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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대순(大順)황제 이자성 (1)

천명을 받아 두각을 나타내다

글/ 유효(劉曉)

이자성[그림: 고서진(古瑞珍)/에포크타임스]

선인(先人)들은 일찍이 “천하 대세(大勢)는 태평함이 오래되면 혼란해지고 혼란이 오래되면 다시 태평해진다. 태평한 시대에는 성왕(聖王)과 명상(明相 밝은 재상)이 경운(景運 좋은 시운)에 따라 태어나지만 혼란한 시대에는 초야의 영웅이 겁운(劫運)에 따라 나타난다. 이는 모두 천지 운수의 추이에 따른 것이다.”라고 했다.

명조(明朝)는 2백여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태조(太祖 홍무제 주원장)와 성조(成祖 영락제)가 각고의 노력 끝에 창립한 강산이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소모되었다. 특히나 신종(神宗 만력제 주익균 재위: 1573-1620), 희종(熹宗 천계제 주유교 재위: 1620~1627년) 시기에 들어서면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등한시 하고 환관이 정권을 농락하면서 대명의 강산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명조 최후의 황제인 숭정(崇禎 주유검 재위:1627~1644년)이 즉위한다.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정치를 회복하려 했다. 즉위 초에는 위충현(魏忠賢) 등 엄당(閹黨 환관의 당파)을 제거해 확실히 조정 기강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숭정제가 직면한 안팎의 곤란한 국면과 숭정제 자신의 안목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영리하지만 현명하지 못했고 인재 등용이 적합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그가 등용한 내각 수보(首輔 재상) 주연유(周延儒)는 도리어 매관매직으로 관작(官爵)을 팔아먹으며 정인군자(正人君子)를 배척하고 조정에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 온체인(溫體仁)을 내각에 끌어들여 간사한 패거리를 만들어 현명한 사람들이 조정에서 멀어지게 했으니 정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하지만 숭정제는 이런 사실을 몰랐고 주연유를 현인(賢人)으로 여겼으며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그를 ‘주(周) 선생’이라 부르며 존중했다.

이외에도 숭정제는 성격이 급하고 자기주장이 너무 강했다. 17년 재위 중에 약 20명에 가까운 지방 총독(總督)과 순무(巡撫) 등 대신들을 죽여 신하들의 마음이 떠나가게 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명조(明朝)의 겁운이 확실히 닥쳐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지러운 세상에 천운에 따라 영웅이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사실 명조의 멸망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미 일찍부터 예견된 바 있다.

명조의 멸망에 관한 예언들

당나라 때의 유명한 예언서 《추배도(推背圖)》 제32상에는 명조의 멸망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그림 속에 문(門)이 하나 있고 그 속에 말[馬]이 있으니 바로 틈(闖 역주: 틈왕 이자성)이 된다.

참문(讖文)에선 이렇게 말한다.

말이 북궐(北闕)에 뛰어들고, 서방에서는 개가 시끄럽게 짖는다
팔구(八九)의 수가 다하니, 일월(日月 역주: 明)이 빛을 잃는다

馬跳北闕, 犬嗷西方
八九數盡, 日月無光

즉 틈왕(闖王) 이자성이 명나라를 멸망시킴을 예언하고 있다. 일월이 빛을 잃는다는 말은 바로 명나라의 멸망을 뜻한다.

또 송문(頌文)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버드나무 꽃이 다 떨어지니 자두꽃이 쇠잔하고
오색의 깃발이 북쪽에서 나니니
한숨 쉬는 금릉에는 왕의 기운이 다하고
한 가닥 춘색(春色)이 장안을 차지하리라.

楊花落盡李花殘
五色旗分自北來
太息金陵王氣盡
一枝春色占長安

여기서 자두꽃(李花)이 쇠잔하다는 것은 이자성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북방민족들이 천하를 차지하고 아울러 한족이 황제가 되는 운수가 이미 끝났음을 암시한다.

한편 북송의 대학자 소강절(邵康節)이 지은 《매화시(梅花詩)》 제4절 제4구에서는 “자두꽃이 피었으니 봄은 이미 아니로다(開到李花春已非)”라며 명나라의 멸망을 예언했다.

명나라는 성조 주체(朱棣 영락제) 때 전성기의 휘황을 누렸지만 말기로 갈수록 점점 쇠퇴해졌다. 여기에 다년간에 걸친 농민 기의(起義)는 대명 왕조가 끝내 “자두꽃이 피었으니 봄은 이미 아니게” 만들었다. 여기서 ‘자두꽃’은 당연히 명말의 틈왕인 이자성을 가리킨다.

1644년 봄 이자성이 이끄는 군대가 북경을 차지하자 숭정황제는 자금성 뒤편의 경산(景山)에 올라가 목을 매달아 자진했다. 이로써 명조가 멸망했으니 이것이 바로 “봄이 이미 아닌” 것이다.

한편 명나라 개국공신 유기(劉基)가 지은 《소병가(燒餅歌)》에서도 명조의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수많은 자손이 층층으로 겹쳐
조종의 산위에 패의가 행하네,
공후는 더 이상 금궐에 조회하지 않고
십팔아는 어려움에 어려움이 겹쳤구나.

萬子萬孫層疊層
祖宗山上貝衣行
公侯不複朝金闕
十八孩兒難上難

괘(卦)에서는 또 이렇게 예언했다.

나무 아래 일료두(一了頭)가 있고
눈 위에 칼 하나와 무정(戊丁) 하나가 있으니
천하는 문(文)을 중시하고 무를 중시하지 않는다.
영웅호걸에게는 늘 봄이 없으니
무자(戊子)기축(己丑)의 난이 어지럽게 엉켜있고
도처에서 백성들이 집에 있지 않으니
기황(饑荒)을 만나니 도적떼가 일어나고
평안을 지키는 건 좋은 계수나무 꽃이리라.

木下一了頭
目上一刀一戊丁
天下重文不重武
英雄豪傑總無春
戊子已丑亂如麻
到處人民不在家
偶遇饑荒草寇發
平安鎮守好桂花

여기서 ‘조종의 산위에 패의가 행한다(祖宗山上貝衣行)’는 것은 숭정제의 이름인 숭(崇 조종의 산)・정(禎 글자 안에 貝와 衣가 들어 있다) 암시한다.

‘木下一了頭,目上一刀一戊丁’에서 목하일료(木下一了)는 ‘李’ 목상일도(目上一刀)는 ‘自’ 일성정(一戊丁)은 ‘成’이 되니 다시 말해 이자성의 이름을 의미한다.

또 마지막 두 구절에서 “기황(饑荒)을 만나니 도적떼가 일어나고”는 명나라 말기 대대적인 농민기의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며 마지막 구절에서 “평안을 지키는 건 좋은 계수나무 꽃이리라”에서 계수나무 꽃(桂花)은 오삼계(吳三桂)를 암시한다.

숭정제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소병가》에서는 “달아난 매화가 구중(九重)에 올라갔다(奔走梅花上九重)”고 하여 숭정제가 매산(煤山 지금의 경산) 위에서 자살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자성의 기이한 출생

이자성(李自成)은 조상 대대로 농업에 종사했고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미지현(米脂縣)에 살았다.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은 용맥(龍脈)이 극히 왕성해서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 시기에 미지현 현성(懸城)의 서문(西門)을 열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현성 서쪽에 3층짜리 높은 누각을 지어 의도적으로 용맥을 눌러버렸다고 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천하에 재앙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고 섬서와 산서(山西) 일대에 돌림병이 발생했다. 이자성의 부친 이수충(李守忠)은 이때 이미 오십이 넘었고 유일한 아들마저 돌림병으로 죽고 어린 손자 이과(李過)만을 남겼다.

이에 이수충은 화산(華山)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한밤중에 신이 나타나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미 파군성(破軍星)을 너의 아들이 되도록 명령했다.”

여기서 파군성이란 북두칠성에서 일곱 번째 별을 가리키는데 도교에서 말하는 자미두수(紫微斗數) 14주성(主星) 중 하나로 가장 충동적이고 변동성이 가장 심한 별이다. 파군성은 충격력이 거대하기 때문에 선봉(前鋒)에 적합하다. 소위 선봉이란 전쟁터에서는 용맹하게 앞으로 전진하고 사업에서는 새로운 것과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나중에 이자성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것과 잘 맞아떨어진다.

곧이어 이수충의 후처 고(高)씨가 임신했고 만력 34년(1606년) 8월에 아이가 태어났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 비밀(費密)이 쓴 《황서(荒書)》에 따르면 이자성이 출생할 때 부친이 꿈에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흙가마(土窯)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명을 황왜자(黃娃子 또는 황래아黃來兒)라 지었다고 한다.

최초로 두각을 나타내다

이자성은 어릴 때 일찍이 남의 집 양(羊)의 방목을 도와준 적이 있다. 성장한 후에는 체구가 크고 훤칠한데다 힘이 장사였고 불공평한 일을 보면 늘 약자를 도와주곤 했다. 한마디로 그는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이 모이곤 했다. 모두들 모여서 매일 술을 마시고 놀다보니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졌다.

이때 무리 중 한 사람이 도둑질을 해보자고 건의했다. 이자성은 이에 대해 아주 못마땅해 했는데 왜냐하면 사내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숭정(崇禎) 원년(1627년) 마침 은천역(銀川驛)에서 역졸(驛卒)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이자성이 응모했는데 동작이 날렵하고 발걸음이 빠른데다 용감하고 힘이 세서 역졸에 선발되었다. 이후 그는 유림(榆林), 미지, 연안(延安) 등의 지역에서 공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자성은 공문서 전달 일을 아주 열심히 했지만 뜻밖에도 잇달아 말이 과로로 죽거나 분실물이 생기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자 지현(知縣 현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불만을 샀다. 마침 그해에 조정에서 경비절감 차원에서 역참에 근무하 인원을 감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이자성이 먼저 해고되었다.

그 후 이자성은 연안부(延安府)에 가서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이 기간에 불공평한 일을 참지 못하고 나서길 좋아하던 이자성이 강한 힘을 믿고 약자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연안 지역 불량배 석우인(石友仁)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한 후 이자성은 미지현에 있는 집으로 도망쳤지만 얼마 후 관병에게 체포되었다. 미지현의 지현 안자빈(晏子賓)은 그를 심하게 질책하며 사슬을 채워 감옥에 가둔 후 상부의 처분을 기다리게 했다.

당시 감옥에 근무하던 옥졸(獄卒) 고립공(高立功)은 이자성과 전에 역참에 근무할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때문에 그에게 차와 음식을 주고 남몰래 챙겨주었다. 이자성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 고립공은 마침내 야음을 이용해 옥문을 열고 이자성과 함께 고향집으로 탈출했다. 마침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던 고립공의 누이 고계영(高桂英)은 자신도 무예를 할 줄 아는데다 무예가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한 이자성을 보자마자 몹시 탄복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당시 진중(秦中 섬서성 중부 평야지대) 지역에 매년 큰 기근이 발생하면서 황폐해진 땅이 천리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해 분분히 장대를 들고 일어나 조정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섬북(陝北)과 섬중(陝中) 지역에 아주 빨리 확산되었다. 이중에는 장헌충(張獻忠) 및 이자성의 친족 장인인 고영상(高迎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자성은 일단 기병한 왕가윤(王嘉胤)을 찾아가 의탁했다. 관병과의 전투에서 몇 차례나 용감하게 관병을 죽이자 왕가윤은 곧 이자성에게 적진 돌파에 앞장서는 별동부대를 만들게 했다.

이자성은 곧 고립공 및 미지현에 있던 친구들을 찾아가 결사대를 조직했다. 이자성은 용맹하게 잘 싸우는데다 흉금이 넓어서 매번 전투에서 획득한 금은재화가 있으면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인심이 서서히 그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왕가윤은 이를 몹시 불편하게 여겨 은밀히 이자성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이자성은 비밀리에 보고를 받은 후 자신이 이끌던 부대를 이끌고 몰래 왕가윤을 떠났다. 우선 명나라 연수총병(延綏總兵)에게 투항했다. 왕가윤 등이 크게 패한 후 조정에 저항하는 세력을 모아 곳곳을 전전했다. 숭정 6년(1633년) 산서에서 ‘틈왕(闖王)’을 자처하던 고영상이 이끄는 부대에 들어가 ‘틈장(闖將 선봉에 서는 용맹한 장수란 뜻)’이라 불렸다.

이때에 이르러 이자성이 최로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7/17/n810890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