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4.12’ 청당(淸黨)
1927년 4월 2일 중국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소집해 ‘청당원칙’을 정하고 ‘청당위원회’를 조직해 반공청당(反共清黨 역주: 국민당 내에서 공산세력을 숙청하는 작업)을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4월 5일 스탈린은 크레믈린 궁에서 3천의 간부당원들에 대한 연설에서 “장개석은 아직 명령에 복종하고 있다. 국민당은 하나의 연합체로 혁명의회와 비슷하며 우파, 좌파 및 공산당원을 포함한다. 왜 갑자기 습격하는 방법을 사용하려 하는가? 왜 우리가 아직 대다수를 점유하고 또 우파가 우리말을 따르는데 우파를 몰아내려 하는가? 오직 쓸모만 있다면 농민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피로하다고 해서 말을 버리진 않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우파가 우리에게 쓸모가 없어질 때가 되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에겐 우파가 필요하다. 우파 중에도 쓸모 있는 사람이 있고 그들은 군대를 지휘하고 군대를 이끌어 제국주의에 반대한다.”
“장개석은 아마 혁명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군대를 영도하고 있고 또 군대를 이끌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 우파 인사와 장작림(張作霖)의 장군들에겐 각종 연계가 있으며 어떻게 해야 그들의 예봉을 꺾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불필요하게 맹렬히 공격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을 압박해 완전히 혁명 이쪽에 서게 하면 된다. 이들 우파는 또 부유한 상인들과 연계되어 그쪽에서 자금을 모집할 수 있다. 이에 이들 우파를 완전히 이용한 후에야 깨진 레몬처럼 버릴 것이다.”
(피터 웨이랜드,《중국에 다가가다(走進中國)》)
이후 트로츠키는 “며칠 후 깨진 레몬이 당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통제했다.”면서 스탈린을 비판했다. 여기서 그가 가리킨 것이 ‘4.12’ 사변이다.
청당(淸黨)은 사실 중국인들의 요구였다. 1927년 3월 28일 채원배(蔡元培), 오치휘(吳稚暉), 장정강(張靜江), 이석증(李石曾) 등은 중공이 모반했으니 당연히 규찰하고 ‘호당구국운동(護黨救國運動 당을 수호하고 나라를 구하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채원배는 공산당원을 국민당에서 깨끗이 제거하자고 건의했다.
4월 2일 중국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에는 전체회의를 소집해 ‘청당원칙’을 정하고 ‘청당위원회’를 조직해 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북벌(北伐)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 장개석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사람들은 국민당 내의 공산당원들을 숙청해 중공과 결별하기로 결정했다. 1927년 4월 12일 상해에서 중공이 통제하던 노동자규찰대를 기습해 중공당원들을 수배하고 체포했다.
이튿날 장개석은 “중정(中正)은 중국민족은 당연히 중국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계통에 있어 그 어떤 외국의 조종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또 지금 우리 당을 공산당과 분리하지 않으면 국민혁명을 성공하기 힘들다고 확신한다.”라고 했다.
(《중국국민당 동지들에게 알리는 글(告中國國民黨同志書)》, 1927년)
4월 17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는 청당을 알리는 공개 전보를 발표하고 197명의 공산당원을 수배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보로딘, 진독수였고 그 다음이 임백거(林伯渠), 구추백(瞿秋白), 모택동, 운대영(惲代英), 주은래, 유소기, 장국도(張國燾), 팽배(彭湃), 등영초(鄧穎超), 채화삼(蔡和森), 방지민(方志敏) 등이었다.
장개석은 4월 18일 국민정부의 수도를 남경(南京)으로 정하고 민중들에게 알리는 글에서 떨쳐 일어나 청당한다고 발표했다. 장개석은 국민들에게 “지금 중국민족에게는 오직 3갈래 길만이 있다. 하나는 다시 군벌의 치하로 돌아가 그들이 제국주의와 결탁하게 하여 아무런 방법도 없고 목적도 없이 개인의 권리를 위해 계속 전쟁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산당원을 따라 외국 특수단체의 지휘를 받아 적색테러와 독재를 실행하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국민당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정정당당한 큰 길이다. 자신의 역량을 사용해 자신의 이익을 꾀하며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알렸다.(《남경을 수도로 세우고 전국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建都南京告全國同胞書)》, 1927년)
4월 21일 장개석은 《전 장병들에게 알리는 글》에서 왕정위와 공산당이 결탁한 죄상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우리 국민혁명군이 강서에서 목숨을 걸고 혈전을 벌일 때 공산당은 바로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에서 반란을 배치하고 있었다. 또 우리 전방의 병사들이 절강 강소의 전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울 때에도 무한측은 일부러 트집을 잡으며 우리에게 단 한 푼의 돈도 주지 않았고 단 한발의 총알도 주지 않았다.”
“최근에 그들은 또 우리 국민혁명군 장병들을 이간시킬 흉계를 꾸미며 도처에서 거짓말을 날조해 중정이 독재를 하려 하며 바로 신군벌이라고 한다.”
“그들은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본래 총사령관은 우리 당을 수호하고 삼민주의를 실행해야 하며 공산당의 교란을 허락하지 않는다.…그러므로 공산당이 중국을 멸망시키려면 우선 국민혁명을 파괴해야 하며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장개석)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휘 하에 중공은 8월 1일 ‘남창폭동(南昌暴動)’을 일으켰지만 곧 실패했다. 이후 잔여병력들이 광주(廣州)로 도망갔다. 12월 광주에서 다시 폭동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국군은 소련 부영사 등을 체포했고 또 영사관 안에서 소련이 중국에서 폭동을 사주했다는 비밀문건을 찾아냈다. 12월 14일 국민정부는 정식으로 소련과 단교를 선언했다.
장개석은 “공산당은 사실 우리 국민당의 유일한 적으로, 국민혁명을 파괴하고 삼민주의의 실행을 저애했다. 우리가 국민혁명을 성공시키려 한다면 공산당과는 병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우리의 유일한 적을 인식하자(認識我們唯一的敵人)》, 1927년 5월 7일)
1927년 4월 18일 장개석이 영도하는 남경 국민정부가 설립되어 왕정위가 이끌던 무한의 국민정부와 대립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영한대립(寧漢對立 여기서 寧은 남경 漢은 무한을 뜻한다)’이라 한다.
왕정위는 공개적으로 4.12 청당에 반대하면서 장개석의 당적을 박탈하고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영한이 분열되었 남경과 무한에 국민당 중앙이 따로 존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왕정위는 스탈린이 코민테른에 내린 비밀명령인 소위 ‘오월 지시’를 보게 된다.
다음은 왕정위의 말이다.
“그 결의안에는 몇 가지 아주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었다.
첫째는 토지개혁을 말했는데 국민정부의 명령을 거칠 필요 없이 아래에서부터 시작해 토지를 몰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호남사변이 발생한 원인이었고 농민운동이 국민당에서 떨어져나간 원인이다.
둘째는 군관과 사병의 토지는 이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몰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중국국민당 중앙위원회를 개조해야 하며 집행위원회 중에서 농민과 노동자 영수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공산당원을 증가시키려는 뜻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울러 공공연히 국민당의 현재 구조를 반드시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넷째는 무장한 2만의 공산당원과 선발된 5만의 노동자농민들을 무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노동자・농민은 사실 공산분자를 말한다.
다섯째 국민당 영수들이 혁명법정을 조직해 반공군관을 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당 영수가 공산당을 대신해 스스로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다.”(왕정위 《무한에서 중공과 갈라서게 된 경과(武漢分共之經過)》—1927년 11월 5일 광주 중산대학 강연)
왕정위는 이제야 처음으로 망상에서 깨어났고 자신이 이미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마침내 친공(親共) 입장을 포기했다. 7월 무한정부는 평화적으로 공산당을 청리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국군 내부의 공산당원들에게 공산당을 탈퇴하든가 아니면 파직한다고 했다. 하지만 왕정위는 여전히 장개석을 ‘당과 국가의 유일한 적’으로 보았다. 대국을 고려해 장개석은 8월에 다시 사직했다.
8월 7일 스탈린은 사태의 책임을 물어 보로딘을 소환하고 대신 자신의 심복인 로미나체(Beso Lominadze)를 파견했다. 로미나체는 한구(漢口)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해 모든 책임을 진독수에게 떠넘기고 구추백(瞿秋白)이 새로 중공중앙을 영도하도록 확정했다. 이 회의에서 확정된 방침은 토지개혁과 중국국민당에 대해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공은 중국 각지에서 100여 차례의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지역적으로도 14개 성 140여개 도시에 두루 미쳤다.
이렇게 되자 무한국민정부도 즉시 평화적인 공산당 분리정책을 포기했다. 8월 8일 왕정위는 국민당 중앙긴급확대회의를 개최해 공산당을 무력으로 분리하자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무한국민정부가 통제하는 구역에서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처결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왕정위는 “설사 1천명을 죽이더라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전면적인 청당이 진행된 후 대량의 중공당원들이 공개적으로 탈당했으며 중공당원 숫자가 6만에서 1만으로 줄어들었다. 도시에서 일으킨 중공의 무장폭동은 모두 참패했고 농촌이나 산간지대(山區)로 도망쳐 무장할거에 들어갔다.
1927년 연말 광주폭동이 발생한 후에야 왕정위는 비로소 자신이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왕정위는 이 때문에 책임을 지고 조용히 하야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당시 형제들이 보기에 장동지(蔣同志 장개석) 등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당시 장동지 등은 형제들이 저지하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무한으로 가려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무한동지들을 실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실망시켰다. 때문에 형제들이 무한에 간 결과가 어떠한지 기다리지 않고 남경에서 바로 (청당을)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이 무한에 간 결과는 모두 장동지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헛되이 장동지에 반대하는 세력을 증가시키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 때문에 사후비판에서 형제들이 장동지가 틀렸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이 틀렸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또 무슨 마음에 없는 말도 전혀 아니다.”(왕정위 《무한에서 중공과 갈라서게 된 경과》)
이때에 이르러서야 전체 국민당 계파들은 오직 이전에 압력을 받아 사퇴한 장개석만이 선견지명이 있었고 또 과감히 결단했음을 알았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퉈 장개석의 복직을 요청했다.
청당은 장개석이 공산당에 반대해 나라를 구한 첫 번째 총성으로 그 중요성은 북벌을 초과한다. 북벌은 군벌할거시대로 끝났지만 청당은 20세기 최초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큰 전투(大戰)의 서막을 연 것이다.
중공은 장개석의 청당은 “노동자 농민 및 저층지식인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4.12 반혁명정변은 중국의 계급관계와 혁명형세에 중대한 변화를 나타낸다.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당 반동파들이 민족자본가계급 우익을 완전히 대지주 대자본가계급의 대표로 전환시켰다.” “이 기간에 장개석은 제국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강절(江浙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인 절강성과 강소성)재벌 및 깡패세력과 일련의 비밀회담을 가졌다. 제국주의는 공공연하게 장개석에게 신속하고 과감하게 행동에 나서도록 격려해 장강(長江) 이남 지역이 공산당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 진상은 이렇지 않았다.
당시 중공의 소위 ‘노동운동’은 이미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개되었고 코민테른 대표 바우어는 당시 무한을 ‘로마 카니발’과 같은 상황이라고 묘사했다.
“수많은 탄광・공장 및 소규모 가내공장 노동자들이 앞 다퉈 업무를 중단하고 급진분자들의 지휘 하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서 연설하거나 선전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중공이 통제하던 호북성 당지부는 한구에서 대회를 소집했는데 대회에 참가한 노조규찰대가 “장개석 타도” 구호를 외쳤다. 이는 회의에 참가했던 군사학교 학생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중공측의 장개석 반대는 이미 공개화되었다.
바우어는 계속해서 “잦은 파업 때문에 무한 지역의 공업은 문을 닫을 지경에 처했다”고 묘사했다. 결국 중국 중부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하던 대도시 무한은 시장경기가 죽었고 경제도 일시적으로 멈춰 섰다.
나역농(羅亦農 역주: 노동운동을 지휘한 중공당원)이 쓴 《정치와 우리 당의 공작방침에 관한 보고》에서는 “노동자 지역에서는 구위원회(區委)가 적색테러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이래 이미 아주 큰 효과를 보았다. 적지 않은 노동자의 적을 때려죽여 노동자들의 기세가 아주 높아졌다. 지금은 이런 적색테러의 범위를 확대해 반혁명분자가 있다면 우파 지도자나 매판상인 또는 학생주구 등을 막론하고 가급적 모두 공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혁명의 고조시기로 민중들이 모두 이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적색테러의 실시는 혁명의 보장을 위해 몹시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우리에겐 위협수단이 필요하며, 많은 반혁명분자들이 감히 상해에 머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정신적인 적색테러라 할 수 있다.”라고 했다.
북양군벌 세력이 상해에서 물러나자 나역농, 조사염(趙士炎) 등이 주관한 중공 상해구위원회(上海區委)는 선전대강에서 “상해혁명의 시기가 완전히 도래했다.” “다만 지난 총파업에서는 다만 한차례 시위만 벌였지만 지금은 시기가 도래했다. 우리는 마땅히 신속히 큰 무장폭동을 준비해 무장자위권을 탈취하고 반동파를 살해해 죽은 사람들의 원수를 갚고 노동자를 위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상해노동자 3차 무장기의(上海工人三次武裝起義)》)
즉 이전 2차례 기의는 단지 파업시위에 불과했지만 세 번째 기의는 분명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중공 교과서에는 “시위대가 보산로(寶山路)에 이르렀을 때 장개석은 반동군대에게 비무장한 노동자들에게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하라고 명령했다.”고 선전한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장개석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고 시위대 역시 비무장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최전선에 선 자들은 노동자규찰대로 “상당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공이 통제하던 노동자규찰대는 개편을 거쳐 14개 대대 2700명의 군대로 변신해 있었고 이들은 20여 정의 기관총 및 4천여 정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시위대에 대한 군대의 발포 역시 남경에 있던 장개석이 명령한 게 아니라 수비부대가 사정이 다급해지자 자위차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제2사단 참모장을 지낸 축소주(祝紹周)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비적의 무리들이 청운로(青雲路)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는데 참가자가 1만 명을 넘었다. 단 장총을 회수했기 때문에 피해는 심하지 않았다. 때문에 선두의 비적무리가 보산로(寶山路)를 거쳐 본부로 직접 쳐들어왔지만 본부 수비대가 저지할 수 있었다. 다만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큰데다 모반할 음모를 지녔다. 대부분 철봉을 마구 휘둘러댔는데 중간에 적지 않은 총이 있어 우리 수비병 중 한 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수비병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당하자 나머지 무리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병력을 파견해 포위하고 7백여 명을 체포했는데 그들의 몸에는 모두 직예성 및 산동성 군대의 부호가 있었다. 조사해보니 흩어진 군벌의 잔병들이 공산당에 매수되어 질서를 교란하고 당과 나라를 혼란시키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이들을 어찌 진짜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가?”
장개석의 청당은 결과적으로 중국 사회질서의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중국이 당시 소련의 희생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만약 민국 15년(1926년) 3월 20일 광주 반란 평정과 민국 16년 4월 12일 전면적인 청당으로 중국의 통일과 독립이 우리 중국 국민정부의 지도하에 완성되지 못했더라면 그럼 우리 중화민국은 이 시기에 이미 볼셰비키의 실험장이자 소련의 부용국이 되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0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모스크바는 진작부터 1천2백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땅과 4억 5천만 인민을 통제해 그것들의 세계혁명전쟁을 위한 무궁무진한 기지와 자원으로 삼아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도전했을 것이다.”(《중국 안의 소련》)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