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군대의 부패
일본과의 기나긴 전쟁은 중화민국 정부를 경제적으로 어렵게 했고 국민정부의 세입이 매년 줄자 어쩔 수 없이 재정적자가 생겨났고 이것은 또 통화팽창(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장개석은 1943년 4월 11일 일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공무원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없다. 부인들은 아이를 키울 돈이 없어 낙태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으며, 치료할 돈이 없는 이들은 가난과 질병이 더 심해졌다. 광동 출신의 한 화교는 죽을 먹으며 자식을 팔아가며 살아야 했다. 하남 재난구역에선 굶어죽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넘쳐나자 개나 짐승들이 시신을 먹는다는데 그 참혹한 상황은 차마 듣기 힘들 정도다. 하늘이여! 만약 왜구가 속히 멸망하지 않고 1년이나 2년을 더 끈다면 중국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다.”
장공(蔣公)은 항전이 끝난 후 거지와 마찬가지인 군대에 직면하자 공산당의 군사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병력을 감축해야 했다.
“우리 군대는 내용이 공허하고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 외 또 하나의 가장 큰 결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병에 대한 처우가 너무 낮아서 생활이 몹시 곤란하다. 현재 일반 하급 군인들의 생활은 정말이지 기준선 이하로 대부분의 사병들이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따뜻하게 입지도 못해 얼굴은 누렇게 뜨고 몸은 바짝 말랐다. 때문에 외국인들은 우리 중국 군대를 한 무리 거지와 같고 우리 고급 장령들은 마치 거지 대장 같다고 놀린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열악한 재정과 경제상황에서 군인의 처우를 개선하고 사병들의 생활을 개선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적절한 휴식하고 정당한 오락을 즐기게 하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병사를 줄이고 편제를 감축해 두 사람 봉급을 한 사람에게 주는 방법밖에 없다. 이렇게 해야만 나라 재정이 감당할 수 있고 백성들의 힘으로 군대를 부양할 수 있다.”(장개석 《정군의 목적과 고급장령의 책임(整軍的目的與高級將領的責任)》)
항전 후기 군정부장(軍政府長)을 지냈던 진성(陳誠) 장군은 《진성 회고록:대만건설》에서 “국군 예산에 정해진 인원은 5백만 명인데 실제로 군량을 먹는 사람은 720만 명에 달했다. 당국의 추정에 따라 만약 실제대로 부대를 재편성한다면 전투할 수 있는 부대가 3백만 명만 있어도 아주 대단할 것이다.”라고 했다.
역사학자 황인우(黃仁宇 레이 황)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국군은 “반은 거지와 같고 반은 토비(土匪) 같았다”고 한다. 당시 사병들의 월급은 법폐(法幣) 14원에 불과했는데 이것으로는 거리에서 국수 4그릇밖에 사먹을 수 없었다.
“항전 초기 우리가 내지로 쫓겨 간 후 국군이 통제하던 지역의 공장 수는 전국의 6%, 발전량은 겨우 4%에 불과했으니 생활이 어떠했겠는가? 1941년 내가 소대장으로 있을 때 매달 급여는 겨우 42원에 불과했는데 당시 길거리에서 파는 국수 한 그릇이 3원이었다. 산 위의 토비들이 우리 경기관총을 구매하는 가격이 한 정당 7천 원이었는데 이는 상병 계급 사병의 40년 치 봉급에 해당했다. 유사한 상황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당시 상황을 서술한 문자 기록들을 열람해 보면 오직 ‘탐오와 무능’만 비난한다. 사실 탐오하고 무능한 관료가 한 명이라면 충성스럽고 절개를 지킨 간부는 열 명 백 명이었다.”(황인우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근대사연구소)
이런 어려움 때문에 국군 내부에는 인원을 부풀리는 허위보고가 만연했고, 당시 조건에서는 더 좋은 해결책이 없었다.
“어떤 부대든 모두 정원보다 결원이 아주 많았다. 이렇게 허위 인원을 부풀리는 것은 사실 공개적인 비밀이었고 일반 부대장들도 당연히 여겨 탐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우리 군인들의 가장 큰 죄악이다. 여러분들 중간의 많은 이들이 현재 군단장・사단장인데 이것을 파악하고 있는가? 어느 군단이나 사단의 대대나 중대에도 결원이 없는 곳이 없고 어느 대대장이나 중대장이든 인원을 부풀리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설령 여러분 자신은 그런 일이 없다해도 부하들에 대한 감독이 면밀하지 못하고 심사가 엄하지 않았다면 이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잘못이 아닌가!”(장개석 《정군의 목적과 고급 장령의 책임》)
송나라의 민족영웅 악비(岳飛)는 일찍이 “문관이 돈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이 죽음을 아끼지 않는다면 천하는 태평해질 것이다!(文官不愛錢 武官不惜死 則天下太平矣)”라고 했다. 그러나 항전에서 승리한 후 국민당의 문무 관리들은 이 말과 반대로 나아갔다. 장공은 실패를 총결산하면서 국민당 당원들이 혁명당에 들어온 후 출세와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를 당원의 당연한 권리로 여겼다고 회고했다.
“북벌을 완수한 이후 특히나 항전에서 승리한 후 총리께서 언급했던 우리 당의 선열들처럼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출세나 돈 따위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직 나라를 위하고 주의를 위해 분투하고 희생하는 정신’은 이미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일반 당원들은 당은 군대가 아닌데 왜 당원이 군인의 작전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가? 라고 여긴다. 또한 혁명당에 들어온 이후 출세와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를 당원의 당연한 권리로 여겼다.
우리당이 혁명에서 여러 차례 실패한 것은 바로 일반 당원들의 이런 잘못된 관념으로 조성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혁명군이 이 지경으로 참패한 것은 진실로 그 자체가 부패하고 타락해 혁명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당의 당원은 마땅히 군인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마땅히 선열들과 마찬가지로 희생하고 분투하며 직접 모범을 보여야 한다. 과거 수많은 당원들은 다만 출세나 돈벌이만을 생각하고 자신과 가족의 몸을 지키려고만 했을 뿐 주의를 위해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 분투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반 군인은 당연히 따라서 부패하고 희생하려 하지 않으며 염치를 돌보지 않을 것이다.” (《혁명당원과 혁명군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인식(革命黨員與革命軍人應有的認識)》)
항전의 승리는 고위 군관들의 부패와 군기문란을 유발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여전히 일반 고급 장령들이 승리한 후 교만하고 우쭐거리면서 스스로 대단한 공로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적의 항복을 접수하고 군정(軍政)을 할 때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여 수많은 군관들이 탐오와 부정을 저질렀다. 이를 통해 정신적으로 타락하고 제멋대로 즐기면서 생활에서도 사병들과 완전히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장교와 사병 사이에 동고동락하지 않고 환난(患難)을 함께 겪지 않으니 서로 간에 감정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군기 역시 갈수록 망가져버렸다. 그러므로 우리 군대가 협박해서 끌어온 오합지졸들로 구성된 공비(共匪)들이 엄격한 훈련이나 우수한 무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멸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수시로 습격과 포위를 당해 불필요한 희생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는 진실로 가슴 아프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개석, 《감찰관 및 병역인원의 주의사항(監察官及兵役人員注意事項)》)
항전 후 국군 장령들 중 황백도(黃百韜), 장영포(張靈甫), 채인걸(蔡仁傑), 구청천(邱清泉)처럼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이들은 드물고 도망치다 적의 포로가 되거나 심지어 투항한 자들이 많았다.
장공은 1947년에 이미 문제의 소재를 발견했다.
“우리 비적 토벌의 일이 오늘날 이렇게 실패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첫째 우리 국군은 항전기간에 일치단결해 외적에 맞서 용감히 싸우며 희생하느라 실력이 소모되었고 아울러 장기간의 전투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 반면 공비들은 8년 동안 항전을 도피하며 실력을 확충해왔고 온갖 궁리를 다해 어떻게 하면 국군을 소멸시키고 정부를 뒤집을 수 있을지 전문적으로 연구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전 승리 이후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키면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이 있었다.
둘째, 그들은 우리 고급 장령들이 모두 이미 사치스럽고 안일하게 살면서 군벌(軍閥)이 되었다. 또 대다수 나이가 40~50세에 이르러 사람마다 가정이 있고 처자식에 얽매이면서 부패한 사회 환경과 밀접히 관계하다보니 혁명정신이 점차 사라져버렸다. 오직 자신의 실력만 보존하려니 기율을 잡을 수 없었고 더 나아가 병력을 이끌고 분투하거나 한마음으로 합심해 다른 부대와 협력하는 효과를 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각개격파하고 우리를 소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공비들은 국군 각급 지휘관들이 평소 정신이 시들하고 학술을 무시해 군단장 이하로 중대장이나 소대장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학술과 전범을 연구하지 않았다. 더욱이 적의 상황이나 지형 정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멋대로 계획을 세우고 멋대로 명령을 반포하며 면밀하게 연구하거나 착실히 준비하지 않는다. 때문에 가는 곳마다 전투가 엉망이 되었다. 내가 과거 각 군이 실패한 전투들을 조사해보니 모두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학문적인 원리나 원칙에 따르지 않았다. 또한 부대와 부대 사이에 상호협력과 협동으로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면서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다.
넷째 공비들은 우리 고급 지휘관들이 부하들의 기본적인 동작 예를 들면 조준, 사격, 정탐, 연락에 대해 제대로 주의하거나 검증하지 않아 사병들의 전투기술이 낙후되어 제대로 작전을 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또 식량공급이 부족해 사병들의 생활이 불량하고 심지어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하게 자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휘관들이 막연해 하며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을 보았다. 지휘관이 사병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면서 그들의 아픔이나 가려움 따위는 상관하지 않으며 심지어 사병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병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고위 장성들뿐만이 아니며 심지어 중대장 계급의 대다수 하급 장교들도 그렇다. 이렇게 위아래의 생활이 분리되어 있으니 자연히 좋은 감정이 없다. 지휘관들이 이렇게 사병을 대하니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는데 어찌 명령에 따른 희생을 기대할 수 있으랴! 내가 여러 장령들에게 통절하게 알리고 싶은 것은 다행히 우리 사병들이 민족의식과 애국의 양지(良知)가 있어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설령 공비들의 선전선동이 없을지라도 반드시 우리를 이탈해 국군 전체가 붕괴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장개석,《국군장령의 치욕과 자성(國軍將領的恥辱和自反)》)
장공 개인은 여전히 도덕과 품행을 지켰다.
“나는 통수권자로서 수시로 이렇게 나를 반성한다. 또 수시로 와신상담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 날마다 ‘설욕(雪恥)’의 수업을 갖는다. 만약 내가 국가원수를 맡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반드시 국가체제와 규정의 예절과 의식을 고려해야 하는데, 특히 국력이 몰락할 즈음 외인(外人)의 무시와 경멸을 당하고 싶진 않다.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의 말로 삼는다면 나는 여전히 내가 일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세월을 보냈고 고락을 함께 했으며 사병들과 마찬가지로 생활해왔다고 자부한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개인에 대해 여전히 시시각각 절약과 소박함을 추구하게 했고, 함부로 나라의 돈이나 물건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이유로도 자신을 용서하고 양해하지 않았으며 오직 백성들의 귀감이 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장개석 《정치작전의 요지(政治作戰的要旨)》)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