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지략을 지닌 대송의 신장(神將)
글/ 유적(柳笛)

스물에 머리를 묶고 종군한 이래 19년 사이에 장상(將相)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악비는 평생 12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지만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풍부한 실전경험에 근거해 악비는 남송 전장(戰場)에서 가장 저명한 장군이라 할 수 있다. 악비와 그가 거느린 악가군(岳家軍)은 또한 중국 역사상 기적과도 같은 전설이 되었다.
그러면 악비는 왜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었고 악가군은 가는 곳마다 적을 휩쓸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은 악가군의 영혼이라할 수 있는 악비 개인의 뛰어난 지모와 완벽한 지휘방식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악비는 젊은 시절 병법(兵法)을 숙독해 무예에 정통했고 종군한 후에는 또 적은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에 맞서거나 지모로 강적을 상대하는 작전능력을 단련했다. 비록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가 쓴 병서(兵書)는 없지만 우리는 악비 평생의 언행을 통해 그의 병법 이념과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려운” 비밀을 탐구해볼 수 있다.
몇마디 말로 병법의 오묘함을 다하다
초기 군대에 들어왔을 때부터 악비는 곧 여러 유명 장수와 신하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악비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간단한 몇 마디 말로 비범한 지모와 뛰어난 군사적 안목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종택(宗澤)은 악비에 대해 지혜와 용기・재주에서는 이전 시대 양장(良將)들을 뛰어넘지만 전투에서 ‘짜임새’가 좀 부족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평소 자신이 지니고 있던 진도(陣圖)를 전수해주려 했다. 이에 대해 악비는 오히려 “진(陣)을 펼친 후에 전투가 있으니 병법의 법칙과 운용의 묘(妙)는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1]라고 말했다.

16자로 병법(兵法)의 정수를 밝혔으니 옛날 병법에 얽매이지 말고 전황(戰況)에 근거해 합당한 전술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활하게 임기응변하면서 고정된 방법이 없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요결(要訣)이다. 악비는 진세(陣勢)를 아무리 잘 펼친다 해도 단지 일반적인 용병의 도(道)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만약 오묘하면서도 합당하게 운용하려면 관건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임기응변 하는가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처럼 진지하면서도 명철한 견해는 당대의 노장마저 괄목상대하고 탄복하게 했다.
나중에 악비가 또 하북 초토사(招討使) 장소(張所)에게 찾아가자 ‘국사(國士)’의 예로 대우받았다. 장소는 악비의 작전능력을 유심히 관찰한 후 그에게 물었다.
“그대 혼자 얼마나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악비는 정면적인 대답은 회피하면서 “(개인의) 용기는 믿을 게 못되며 용병이란 먼저 지모를 정하는데 달려 있습니다.”[2]라고 대답했다. 즉 모략전(謀戰)의 관점을 제출해 필부(匹夫)의 용기는 기이하다고 하기 부족하며 모략과 전술을 운용해야만 의외의 수로 적을 제압하거나 심지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기적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고대 전투를 사례로 들고 주해를 달았다.
먼저 춘추시기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전투에서 진나라 대부 난지(欒枝)는 전차 뒤에 나뭇가지를 묶은 후 군사들더러 후퇴하게 했다. 나뭇가지가 끌리면서 먼지가 날리는 모습이 마치 대군이 패배해 퇴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를 통해 적병을 험지로 유인한 후 초나라 군을 크게 물리쳤다.
또 다른 사례로 초나라 군사가 교(絞)나라를 공격할 때의 일을 들었다. 초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교나라 성문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교나라 군사들이 성안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자 초나라는 나무꾼들을 이용해 교나라 군사를 유인해 성을 나오게 한 후 산속에 병력을 매복해 두었다. 교나라 군사들이 이 계략에 걸려 성을 나와서는 다투어 나무꾼들을 붙잡은 후 숲으로 압송해 부역하게 했다. 초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적의 퇴로를 끊은 후 순조롭게 교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전투 사례는 모두 지략(智略)을 높이 평가하고 적의 행동에 대한 사전예측을 중시한 것으로 악비의 작전이념을 잘 보여준다. 장소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그대는 일반 병사의 대열에 있을 사람이 아니오!”[3]라며 엄숙하게 존중해주었다.
악비는 또 용병에서 다섯 가지 일(五事)인 인신지용엄(仁信智勇嚴)을 언급했다.[4] 이 다섯 가지 일은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나오는 장수의 도(道)와 같지만 순서가 다르다. 악비는 이 다섯 가지를 통해 장수가 병사를 통솔하는 방법을 개괄했다. 다시 말해 인덕(仁德)을 우선으로 하되 사람을 쓸 때는 믿음(信)으로 하며, 지모(智謀)를 중시하고, 용기로 작전하며, 부대를 다스리는 것은 엄하게 했다.
[역주: 원래 손자병법에는 “장수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을 갖춰야 한다”고 나온다. 악비는 이 다섯 가지를 그대로 인용하되 중요성에 따른 순서를 바꿔 지혜(智)보다 인(仁)을 앞에 내세웠다. 악비 병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진충보국(盡忠報國)과 강산의 회복이야말로 악비가 전투에 나선 초심이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대인(大仁)・대의(大義)였다. 출전을 앞둔 악비는 병사들에게 “충효(忠孝)로 노력하고 절의(節義)로 가르쳤다”[5] 매번 나라와 가문의 원수를 언급할 때면 만면에 눈물을 흘리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악가군의 병사들은 모두 그의 이런 비장하고 강개(慷慨)한 기개에 감염되어 모두들 국가대의를 위해 싸우길 원했다.
용인술 방면에서 악비는 또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 자기 동생을 죽인 양재흥(楊再興)은 물론이고 심지어 적진에 있다 투항한 장수들까지 모두 성심으로 대우했고 과거의 허물을 따지지 않고 중용했다. 이렇게 덕성과 명망이 높고 지모 또한 뛰어난 장군을 따르니 그 어떤 병사인들 감격하고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전장에서 분투하며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격한 용병으로 송나라의 장성을 구축
악비 본인의 충성과 의리를 제외하고 무적의 군대로 불린 ‘악가군’도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이 부대는 전성기에 약 10만에 달했고 장룡복호(藏龍臥虎 숨어 있는 뛰어난 인재)라 할 만한 많은 영웅들을 배출했다. 악가군의 성공은 악비의 군령(軍令)이 엄격해서 엄명(嚴明)한 군기로 다스린데 있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일 중 마지막 ‘엄(嚴)’에 해당한다.

‘엄(嚴)’의 내포에 대해 악비는 일찍이 “공이 있으면 큰 상을 주고 공이 없으면 무거운 벌을 가하는 것이 명령을 엄하게 하는 것이다”[6]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악비는 또 군대를 다스릴 때 ‘육법(六法)’을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악가군이 상승군이 된 비결이다. 다시 말해 선발을 중시하고 훈련을 열심히 하며 상벌은 공정하게 하고 명령은 분명하게 하며 기율을 엄하게 하고 고락을 같이하는 것이다.(重蒐選・謹訓習・公賞罰・明號令・嚴紀律・同甘苦)[6]
우선 선발을 중시한다(重蒐選)는 것은 병사를 선발할 때 양보다는 질을 추구해 오직 정예병만 선발한다는 뜻이다. 한번은 조정에서 실전경험이 없는 노약자들로 구성된 수천 명의 병사들을 악비 부대에 보낸 적이 있다. 악비는 이중 쓸 만한 병사 천 명만 선발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산시켰다. 이렇게 선발된 천 명은 또 밤낮으로 고된 훈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정식 악가군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군대의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謹訓習)은 악비가 군대를 다스린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휴전기간에도 악가군은 개인별로 중무장을 한 채 말을 타고 언덕을 달려서 내려오거나 해자(垓子)를 뛰어넘는 연습을 했다. “일이 없을 때도 마치 일이 있을 때와 같았다.” 훈련은 마치 실전에서 적을 죽이는 것처럼 했고 만약 이 과정에 실수가 생기면 악비로부터 심한 꾸중과 처벌을 받았다.
예를 들어 한번은 악운이 훈련 도중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자 악비가 분노해 꾸짖었다. “큰 적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 할 테냐?”[7] 악운은 이 일 때문에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 했다. 나중에 곤장 백대로 징계를 낮춰주었다.
이처럼 엄격한 선발과 각고의 훈련을 거쳤기 때문에 악가군의 전투력은 다른 일반 부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병사 개개인이 무예에 정통했기 때문에 신묘한 능력을 발휘했고 전투에 나가 적을 죽이니 어디를 가든 승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위명(威名)이 널리 퍼졌다.
가령, 소상하(小商河)전투에서 양재흥은 불과 3백의 기병으로 십만이 넘는 금병과 싸워 2천 여명의 적을 살상했다. 또 영창(潁昌) 대전에서는 8백의 배외군(背嵬軍)이 금군 주력에 큰 타력을 입혔고 ‘사람과 말이 온통 피로 범벅된’ 비장한 장면을 연출했다.
셋째, 상벌을 공정히 함(公賞罰)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분명히 하고 “수천만 명을 대하는 것이 한사람과 같다”[8]는 뜻이다.(역주: 누구나 지위나 신분 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의미)
예를 들면 악비의 오른팔인 장헌(張憲)의 수하 중에 한 무명소졸이 막야관(莫邪關)을 점령할 때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 그러자 악비는 즉각 금속 벨트와 귀한 은그릇을 부상으로 주고 즉시 군관(軍官)으로 승진시켰다.
반대로 부장인 왕귀(王貴)가 영창대전에서 적에게 겁을 먹고 싸우지 않으려 했을 때는 현장에서 목을 베려 했지만 다른 여러 장수들이 간청한 후에야 겨우 죽을죄를 면했다. 악비는 이처럼 병사들을 대할 때 관직의 높고 낮음이나 개인적인 친소관계는 따지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대우했으며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베풀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비로소 군심(軍心)이 진심으로 복종하고 위아래가 한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명령을 분명히 하고 기율은 엄정히 한다(明號令・嚴紀律)는 말은 다시 말해 한번 내려진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하고 금지한 것은 어기지 말아야 하며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훈련과 전투 외에도 악비는 병사들의 덕행(德行)에 대한 요구가 아주 엄해서 백성들에게 추호라도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예를 들어 백성들의 농사나 장사를 해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엄중처벌했고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한번은 어떤 병사가 백성의 마(麻)를 강탈해 양초(糧草)를 묶는데 사용했다. 악비가 이 상황을 알고는 즉시 목을 잘랐다. 설령 백성들이 악가군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땔감을 팔 때 자발적으로 가격을 낮추려고 하면 악가군 병사들은 단호히 거절하면서 “어찌 푼돈 때문에 목이 잘리는 위험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9]라고 말했다.
이에 악가군이 가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군대가 있는 줄도 몰랐고 일상생활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민간에서 한마디 유명한 말로 악가군의 군기를 찬양했다.
“얼어 죽을지언정 가옥을 허물지 않고 굶어 죽을지언정 약탈하지 않는다.(凍殺不拆屋,餓殺不打擄)”[10]
끝으로, 악비는 늘 일반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同甘苦) 악비는 이렇게 공명정대하고 군기가 아주 엄정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스스로 절검하며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예를 들어 악비는 늘 일반 병사와 같은 수준의 식사를 했다. 만약 술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물을 섞을지언정 모든 병사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했다.
또 야외에서 주둔할 때 만약 노숙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역시 절대 관사에서 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 병사들의 가족들도 각별히 돌봐주었다. 어떤 병사가 장기간 수(戍)자리에서 돌아가지 못하자 악비는 처자를 병사의 집에 파견해 재물과 음식을 주며 그 가족들을 위로하게 했다. 또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았고 손수 약을 지었다. 또 불행히 군영에서 사망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위해 통곡하며 음식을 물리쳤고 고아들의 양육을 돕게 했다. 이처럼 악가군 병사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빈틈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송나라 사람들은 강인하고 충성스런 남송의 명장들 중에서도 유독 악비를 으뜸으로 꼽는데 악비야말로 남송 중흥(重興)의 으뜸명장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끈 10만의 악가군 역시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11]
여기서 다시 한번 악비가 이룬 전과들을 되짚어보자.
건염(建炎) 연간에는 건강(建康)을 수복해 이때부터 금나라 병사들이 함부로 강남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제1차 북벌에서는 양한(襄漢) 지역의 6군을 수복해 남송 최초로 기존에 상실했던 대규모 영토를 되찾았다.
제2차 북벌에서는 이수(伊水)와 낙수(洛水)까지 장거리를 진군해 남송 최초로 대규모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제4차 북벌에서는 언성과 영창에서 두 차례나 금병의 주력을 격파해 적의 심장부인 황룡부(黃龍府)까지 직접 쳐들어가는 꿈이 가능하게 했다.
악비의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 방식은 단순히 송나라 최강의 군대를 배양한데 그친 게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항금(抗金) 전장에서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신장(神將) 악비는 명실상부 대송(大宋)의 수호신이자 중화민족의 천고영웅인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여전히 악비의 정충(精忠)과 무공을 찬양하고 있고 아울러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계속 전해지고 있다.
(시리즈 완결)
주석:
[1][2][3][9] 出自《宋史》卷365。
[4][6]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嶽侯傳》。
[5] 《鄂國金佗續編》卷21:與將校語,必勉之以忠孝、教之以節義。
[7] 《鄂國金佗稡編》卷9:先臣以其不素習,怒曰:“前驅大敵,亦如此耶?”
[8] 《鄂國金佗續編》卷30:小善必賞,小過必罰,待數千萬人如待一人。
[9] 《鄂國金佗稡編》卷9:有卒市薪,項愛其不擾,欲自損其直二錢以售之。曰:“吾可以二錢易吾首領耶?”
[10] 出自《鄂國金佗稡編》卷9。
[11] 《獨醒雜志》卷7:紹興六帥,皆果毅忠勇,視古名將。嶽公飛獨後出,而一時名聲,幾冠諸公。身死之日,武昌之屯至十萬九百人,皆一可以當百。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시리즈 문장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12/7/n1089821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