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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27): 내란 평정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4. 내란평정

1929년 1월 북벌을 마무리한 장개석은 곧 병력축소계획을 만들어 160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절반으로 줄이려 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 여러 계파들은 모두 자신의 실력을 보존하려 했기 때문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1929년 이종인(李宗仁)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중앙에 반기를 들었으나 장개석에게 패배했다. 이후 풍옥상(馮玉祥), 장발규(張發奎), 당생지(唐生智), 석우삼(石友三) 등의 군벌들 역시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했다.

1930년 3월에는 염석산, 풍옥상, 이종인이 연합해 중원전쟁(中原戰爭)을 일으켜 중앙에 대항했다. 장개석은 토벌명령을 내렸고 다섯 달 만에 반군들을 각개격파했다. 이해 9월 정세를 관망하던 동북의 강자 장학량(張學良)이 중앙을 지지한다고 선포하면서 내전은 장개석의 승리로 끝났다. 약 반년에 걸쳐 진행된 중원대전에서 양측에서 30여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내란과정에 중앙군이 피폐해진 반면 중공은 어부지리로 세력이 강대해졌다.

국가 분열

‘4.12’ 청당 이후 중공은 ‘남창폭동(南昌暴動)’과 ‘추수(秋收)폭동’을 일으켰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후 패잔병들은 정강산(井岡山)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다. 하지만 여러 차례 실패에도 불구하고 중공은 소련의 조종을 받아 계속해서 중국을 분열시켰다.

1929년 7월 봉천군벌 장학량이 소련이 차지하고 있던 중동로 철도를 회수하려다 소련과 충돌한 중동로(中東路)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은 동북지역에 차르 러시아가 남겨놓은 유산인 철도 등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투입해 살인, 방화, 약탈 등 침략을 자행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소련에 반감을 갖게 만든 이 사건에 대해 중공은 뜻밖에도 주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력으로 소련을 보위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중공 창립멤버 진독수마저 반대의견을 제출했지만 오히려 당적을 박탈당했다.

소련의 직접적인 지휘 하에 중공은 또 강서폭동(江西暴動)을 일으켰다. 장개석은 당시 역사를 회고하면서 “민국 16년(1927년) 중공 ‘8.7회의’를 지도한 로미나제는 소련의 폭동전문가였다. 당시 중공의 남창폭동, 산두(汕頭)폭동과 광주(廣州)폭동은 모두 그의 소련공산당 폭동이론과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이후 공비(共匪)들이 말하는 소위 ‘홍군(紅軍)’의 임무는 살인, 방화, 인질납치, 자금마련 및 군중선동이었다. 그것의 정치강령은 바로 지주를 살해해 토지를 분배하고 군중을 무장시켜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중국 안의 소련》)

1930년 8월 22일 장개석은 국민당 중앙에 보내는 전보에서 “홍수나 맹수처럼 백성을 괴롭히는 중국공산당이 다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쁜 가을을 틈타 멋대로 결탁하고 일을 꾸미고 있다. 이미 들판을 태우는 큰불로 번져 전국에서 가장 큰 우환이 되었다.”라고 했다. 장개석은 반드시 신속하게 중공을 제거해 후환을 없애야함을 잘 알고 있었다.

1930년 11월 중원대전이 끝나자마자 장개석은 강서(江西) 소비에트 지역에 병력을 배치해 제1차 비적토벌에 나섰지만 홍군을 뿌리 뽑진 못했다. 1931년에는 또 제2차 및 제3차 비적토벌전쟁을 일으켰지만 국민당의 내란과 ‘9.18’ 만주사변이 발생하는 등의 원인으로 중도에 멈춰야 했다.

한편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에 의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중공은 학생들을 선동해 혼란을 야기하게 했다. 국민당은 내부모순이 심화되어 호한민(胡漢民), 왕정위(汪精衛), 손과(孫科 손문의 아들) 등이 장개석에 반대해 반장(反蔣)연맹을 결성했다. 당내의 영월분열(寧粵分裂 역주: 寧은 남경 越은 상해를 지칭한다. 이 당시 중공 본부가 무한에서 상해로 옮겨왔다) 국면을 막기 위해 장개석은 12월에 다시 국민정부 주석과 행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32년 ‘1.28’상해사변이 터지면서 일본군이 상해를 침공하자 남경마저 위태로워졌다. 1월 29일 국민당은 임시 중앙정치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장개석에게 중앙으로 돌아와 군사업무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나라를 분열시킨 중공은 날로 기고만장해졌다. 1931년 12월 중공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포고’를 통해 “지금부터 시작해 중국 영토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하나는 중화민국으로 제국주의의 도구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다.”라고 선포했다. 공공연하게 ‘두개의 중국’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1932년 3월초 장개석은 새로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5성 비적토벌회의를 주관해 “제4차 비적 위초(圍剿 포위 토벌)계획을 확정한 후 먼저 예악환(豫鄂皖 예는 호북성 악은 하남성 환은 안휘성) 3성의 비적군대부터 착수하기로 결정했다.”(《중국 안의 소련》)

1933년 2월 발동한 제4차 포위토벌 역시 실패로 끝났지만 비적토벌에 대한 장개석의 결심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는 “고인(古人)은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안부터 평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의미는 바로 먼저 내란을 평정하고 나서 외침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침략은 외부에서 온 것으로 마치 피부 위에서 서서히 썩어가는 종기 독과 같지만 토비(土匪)들의 교란은 안에서 발생한 것으로 마치 내장이 병든 것과 같으니 실로 심복(心腹)의 우환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질환을 없애지 않으면 외부의 병을 제대로 치료할 수 없다.”(장개석 《혁명군의 책임과 안내양외(革命軍的責任是安內與攘外)》)

1933년 장개석은 여산군관훈련단(廬山軍官訓練團)을 설치해 공비토벌을 담당할 핵심요원들을 훈련시켰다. 이렇게 하자 공산당의 강서(江西) ‘근거지’에 대한 국민정부의 포위토벌은 점차 진전이 있었다.

공비 토벌은 사람을 구하는 일

장개석은 1933년 제2기 여산군관훈련단 개학식 훈화에서 공산당에 대해 5천 년 간 역대 성인과 철인들이 제창한 사람의 도리를 훼멸시켜 중국인들을 모두 불충(不忠)불효(不孝)하고 예의라곤 전혀 없는 금수(禽獸)로 만들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공비토벌은 사람을 구제해 새로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다시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금수라 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여러분들이 주지하다시피 우리 중국에는 고대부터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이 있다. 사람의 겉모습을 갖췄지만 금수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생각과 정신 및 모든 행동이 완전히 금수와 같다는 뜻이다.”

“토비들은 단순히 살인방화, 간음, 약탈로 일반 백성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더러 조상을 공경하거나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형제에게 우애하지도 말고 나라와 민족은 필요 없으며 예의염치(禮義廉恥)는 따지지도 말라고 하면서 중국 고유의 도덕윤리와 역사를 훼멸하고 있다.”

“공산당은 우리 중국인들을 모두 불충(不忠)불효(不孝)하며 예의도 모르는 금수로 만들려 한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사람조차도 될 수 없다! 중국인들을 모두 금수처럼 행동하게 만들려 한다! 우리더러 사람의 생활을 하거나 사람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적비(赤匪 공산비적)들은 바로 금수와 같으며 우리가 하는 비적 토벌은 바로 이런 금수를 토벌해 제거하는 것으로 비적 구역 안에 있는 백성들을 구해 금수로 떨어지지 않게 하고 다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적토벌은 바로 금수를 공격하는 것이다! 금수를 공격하는 목적은 금수를 소멸시키는 한편 우리 백성을 구제해 더 이상 금수의 압박으로 하루하루 금수처럼 되지 않게 하며 하루 빨리 광명한 대도(大道)를 얻게 만들어 다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적을 토벌하는 목적이자 우리가 군관단을 설립한 취지이자 정신이다!

장개석은 《비적토벌의 의미와 사람이 되는 도리(剿匪的意義與做人的道理)》라는 제목의 훈화에서 “우리가 하는 일체는 모두 하나의 정정당당한 사람을 만들고 기세 높게 사람의 사업을 하며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하며 우리 조상과 부모를 위해 분발하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가 적비를 토벌해 소멸시키고 나라를 통일하며 왜구를 막아내려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

장개석은 이처럼 사람이 되는 도리를 강조했다. 또 만약 자신이 사람이 되는 도리를 몰랐다면 공산당을 소멸할 방법이 없었을 거라고 지적했다. 중공은 사람들에게 부모를 살해하고 조상을 팔아먹게 했으며 불충(不忠) 불효(不孝) 불인(不仁) 불의(不義)를 가르쳐 사람을 금수로 변하게 했다.

“지금의 토비는 바로 인면수심의 물건이다. 그들이 비록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금수의 사상과 행동이 아닌 게 없다. 왜 이렇게 보는가? 왜냐하면 우리 중국인은 오천년간 역대로 이어오며 성철(聖哲)과 우리가 강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여덟 글자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충효(忠孝)・인애(仁愛)・신의(信義)・화평(和平)이다. 반드시 이 여덟 글자를 완벽하게 갖춘 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완전하고 진정한 중국인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가에 대해 친구에 대해 더 나아가 모든 인류에 대해 우리는 늘 신의가 있어야 하며,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서로 조정하고 협력하며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해 최후에는 전 인류의 평화적인 공동진보를 실현해야 한다.”

“지금의 공산당은 어떤 모양인가? 방금 내가 말했다시피 토비들은 단지 중화민국과 중화민족에 대해 불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에게도 불충하고 자기 부하에게도 불충하다. 죄가 있건 죄가 없건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살을 바르거나 또는 각종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데 잔인무도하며 신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또 적비들은 단지 부모가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늘 부모를 구타하고 부모를 죽이려 한다. 더 나아가 자기 조상을 팔아먹고 외국의 조상을 모시려 한다! 즉 마르크스 레닌 등 외국인을 조상으로 모신다! 이런 토비행위는 진실로 불충(不忠)불효(不孝)하고 불인(不仁)불의(不義)한 것으로 금수와 같으니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러고도 어찌 중국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공산당이 비록 교활한 수단으로 일시적 이득을 취할 순 있지만 장개석은 공산당의 최종운명을 볼 수 있었다. “천하에 외국조상을 숭배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역사적으로 살인방화하고 나라를 팔아먹으며 조상을 망각한 토비가 성공한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다!”

장개석은 또 공산당이 초래할 재앙이 거대할 것임을 예견했다.

“만약 토비를 소멸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발을 딛고 설 땅이 없을 것이며 죽더라도 몸을 누일 곳조차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무덤 역시 보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 자자손손 망국의 노예가 되어 남의 노예나 가축이 될 것이다!”

장개석의 이 불길한 예언은 나중에 진실로 판명되었다.

장개석은 말했다.

“나는 올해 10월부터 남창에서 다시 비적토벌회의를 소집해 제5차 위초(圍剿 포위토벌)계획을 결정하고 강서 비적구역에 대해 ‘군사 3할에 정치 7할’의 방침을 채택할 것이다. 물자 수송을 금지해 그곳의 경제를 봉쇄하고 보루를 만들어 교통을 차단하는 한편 도로를 개척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진을 쳐서 차례차례 토벌을 진행할 것이다.”

“민국 23년(1934년) 여름 광서 강서 호북 하남 안휘(湘贛鄂豫皖) 5성의 비적구역이 강서 남부 산악지대로 축소되어 그 면적은 겨우 4천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해졌다. 이는 민국 21년과 비교하면 50분의 1에 불과하다.

1934년 10월 제5차 위초전쟁은 1년간 지속되었고 홍군은 결국 무기와 식량이 떨어져 서남방으로 도주해야 했다. 하지만 중공은 대외적으로 이목을 가리기 위해 소위 ‘북상항일(北上抗日)’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홍군은 북상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항일을 하지도 않았다.

포위토벌에 성공한 후 장개석은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원래 강렬한 반공정책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장개석의 공비토벌에 대해 비록 자신들의 일은 아니어도 성공하길 바랐다. 이때 국민당, 일본, 중공 삼자간의 힘의 변화가 시국을 제어하는 관건이 되었고 이에 대해 장개석은 자신만의 견해가 있었다.

1933년 8월 17일 일기에서 장개석은 “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어떻게 준비를 감추고 적이 그다지 주의하지 않게 하면서 서북(西北)과 사천(四川)을 경영할 것인가?”라고 적었다.

1934년 12월 29일에는 또 “만약 일본에 대한 계책으로 비적토벌을 구실로 항일의 원칙을 감출 수 있다면 내전을 피하면서 왜국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할 수 있고 또한 민중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직접 사천과 귀주의 비적 잔당을 토벌하면서 이를 구실로 서남근거지를 경영할 수 있는 복안이 될 수 있다.”라고 적었다.

장개석은 당시 한편으로는 홍군을 계속 추격해 일본의 침략발걸음을 늦추는 동시에 서남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장경국(蔣經國 장개석의 큰아들)은 자서전에서 “당시 포위에 실패해 중공에게 돌파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우리가 일부러 져 준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말하자면 이는 아주 성공적인 정치 전략이었다. 우리는 공산군을 따라 운남 귀주 사천에 들어가 진정한 중국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황도현, 《방수장정로(放水長征路)》)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