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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대순(大順)황제 이자성 (2)

틈왕이 되어 하늘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위험에서 벗어나

글/ 유효(劉曉)

틈왕 이자성(에포크타임스)

이자성이 ‘틈왕(闖王)’ 고영상의 부대에 의탁한 후 산서(山西)에 주둔하던 고영상과 장헌충(張獻忠) 등의 부대는 명나라 장군 조문조(曹文詔)가 이끄는 군대에 패해 하남(河南)으로 도주했다.

하남에서도 조문조, 좌량옥(左良玉) 등이 이끄는 여러 갈래 명나라 군대에 포위당했다. 고영상, 장헌충 및 이자성 등은 황하 근처에서 곤경에 처했고 대단히 위급한 상태였다. 이때 군사(軍師)인 우금성(牛金星)이 계책을 내서 명나라 감군(監軍) 태감(太監) 양진조(楊進朝)에게 뇌물을 바치게 했다. 양진조는 이를 진짜로 믿고 조정에 상주하는 동시에 공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 기회를 이용해 이자성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밤을 새워 황하를 건널 배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지만 밤새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더니 황하마저 단단히 결빙되었다. 이는 분명 하늘의 도움이었다. 고영상, 이자성 등은 몹시 기뻐하며 밤새 부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남쪽 강변에 도달했다.

이때 남쪽 강변을 지키던 명군은 아무런 방비도 없었다. 고영상, 이자성 부대는 잇달아 여러 현들을 함락시켰고 심지어 호광(湖廣)과 사천(四川) 근처까지 이르렀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관병들은 조정에 긴급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크게 이름을 떨치다

1634년 숭정제는 특별히 산서(山西), 섬서(陝西), 하남(河南), 호광(湖廣), 사천(四川) 지역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연수순무(延綏巡撫) 진기유(陳奇瑜)에게 5성 총독을 맡겨 전문적으로 이자성 부대를 토벌하게 했다. 진기유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 고영상, 이자성 등을 섬서(陝西) 흥안(興安) 차상협(車箱峽)의 40여 리에 달하는 좁고 긴 완충지대 안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당시 진기유의 병력은 2만 명 정도였고 이자성의 7~8만 명에 비하면 역량에 큰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한 달이 넘도록 음산한 비가 계속 내렸다. 진기유의 계획은 천시와 지리 조건을 이용해 병사나 화살을 낭비하지 않고 이자성을 사로잡는 것이다.

한편 말먹이가 부족하고 군사들이 절반 이상 사망한 이자성 부대는 여러 차례 포위를 돌파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이자성은 고군은(顧君恩)의 계책을 채택해 관군에 임시로 투항하기로 했다.

고영상, 이자성 등이 부대를 이끌고 투항한 후 진기유는 4만에 달하는 부대원들을 만 명씩 편성하고 안무관(安撫官)을 파견해 압송하거나 원래 살던 터전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이 4만 명은 남쪽 잔도를 빠져나온 후 관병을 살해하고 계속해서 보계(寶雞), 인유(麟遊) 등을 공략해 관중(關中) 일대를 뒤흔들었다.

진기유는 이 때문에 관직을 박탈당했지만 이자성은 이때부터 오히려 크게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 후 숭정 7년(1634년) 숭정제는 진기유 후임으로 홍승주(洪承疇)를 임명해 각지의 저항군들을 토벌해 제거하게 했다. 홍승주가 군사를 이끌고 섬서 지역을 지키고 있던 명장(名將) 하인룡(賀人龍)과 연합해 공격에 나서자 이자성 등이 크게 패했다. 하지만 이자성 등은 여러 곳을 공격했기 때문에 여러 성에서 구원을 요청했다.

작전 전략을 만들다

홍승주의 포위 공격에 직면해 있던 1635년 초 고영상, 장헌충, 노회회(老回回), 나여재(羅汝才), 혁리안(革裏眼), 좌금왕(左金王), 개세왕(改世王), 사탑천(射塌天), 횡천왕(橫天王), 혼십만(混十萬), 과천성(過天星), 구조룡(九條龍), 순천왕(順天王) 등 13가(家) 72영(營)의 농민군들이 하남 형양(滎陽)에서 대회를 소집했다. 이를 형양대회라 한다.

이 회의에서 이자성은 “방향에 따라 병력을 나눈 후 동서남북 사면으로 치고 나가는” 전략을 제안했다. 대부분의 수령들이 이 제안에 찬성해 혁리안와 좌금왕은 사천과 호광 군대를 막고, 횡천와과 혼십만은 섬서 군대를 막고, 나여재와 과천성은 황하를 지키며, 고영상과 장헌충 및 이자성 등은 동쪽을 공격하고 노회회와 구조룡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그런데 섬서 군대가 정예였기 때문에 사탑천과 개세왕을 추가로 내보내 맞서게 했다.

또 성읍(城邑) 공략에 성공하면 얻은 사람과 재물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갖기로 했다. 각기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농민군 수령들이 모두 이자성의 제안에 동의했다는 것은 그의 전략적 안목이 상당히 뛰어난 것을 보여준다.

대회가 끝난 후 각 팀별로 계획에 따라 행동에 나섰다. 고영상, 장헌충, 이자성은 부대를 이끌고 대명(大明)의 발상지인 봉양(鳳陽 역주: 명 태조 주원장의 고향)을 공격했다.

일설에 따르면 고영상 등이 3년 전에 봉양을 공격했을 때 봉양 백성들은 매일 밤 황릉에서 들려오는 슬픈 곡소리를 들었는데 몹시 쓸쓸하고 처량했다고 한다. 당시 능을 지키던 병사들이 조사해보니 소리가 분명 묘지 안에서 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들 여겼다. 그리고 얼마 후 현지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황릉 부근에서는 하루에도 13차례 진동이 있었고 슬픈 곡소리가 3년간 단 하루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장차 황릉에 닥칠 겁난을 미리 예시한 것이다.

봉양을 점령한 후 탐욕스럽고 잔인했던 장헌충은 수하들을 멋대로 풀어놓았다. 이들은 도처에서 약탈, 살인, 방화를 자행했으며 또 주원장이 일찍이 출가했던 사찰인 황각사(皇覺寺)를 불태워버렸으며 심지어 황실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쳤다.

이자성은 이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고 장헌충에게 큰일을 꾀하려면 이런 순장품에 대해 너무 욕심 부리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장헌충은 그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

한편 황릉이 불에 탔다는 소식이 북경성에 전해지자 숭정황제는 상복을 입고 통곡하면서 관원을 파견해 종묘에 제사를 올리고 곧바로 대규모 토벌부대를 모집했다.

고영상・이자성 부대는 명군(明軍)의 포위를 피하기 위해 각기 따로 부대를 이끌고 헤어졌고 장헌충에게는 따로 알리지 않았다. 이자성 부대는 하남에서 섬서로 들어간 후 다시 감숙(甘肅), 영하(寧夏)로 들어가서 명군을 크게 물리쳤다. 조정에서 파견한 애만년(艾萬年), 조문조(曹文詔)란 두 장군이 이 싸움에서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대성통곡했다. 명조의 기운이 확실히 사라졌다.

고영상을 이어 ‘틈왕’이 되다

1636년 봄 고영상・이자성 부대는 신임 5성 총독인 노상승(盧象升)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운양(鄖陽)에서 격파 당했다. 같은 해 4월 후금(後金)이 청(淸)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6월에는 3차례에 걸쳐 변방 침략을 강화했다. 그러자 명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맞서기 위해 노상승을 선대(宣大)총독에 임명해 자리를 옮겼다.

대신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 있던 왕가정(王家楨)이 후임 5성 총독으로 부임하자 고영상과 이자성은 따로 포위를 돌파했다. 그 후 고영상은 신임 섬서 순무 손전정(孫傳庭)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숭정제는 능지처참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고영상이 포로가 되기 전에 중군(中軍)의 대장 깃발이 바람에 날려 서쪽 성 밖으로 날아갔고 이들이 주둔하던 현성(懸城)이 온통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고 한다. 그후 고영상의 잔존 부대원들은 이자성에게 귀의했고 이자성은 마침내 여러 사람들에 의해 틈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사천, 감숙, 섬서 일대를 돌아다니며 싸웠다.

하늘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위기에서 벗어나다

숭정 11년(1638년) 숭정제는 양사창(楊嗣昌)을 병부상서에 임명했다. 그는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4방과 6모퉁이 10개 방향에서 그물을 좁히는” 군사계획을 제출했다. 이는 농민군의 유동성을 제한한 후 하나씩 각개격파하고 최후에 모두 섬멸하는 계획이었다.

이자성은 동관(潼關) 남쪽 들판에서 홍승주・손전정 부대의 매복에 걸려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고 유종민 등 겨우 17명만을 이끌고 섬서 동남쪽 상락(商洛)의 산속으로 달아났다. 같은 해 장헌충이 패배하면서 조정에 투항했다.

이제 농민군 주요 수령 중에서 남은 세력은 이자성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늘이 그를 살리려 해서인지 이때 청나라 군사들이 청구산(青口山 지금의 하북 천안遷安 동북쪽), 장자령(牆子嶺 지금의 북경 밀운密雲 동북 지역) 두 곳으로 나눠 제4차 입관(入關) 작전을 발동했다.

양사창은 “먼저 안을 다스린 후 밖을 물리치는(安內方可攘外)” 전략을 관철하기 위해 청나라와 화의에 주력했다. 하지만 선대총독이자 근왕병(勤王兵)총사령관 노상승 등 여러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 봉착했다.

숭정제가 대청(對淸) 전략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노상승이 하북 거록(鉅鹿)에서 벌어진 청나라와의 전투 중에 사망했다. 청나라 병력이 물러난 후 홍승주가 새로 계료(薊遼)총독이 되어 청나라와의 전투에 투입되었고 손전정은 양사창의 무고로 감옥에 들어갔다.

이렇게 그동안 이자성을 괴롭혀왔던 노상승, 홍승주, 손전방 등이 모두 사라지자 이자성이 다시 한 번 힘을 얻을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는 여러 무리들을 끌어 모아 대오를 재정비했다.

1639년 장헌충이 다시 조정에 반기를 들었고 이자성은 이 기회를 이용해 포위망을 돌파했다. 나중에 양사창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릉(吏陵)에 와서 이자성에게 투항하라는 격문을 보냈다. 하지만 이자성이 이에 따르지 않자 관군은 마침내 이자성을 사천 파서(巴西)와 어복산(魚腹山) 사이에서 포위했다. 이 어복산은 산세가 아주 험해서 이자성으로서는 탈출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며칠을 대치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이자성 부대의 군심(軍心)이 크게 동요했다. 이자성은 마침내 여러 장수들을 소집한 후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자기 목을 들고 나가 조정에 투항하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의 권고와 설득 때문에 중단했다.

당시 이자성 휘하에 유종민(劉宗敏)이란 아주 용맹한 장수가 있었는데 이런 곤경에 처하자 투항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에 이자성은 그를 산 중턱에 있는 한 낡은 사찰로 데리고 가서는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남들이 모두 나더러 천자가 되라고 하니 지금 한번 점을 쳐보도록 하자. 만약 점괘가 불길하게 나오면 네가 내 목을 가져가 투항해도 좋다.”

유종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3번 점을 쳤는데 모두 아주 길하게 나왔다. 유종민은 돌아온 후 이자성에게 말했다. “죽을 때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장수들이 이 말을 들은 후에는 모두 이자성을 따르겠노라고 했다.

이자성은 이에 치중((輜重 군수물자)을 전부 불태워버리고 경기병으로 운양 균주로 돌격했다. 마침 명군의 주력이 장헌충을 추격하기 위해 사천에 들어간 상태라 마침 하남이 텅 비어 있었다.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7/17/n8109079.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