 남매만을 남겨 그들이 대홍수를 피하여 후대를 번영하도록 인도했다.

독안인의 기록에 대해서는 이족 서사시 말고도 다른 저명한 중국 역사문헌에 적어도 5번 나타난다. 《산해경》 《해외북경》에는 “일목국(一目國)은 동쪽에 있는데 한 개의 눈이 얼굴에 있다” (그림 4)고 되어 있다. 또 《회남자》에는 일목국이 해외 36국 중 하나라고 되어 있다. “그 백성을 일목민(一目民)이라 하는데 눈 하나가 얼굴 정면 가운데 있다.”고 했다.


산해경》 〈해외북경일목국은 동쪽에 있으며 하나의 눈이 얼굴에 있다.”

기원전 7세기의 고대 그리스 시인 아리스테아스는 흑해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알타이 산에 도착하여 일목인을 보았다. 당시 일목국은 다른 한 갈래의 매우 발달한 그리핀 인과 싸우고 있었는데 그리핀 인은 황금의 수호자였다. 당시 그의 여행견문을 엮어 《독목인(獨目人)》이란 책을 만들었다.

기원전 5세기 역사의 아버지 헤르도토스는 《역사》에서 중앙아시아 북부 지역을 묘사했는데 3개의 민족에 대해 기록했다. 즉 대머리 알지파인, 이사이둔인(伊賽頓人) 및 눈이 하나인 아리마스푸인이다. 이들은 각자 카자흐스탄 구릉, 이리하와 초하 유역, 알타이 산록 기슭에 분포되어 있었다. 명나라 만력 연간 이탈리아 전도사 마테오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에는 《일목국》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그림 5)


마테오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에 표시된 일목국의 위치.

이런 기록들에 근거해 1965년 북경대학 고고학과 출신의 왕명철(王明哲) 연구원이 신강 알타이 산에서 연구를 했다. 현지인들은 그를 “독목국 산곡(山谷)”이란 곳에 데려가 4,5천 년 전 독목국이 있던 자리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사슴 도안이 대량으로 새겨진 거대한 돌 언덕을 발견했으며 현지인들은 이곳이 독목인들의 묘지라고 알려주었다. 비록 현재는 아래에 묻힌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독목국의 전설은 의심할 바 없다.(그림7)


1965
년 북경대학 고고학과 출신의 왕명철 연구원이 신강 알타이산 독목국 산곡에 와서 조사하고 있다.


신강 삼해자(三海子) 목장 독목국 산곡의 대형 바위 언덕.

그렇다면 수안인은 어떤 모습일까? 어느 날 삼성퇴에 가서 한 청동상을 본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 아마 이것이 수안인이 아닐까?(그림 8)


삼성퇴 유적 중 수안인 청동두상

여러분들도 나와 같은 의견일 것이라 믿는다. 이 청동상을 보지 않은 사람은 ‘수안인’의 형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면 4천여 년 전의 고대인들이 만약 진짜 사람을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모습의 청동기를 주조할 생각을 했을까? 갑골문 ‘촉(蜀)’자와 마찬가지로 바로 하나의 거대한 눈이다. (그림9)

촉나라 문명은 ‘눈(眼睛)’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일설에는 고대 촉나라 선조를 서강(西羌)인이라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서강인의 후예인 이족과는 원류가 같다. 삼성퇴의 수안인 청동상이 제사를 지낸 대상이 아마도 이족 서사시에 기록된 ‘수안인’ 시대의 선조일 것이다.


갑골문 ()’은 바로 하나의 큰 눈이다.

많은 고고학적 발견들이 모두 ‘진화론’에 굳어진 현대인들의 대뇌를 충격하고 있다. 선조들이 천만 년 간 대대손손 불러온 서사시가 역사의 공간에 메아리치면서 오늘처럼 진리의 음성이 다시 나타날 때 우리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진리의 표준은 대체 무엇인가?” 겨우 200년에 불과한 진화론이 이 모든 현상을 똑똑히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한 것은 ‘무신론’의 기점에 선다면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방법이 없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