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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28): 앞뒤로 적을 상대

【정견망】

위기에 몰린 중공

섬북(陝北)까지 전전하며 쫓긴 후 홍군(紅軍)의 주력군대는 8만여 명에서 불과 6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중공의 운명은 이미 경각에 달려있었다. 팽덕회(彭德懷)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홍군 전체 병력은 겨우 국군 두 개 여단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서안사변신탐(西安事變新探)》)

당시 중공 지도부는 미래에 대해 극히 비관적이었다. 송미령의 회고에 따르면 “서안 사건이 발생하기 전 모택동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만약 국민정부가 동의한다면 자신은 감찰원장(監察院長)을 맡고 싶다. 만약 정부에서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신과 수행원들에게 여권을 발급해준다면 외국으로 나갈 용의도 있다고 전달했다.”(《근년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다(暢談年來所思所感)》)

1936년 연말 장개석은 직접 서북 비적토벌 총사령관을 맡았고 서안에 가서 항일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중공을 섬멸할 계획을 배치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뜻밖의 풍운이 불어와 서안사변이 발생했고 장개석의 배치를 망쳐버렸다. 사변 후 장개석은 일기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한경(漢卿 장학량의 자)이 나의 좋은 판을 망쳐버렸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중공은 장개석과 국민정부가 다년간 항일을 위해 고심한 노력과 전략을 완전히 말살시켜버렸고 장학량과 양호성이 서안사변을 일으켜 장개석이 항일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거짓말을 날조했다. 가령 1936년 9월 1일 중공중앙이 발표한 《핍장항일(逼蔣抗日) 문제에 관한 지시》에서는 “당의 전체적인 방침은 바로 ‘핍장항일(逼蔣抗日 장개석을 핍박해 항일하게 한다는 의미)’에 있다. 12월 12일 장학량과 양호성이 발동한 서안사변은 바로 장개석이 항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항일하도록 장개석을 핍박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서안사변을 장개석이 역사의 조류를 위배해 받게 된 엄한 징벌로 본 것이다.

하지만 장개석의 항일은 그 누구의 압력을 받아 결정된 게 아니었다. 당시 안으로는 중공 밖으로는 일본을 상대해야 했던 국민정부는 국력이 빈약해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때문에 장개석은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내실을 다지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힘을 기르는 큰 지혜를 발휘하고 있었다.

앞뒤로 적을 상대하다

1931년 9.18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국민정부는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중공 소비에트 구역에 대한 포위토벌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했다. 넉 달 후 일본은 또 상해에서 일을 벌였고 소위 ‘1.28 송호항전’(淞滬抗戰 제1차 상해사변)이 발생했다. 1월 30일, 사건 발생 3일째 중공은 성명을 발표해 “(국군 장병들에게) 당신들의 상관을 죽이고 홍군에 가입하라고 호소했다.” 당시 홍군은 전쟁의 혼란을 이용해 강서(贛), 복건(閩), 호남(湘), 호북(鄂), 안휘(皖) 등 지역에서 소비에트를 팽창시켰고 단번에 공주(贛州)를 함락시켰다. 국민정부는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서안사변 이후 장개석은 중공과 협상을 진행했다. 1937년 ‘7.7사변’(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노구교사건) 이후 국민정부는 전면적인 항일을 선포했다. 같은 해 7월 22일 중공은 ‘국난에 공동대처하는 선언’을 발표해 삼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할 것이며,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폭동을 포기하고,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몰수를 중단하며, 소비에트 정권을 취소하고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편해 국민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장개석 위원장의 영도 하에 항일하겠노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중공의 이 투항선언은 극히 기만적이었다. 통일전선이란 깃발 아래 중공의 파괴공작은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장개석은 이에 대해 명약관화하게 알고 있었다. 1937년 1월 25일 자신의 일기에서 “공산당은 교활한 수단으로 사리사욕을 취하는데 능하기 때문에 확실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신의(信義)를 돌보지 않는 무리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마땅히 정(正)으로 사(邪)를 제압하고 순박한 것으로 기교를 제압하는 도리로 대처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중공은 1937년 8월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섬북 낙천(洛川)현에서 확대회의를 열어 당의 방침을 결정했다. 모택동은 임표의 115사단은 진찰기(晉察冀 산서 차하르 하북) 산구(山區)로 잠입하고 하룡(賀龍)의 120사단은 진서북(晉西北 산서 서북) 산구로 잠입하며, 유백승(劉伯承)의 129사단을 노기평원(魯冀平原 산동과 하북)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했다. 목적은 적의 후방을 둘러싸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모택동은 거듭해서 “팔로군(八路軍)은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해야 하며 적이 강한 곳은 피하고 약한 곳으로 들어가 일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쳐야 한다. 주요임무는 팔로군의 실력을 확충하는 동시에 적 후방에 중공이 영도하는 항일근거지를 설립하는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일본군이 국군이 차지한 여러 지역을 공격해왔지만 공산당은 후방에서 항일을 구실로 자신의 근거지를 확대하기에 급급했다. 소위 “일본이 더 많은 점령지를 차지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애국”이란 말은 사실 “일본이 더 많은 점령지를 차지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애당(愛黨)”이란 의미였다.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는 1940년 숙정(肅正)공작의 근본방침 중에서 “공산군 세력이 점차적으로 대두하고 있으며 제3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중경군(重慶軍 장개석이 이끄는 중앙군을 말한다. 당시 국민정부는 일본의 공격에 밀려 수도를 중경으로 옮겼다) 및 잡패군(雜牌軍 지방의 군벌군대)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그 세력이 신속히 발전해 확대되고 있으니 가벼이 볼 수 없다. 만약 제때에 대책을 취하지 않는다면 화북은 장차 중공의 세상이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 군의 토벌중점은 반드시 전면적으로 공산군을 향해야 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때부터 일본군도 중공의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토벌을 개시했다. 하지만 중공의 소위 ‘항일’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중공 군대는 가급적 일본군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중공의 소위 ‘항전(抗戰)역사’ 중 단 두 차례의 ‘빛나는 전투’가 있었다. 하나는 1937년의 ‘평형관(平型關)전투’로 국군 제2전구 사령관 염석산(閻錫山)의 지휘 하에 치렀던 태원(太原)회전 중 한차례 전투였다. 임표가 지휘하던 115사단이 국군주력부대와 협력해 일본군 치중(輜重 보급)부대를 급습한 것이다. 당시 2달에 걸친 태원회전 기간 중 ‘평형관 전투’는 겨우 하루에 불과했으니 아예 ‘전역(戰役)’이라고 볼 수도 없다.

두 번째는 1940년 팽덕회가 지휘한 ‘백단전투(百團大戰)’였는데 일본군 점령지역의 광산과 철도를 파괴하는 유격전이었다.

하지만 중공은 장기간 장개석이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안사변으로 공산당이 ‘핍장항일(逼蔣抗日)’하도록 했으며 ‘평형관전투’는 항전 최초의 승리였으며, 공산당이 항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인민을 영도해 유격전으로 8년 항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선전해왔다. 반대로 국민당은 전투에 패배한 후 뿔뿔이 흩어져 아미산으로 숨어들어갔고 나중에 공산당이 일본인들을 제거한 후에야 산에서 나와 “남의 성과를 가로챘다”고 비방해왔다.

《여산회의실록(廬山會議實錄)》에 따르면 1959년 7월 31일 여산에서 개최된 중공 회의에서 임표는 평형관전투를 검토하면서 “손해를 봤다”고 했는데 다시 말해 “머리가 뜨거워져서 일시적인 충동으로 저리는 잘못”이란 의미다. 그는 또 “임필시(任弼時 홍군 지휘관)가 내린 결정 이었다”면서 이미 사망한 이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모택동은 이어서 “일부 동지들은 일본 점령지역이 적을수록 좋다고 인정하다가 나중에 와서야 비로소 일본 점령지역이 많아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애국임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개석의 나라를 사랑하는 게 된다. 중국 안에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장개석, 일본, 나 삼국지다.”라고 말했다.

팽덕회는 즉각 백단대전이 착오였다고 인정했다.

“이 전투는 장개석을 도와줬습니다.…화북회의에서 비판을 받았는데 앞으로는 기율을 지키는데 더 주의하겠습니다.”

모택동은 “팽덕회 당신 그것은 애국이 아니다. 백단대전은 국민당이 일본인을 싸워 이기는 것을 도운 것으로 장개석의 나라를 사랑한 것이다.” “백단대전으로 우리 역량이 너무 빨리 폭로되었고 일본군이 우리에게 주의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우리에 대한 장개석의 경계를 증가시켰다.”라고 매섭게 비판했다.

코민테른 연안연락원이자 타스통신 특파원이었던 블라디미로프는 자신이 쓴 《연안일기(延安日記)》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1942년 7월 9일 우임(尤任)과 아레예프(阿列耶夫)가 전선시찰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상황에 대해 낙담했다. 팔로군 군대(물론 또 신사군이 존재한다)는 이미 침략자에 대한 적극적인 출격과 반격을 중단했다. 중국 동남지역에서 일본군이 맹렬한 공세를 이어가고 있고 또 소련을 침략할 위협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중공 부대는 현재 일본이 자신들의 점령지를 소탕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산위로 올라가거나 또는 황하를 건너 후퇴하고 있다. 중공 지도부는 국민당을 주요 적으로 간주해 중앙 정부가 통제하는 지반을 탈취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고 각종 수단을 동원해 이 목적을 이루려 한다. 이처럼 명백한 분열행동은 침략자에 반대하는 중국 인민의 해방운동을 위태롭게 하고 중국 인민의 희생을 가중시키는 동시에 국민당과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게 했다.”

중공은 겉으로는 장개석에게 머리를 숙이고 복종한다고 했지만 줄곧 팔로군과 신사군을 사적으로 통제해왔고 심지어 국군을 공격해 항전을 파괴하려 했다. 그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1940년 10월 발생한 ‘황교사변(黃橋事變)’이다. 진의(陳毅)가 이끈 신사군(新四軍) 제1지대가 강소 태흥(泰興)현 동쪽 황교지역을 기습해 국군 만여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고 강소성 접경의 지역 일부을 차지했다. 신사군은 이미 반란군이 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일본군 주력붇가 황교전장에서 불과 15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켜보면서 국군이 패배하길 기다린 후에야 태흥으로 철수한 일이다. 중공과 일본 사이에 사전 묵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문화혁명 당시 중공 체제를 선전하던 8개 모범극(樣板戲) 중 《사가빈(沙家濱)》이란 현대판 경극에 이런 가사가 있다.

“8월 13일(1937년 8월의 2차 상해사변) 왜구가 상해를 침공했네,

강남땅이 함락되어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네.…

신사군 공산당이 와서 적에 맞섰네.

강남으로 동진해 적 후방에 깊이 들어가

여러 마을과 부락을 해방시켰네.

홍기 올린 곳에 노랫소리 낭랑하니

백성들 비로소 하늘에 햇빛을 보았다네.”

이는 중공이 문예형식을 이용해 역사를 뜯어고친 확실한 증거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