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동흔(童欣)
【정견망】
4. 세 곳에 의숙을 세우다
무훈은 이렇게 숱한 고생을 겪으며 평생 3곳에 의학을 건립했다.
광서(光緖) 14년(1888년) 4천여 조(吊 역주: 1조는 1000전에 해당)의 돈으로 당읍현(堂邑縣 역주: 지금의 산동성 요성聊城) 유림진(柳林鎮) 동문 밖에 첫 번째 의학을 세우고 이름을 ‘숭현의숙(崇賢義塾)’이라 했다.
2년 후인 1890년에는 요증(了證)화상에게 230조를 도와주어 지금의 임청(臨淸)시 양이장(楊二莊)에 두 번째 의학을 설립했다.
1896년에는 3000조의 자금으로 임청시 어사항(禦史巷)에 세 번째 의학을 설립하고 이름을 ‘어사항(禦史巷)의숙’이라 지었다.
매번 학교를 설립할 때마다 벽돌, 기와, 목재 등의 재료를 모두 무훈이 사다 날랐고 모든 과정에 다 참여했다. 사람들은 맨몸의 가난한 거지가 의학을 설립한다고 했을 때 정신병이라고 수군거렸지만 결국에는 의학을 3곳이나 설립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량하고 정념(正念)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돕게 마련이다.
가장 앞에 무릎 꿇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달라고 간청
학교 설립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무훈에게는 또 감당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학교를 열어도 학교에 다닐 학생들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산동 사람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집에서 돼지를 키우게 했다. 그러니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 돼지를 키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가 있어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학교를 설립해도 학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훈은 이에 여러 마을을 다니며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가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학부형에게 “아이를 학교에 보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학부형이 “우리 집은 보내지 않아요. 아이가 돼지를 키워야 해요.”라고 말하면 무훈은 그곳에 꿇어앉은 채 아이의 장래를 위해 깊이 생각해보도록 권했다.
의학(義學)이 잘 만들어져
가난한 아이도 모두 배울 수 있어요
삼자경(三字經)도 배우고
백가성(百家姓)도 알아요
장부도 쓰고 편지도 쓰니 남에게 부탁할 필요 없어요.
義學一修好,
窮孩都上學。
三字經,學會了,
百家姓,也知道,
算賬寫信不向人央告。
무훈은 가장에게 이렇게 호소하면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이에게 좋은 점을 말했다. 결국 학교 학생들 모두 이렇게 일일이 빌어서 구해왔다. 가난한 집의 가장이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걸 원치 않으면 그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청했다.
가장에게만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교사를 구할 때도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진정으로 존경할만한 교사가 있다면 직접 찾아갔다. 한번은 수장현(壽張縣)의 최준(崔隼)이란 선비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직접 찾아가 교사로 초빙했다.
이렇게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개교 첫날이 되자 무훈은 잔치를 열어 교사들과 현지 유명 인사들을 초대했다. 그렇다면 이때 무칠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계단 아래에 서서 전적으로 손님을 맞이해 식사를 접대하는 역할을 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기를 청했지만 그는 자신은 거지라서 글을 모르기 때문에 내빈들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고집했다. 무훈은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그들이 먹다 남긴 반찬과 밥을 먹었다.
무릎 꿇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권하다
의학이 개설된 후 진지하게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있으면 무칠은 무릎을 꿇고 그에게 감사를 드렸다. “아이들을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어떤 교사는 진지하지 않았다. 한번은 무칠이 직접 학교에 가서 보니 아이들이 모두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묻자 실내에서 자고 있다고 대답했다. 무칠은 이에 교사 기숙사로 찾아가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는 이렇게 노래했다.
선생님이 주무시면 학생들이 떠들어요.
제가 와서 무릎 꿇고 청하니 요점이 풀리면 모든 게 해결돼요.
先生睡覺,學生胡鬧,
我來跪求,一了百了。
그는 교사에게 상여금이나 징계를 가하는 대신 학생을 대신해 무릎을 꿇고 잘 가르쳐주십사 간청한 것이다. 이렇게 하자 그 교사는 즉시 일어났고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교사로서 수업시간에 잠을 잤으니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을 고용한 사람은 일자무식한 사람인데 무릎을 꿇고 당신에게 간청하고 있으니 이 교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또 한번은 어느 교사가 집에 돌아간 후 개학을 했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무칠은 90리가 넘는 먼 길을 직접 걸어서 그의 집을 찾아갔고 문밖에 서서 밤새 기다렸다. 교사가 이 사실을 알고 큰 감동을 받았고 그 후 더는 지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이들이 교사가 없는 사이에 노는 것을 보면 그는 야단치는 대신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울면서 권고했다.
공부에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
집에 가서 부형을 볼 면목이 없어요.
공부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집에 가서 모친을 볼 면목이 없어요.
讀書不用功,
回家無臉見父兄。
讀書不用心,
回家無臉見母親。
무훈은 이렇게 의학을 설립하고 잘 꾸리기 위해 무수한 고생을 겪었다. 이는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의학을 건립한 게 아니라 중화민족 불후의 위대한 정신을 수립한 것이다. 무훈은 어릴 때 그렇게 많은 고생을 겪었지만 오십이 되자 3곳에 의학을 설립했다. 돌아보면 그의 지나간 20년 세월은 확실히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의학(義學)‘증(症)’이라 불리던 무훈은 症에서 疒(병)을 떼어버리고 의학정(義學正)이 되었다. 그것도 개인이 준 게 아니라 청나라 조정에서 떼어준 것이니 그는 진정한 의학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정부에서 공식으로 인정하는 교육을 주관하는 관원이 된 것으로 의학정에서 병이 사라졌으니 이제 더 이상 정신병이 아니다!
사실 사회도덕이 타락하고 인심이 병들었을 때는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 오히려 병이 있다거나 정신병자로 불린다. 이런 일은 아주 심각한 것으로 개인이든 사회든 선량(善良)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먹는 것이 좋든 나쁘든 곤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오직 확고한 목표만 있다면 하늘은 자연히 공정한 판단이 있을 것이다.
무훈은 그렇게 힘들고 더럽게 살아야 했지만 그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참된 도리와 행복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죄인인 것이다. 성인(聖人)께서는 다음 세대의 교육을 잘하지 못한 것은 지금 세대에게 죄가 있다고 하셨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서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밝고 따스함을 전하지 못한다면 이는 진실로 교사의 큰 잘못이다.
꿇어앉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서유기의 손오공을 말해보자. 손오공이 무릎을 꿇은 대상은 아주 드물었다. 그는 오직 사부인 당승(唐僧)과 관음보살 및 여래불 앞에서만 무릎을 꿇었을 뿐 심지어 옥황상제 앞에서조차 무릎을 꿇지 않았다. 때문에 처음의 손 원숭이가 나중에 손오공으로 되면서 한 가지 구별이 생긴다.
손오공과 손 원숭이에게는 어떤 구별이 있는가? 손 원숭이가 무릎을 꿇은 것은 어디서든 모두 자신을 위하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반면 손오공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은 것은 취경(取經)이란 대의(大義)를 위한 것으로 중생 구도를 위해서였다. 때문에 손 원숭이는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녔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큰 죄를 저질러 결국 여래불에 의해 오행산 아래 눌리는 처벌을 받았다. 만약 본성이 좋지 않았다면 소각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바쁘게 살 때면 곧 좋지 않은 일들을 하기 쉽다. 하지만 한 가지 의미있는 사업을 위해 노력할 때면 당신이 노력한 만큼 더 아름다워진다. 때문에 손오공은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어도 결국에는 부처로 수련성취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처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무훈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심(私心)이 없었다.
계속 구걸하며 허물어진 사당에서 살다
의학이 완공된 후 기숙사가 있었기 때문에 저녁이면 학교 안에서 쉴 수 있었다. 하지만 무훈은 의학에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전처럼 다 허물어진 사당에서 잠을 잤다. 학생들이 이를 알고 단체로 찾아가 학교로 들어오시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허물어진 사당 안이나 처마 밑에서 잠을 잤다. 교사와 학생들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요청해도 듣지 않았다.
한번은 이렇게 자다가 지붕위에서 파편이 떨어져 머리가 깨진 적도 있었지만 무훈은 진정으로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무훈은 진실로 거지 성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었으니 단지 거지 중의 성인이자 극히 특수한 성인이다.
머리가 깨져도 화를 내지 않아요,
의학을 만드는 건 모두 내게 달렸어요.
打破頭,出出火,
修個義學全在我。
조정에서 편액을 내리고 ‘의학정’에 제수하다
무칠은 일반 백성들조차 우습게 알던 거지였다. 그런데 산동 순무(巡撫) 장요(張曜)가 그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 듣고는 특별히 그를 불렀다. 무훈은 걸어서 순무관아가 있는 제남부(濟南府)까지 갔고 순무를 볼 때도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구걸할 때 입던 헤진 옷을 입은 채 등에는 전대를 메고 손으로는 연신 실을 감고 있었다. 순무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여겨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훈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미친 것도 아니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니,
오직 한마음 ‘의학증(義學症)’에 걸렸을 따름입니다.
我不瘋,我不病,
一心只害‘義學症’。
순무는 이런 그의 모습에 탄복했고 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무칠에게 아직 정식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훈(訓)’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또 은 200냥을 상으로 주고 의학이 소유한 전답에 대한 세금과 요역을 면제하라고 명령했다. 무칠은 50이 훨씬 넘은 나이에 비로소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산동순무가 하사한 이름이 바로 무훈이었다. 여기서 훈(訓)이란 이끌고 가르친다는 뜻으로 아동교육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한 셈이다.
동시에 또 순무는 광서제에게 주문을 올려 ‘낙선호시(樂善好施-선행하고 베풀기를 좋아한다는 의미)’란 편액을 하사하게 하고 조정에서 ‘의학정’이란 명호를 수여했으며 황마괘(黃馬褂 황실에서 하사한 노란색 마고자)를 상으로 주었다. 과거에 황제가 개인에게 직접 무언가를 하사한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영광이었다. 게다가 일개 거지에 불과한 무훈에게 이런 상을 내린 것이다.
또 조정에서 수여한 ‘의학정(義學正)’이란 명호에는 병을 뜻하는 疒이 사라졌다. 원래 학정(學政)이란 관직명으로 지금으로 치면 지방 교육감에 해당한다. 그러니 무훈에게 하사한 의학정이란 명호는 아주 영예로운 호칭이며 게다가 황제가 직접 하사했으니 일반 ‘학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의학정이고 또 상으로 받은 황마괘를 입었다. 과거 청나라에서는 황제와 아주 특수한 관계가 있는 가까운 사람들만이 황마괘를 입을 수 있었다. 보통은 황족이나 특별한 공로를 세운 사람만 입을 수 있었다. 일개 거지에 대해 황제가 직접 찬양하고 조정에서 상을 내린 이런 영예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그야말로 성대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무훈은 이 성대한 수여식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분 알다시피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을 때는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무릎을 꿇고 받아야 한다. 그런데 무훈은 원래 학생이든 교사든 가장이든 누구에게나 무릎을 잘 꿇던 인물이었지만 황마괘를 받을 때는 꿇지 않았다. 이는 황제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는 그는 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걸까?
의학정 이런 벼슬 필요 없어요.
황마괘 이런 것도 쓸모 없어요.
의학 설립은 만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아요.
義學正,不用封。
黃馬褂,沒有用。
修個義學萬年不能動。
무훈은 이렇게 학생에게도 꿇고 가장에게도 꿇고 교사에게도 무릎을 꿇었지만 오히려 황제나 황마괘 앞에서는 꿇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한 모든 일들이 권력이나 명예 따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설명해준다.
중국 농촌에는 벙어리나 가축을 속이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이 가축에게 잘 대해주는지 비록 가축이 말은 못할지라도 속으로는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설사 남이 모를 지라도 덕을 잃거나 양심을 어기게 되면 음덕을 손상해 언젠가는 보답을 받기 때문이다.
교사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모두 자세히 보고 들을 수 있다. 만약 교사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면 아이들은 당신에게 탄복하거나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이들에게도 눈이 있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다시 무훈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에게는 황마괘도 필요 없었고 다른 감투 따위도 필요 없었다. 영예와 포상은 모두 외부적인 평가에 불과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준다해도 중요하지 않다. 가령 당신이 교사로서 잘 가르쳤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 영광을 가져갔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당신보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지 못했음에도 그를 격려하는 것은 그더러 더 잘 가르치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닌가? 당신이 만약 이런 넓은 흉금으로 대한다면 다음에는 분명 당신이 격려를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들 당신에게 탄복할 것이 때문이다. 성인 무훈은 바로 이런 점에서 모범이 될 수 있다. 마음을 편안히 먹고 착실하게 일을 하되 헛된 명예나 이익은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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