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정을 베풀고 대순(大順) 정권 건립
글/ 유효(劉曉)

이재민을 구휼해 민심을 얻다
숭정 13년(1640년 )이자성이 하남(河南)에 들어왔을 때 마침 하남 지역에 몇백년 만의 큰 가뭄이 들어 곡식가격이 폭등했고 백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이자성이 부호(富戶)들의 수중에서 식량을 징발해 이재민들을 구제하자 많은 수의 굶주린 백성들이 즉각 이가군(李家軍)에 가담해 그의 세력이 갑자기 확장되었다.
그는 또 명나라 말기 대부분의 토지가 소수 권력자들의 손에 집중되고 농민들은 부역의 부담이 커진 상황을 고려해 ‘균전면량(均田免糧)’이란 구호를 제창해 수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여기서 균전(均田)이란 대토지 소유자들의 땅을 빼앗아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준다는 뜻이고 면량이란 세금을 면제해준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토지개혁과 세금면제 정책을 들고나온 것이다.
때문에 수많은 농민들이 “젠장할 먹을 것 먹고, 마실 것 마시고, 대문을 열어 틈왕을 맞이하세. 틈왕이 오면 세금을 내지 않는다네(吃他娘, 喝他娘, 開了大門迎闖王, 闖王來時不納糧)”라고 노래하거나 또는 “소와 양을 죽이고 술안주를 준비해 성문을 활짝 열고 틈왕을 맞이하세, 틈왕이 오면 세금을 내지 않는다네”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이자성은 또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양(南陽)에서 나와 의양(宜陽), 영녕(永寧), 언사(偃師)를 공격해 점령했다. 이후 낙양(洛陽)을 공략해 숭정제의 숙부이자 만력제의 총애 받던 아들인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을 주살했다. 또 복왕의 왕부 및 여러 신하들의 집에서 수만 석의 식량과 수십만의 재물을 꺼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구휼하게 했다. 복왕은 탐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몹시 인색해서 하남 일대 농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도 쌀 한톨 내놓으려 하지 않던 인물이라 민심을 잃은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가난한 백성들이 새로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하남 각지에 흩어져 있던 기의군(起義軍)들 역시 모두 이자성의 지휘를 받으면서 그의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이때 장헌충도 양양(襄陽)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양왕(襄王) 주익명(朱翊銘)을 살해했다.
관군 총사령관 병부상서 양사창은 장헌충을 제거하기 위해 대부분의 병력을 장헌충이 있던 사천(四川)에 동원한 상태였는데 장헌충이 몰래 대치중이던 군대를 움직여 사령부가 있던 양양을 급습한 것이다. 즉 자신의 실책으로 양왕 주익명이 살해당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양사창은 곡기를 끊고 굶어 죽었다. 일설에는 독약을 먹고 자진했다고 한다.
숭정제 이 소식을 들은 후 분노와 슬픔이 교차해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섬서 미지현 현령에게 이자성의 조상 묘를 파내 서북 지역의 왕기(王氣)를 끊어버리게 했다. 이에 미지현 현령 변대수(邊大綬)가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이자성 조상의 묘를 파헤치고 유골을 불태워버렸다. 이자성은 이 말을 들은 후 대성통곡하면서 반드시 원수를 갚겠노라고 맹세했다.
대순정권을 세우다
그러나 이자성은 일시적인 감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진 않았다. 그는 군사(君師) 이암(李岩)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수를 갚는 일은 잠시 미뤄두고 군사들을 이끌고 또 다른 군사적 요충지이자 부유한 도시인 개봉(開封) 공략에 나섰다.
당시 개봉에 있던 주왕(周王) 주공효(朱恭枵)는 이자성이 성을 공격하러 온는 말을 듣고 급히 창고를 열고 황금을 풀어 병사들을 모으고 순무도어사(巡撫都禦史) 고명형(高名衡) 등과 함께 굳건하게 성을 지켰다. 이자성이 무려 7일 밤낮에 걸쳐 맹공을 퍼부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물러났다.

1642년 가을 이자성은 다시 개봉공략에 나섰으나 여전히 공략에 실패했다. 이에 황하(黃河) 제방을 무너뜨리고 물길을 바꿔 개봉성을 수몰시켜 버렸다. 이해 겨울 이자성은 호광(湖廣 지금의 호북성과 호남성 지역)으로 진군해 양양을 탈취하고 무창(武昌)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강연안 호북의 주현(州縣)들을 차지했다.
한편, 장헌충은 이자성보다 한발 앞서 무창과 장사 등을 공략하고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1643년 이자성은 호북 승천(承天 지금의 종상鍾祥)을 공략했다. 이곳에는 가정제의 부모 흥헌(興獻)황제와 황후의 묘인 현릉(顯陵)이 있었다. 그 후 이자성은 또 인근의 운몽(雲夢), 황파(黃陂) 등의 주현을 공략했다.
이자성은 자신에 대한 호칭을 틈왕 대신 ‘봉천창의대원수(奉天倡義大元帥)’라 부르고 장헌충과 함께 있다가 많은 병력을 이끌고 귀부한 조조(曹操 나여재의 별명으로 꾀가 많다는 의미) 나여재(羅汝才)를 ‘대천무민위덕대장군(代天撫民威德大將軍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위무하는 위덕이 큰 장군이란 의미)’에 봉하고 각각의 무리를 나눴다.
하나의 표영(標營)이 백 개의 부대를 거느렸는데 전(前)후(後)좌(左)우(右)에 각각 영(營)을 만들어 각각 30여개 부대를 이끌게 했다. 표영마다 백기(白旗)에 검은 표식(黑纛)을 달았다. 그중 이자성의 깃발만은 유독 백기에 크고 검은 표식 및 은부도(銀浮屠)로 구별했다.
좌영(左營)은 백기(白旗), 우영(右營)은 홍기(紅旗), 전영(前營)은 흑기(黑旗), 후영(後營)은 황기(黃旗)로 구별했고 표식 역시 깃발과 같은 색으로 했다.
또 군령(軍令)을 내려 사사로이 돈을 감추지 못하게 했고 지나는 성읍마다 백성들의 집을 차지하거나 아내 외에 다른 부녀를 거느리지 못하게 했다.
이 당시 원래 13가 72영에 달했던 농민군 기의부대들은 기본적으로 전부 투항하거나 사망했고 남은 병력은 오직 이자성과 장헌충 뿐이었으며 이중 이자성이 가장 강력했다. 이자성은 이후 섬서 지역을 공략해 후방을 다지기로 결정했고 가는 곳마다 쓸어버렸다.
1643년 10월 이자성은 관중의 관문이자 서안을 지키는 길목인 동관(潼關)을 함락시키고 명나라 조정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손전정(孫傳庭)마저 전사하게 했다. 이자성은 마침내 화음(華陰), 위남(渭南), 화주(華州)와 임동(臨潼) 등을 연파하고 서안을 향해 진공했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안 상당수의 명나라 장수들이 관문을 지키는 대신 투항하면서 서안진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 지역 백성들은 이자성의 군대를 찾아와 앞 다퉈 절을 올리며 만세를 높이 외쳤다.
서안에 진입한 후 이자성은 이암의 건의에 따라 매일 창고를 크게 열어 난민을 구제했고 또 군령을 엄하게 펼치고 훈련을 강화해 감숙 일대의 공격을 준비했다. 백성들은 이자성이 이렇게 위엄과 은혜를 동시에 베풀고 기율이 엄정해서 군대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우려할만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자성은 사람을 파견해 미지현에 있던 자기 조상의 묘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게 한 후 또 직접 찾아가 제사를 올렸다.
오래지 않아 감숙(甘肅)과 청해(靑海) 일대마저 공략에 성공하자 춘추시대 진(秦)나라에 해당하는 서북(西北) 지역이 모두 이자성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에 1644년(숭정 17년) 정월 초하루 이자성은 서안에서 왕을 자칭하고 서안의 이름을 서경(西京)으로 고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했으며 연호도 영창(永昌)으로 바꿨다. 또 그의 증조부 이하 조상들에게 시호를 추증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자성이 등극하던 이 시간 북경성에는 큰바람과 심한 황사가 발생해 모래와 자갈이 날려 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점괘를 보니 “바람이 건(乾 역주: 북서쪽) 방향에서 일어나니 사나운 병사들이 이르러 성이 파괴될 것이다”고 나왔다. 명조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자성은 정권을 수립한 후 영창전(永昌錢)이란 화폐를 만들고 또 역법을 새로 만들어 갑신력(甲申曆)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대순 중앙정부의 기구를 더욱 완벽하게 다졌다. 또 천우전(天佑殿)대학사를 설치해 우금성(牛金星)을 대학사에 이명했고 과거 육부 대신 육정부(六政府) 상서(尙書)를 설치했으며, 그외 홍문관(弘文館), 문유원(文諭院), 간의(諫議), 직지사(直指使), 종정(從政), 통회(統會), 상계사(尚契司), 험마사(驗馬寺), 지정사(知政使), 서사방(書寫房) 등의 관직을 설치했다.
건주 출신 송기교(宋企郊)를 이정상서(吏政尚書 이부상서에 해당), 평호의 육지기(陸之祺)를 호정(戶政)상서, 진영의 공화육(鞏火育)을 예정(禮政)상서, 귀안의 장인연(張嶙然)을 병정(兵政)상서에 임명했다. 또 공후자작남이란 다섯 등급의 작위제를 회복시켜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봉했다. 공이 가장 큰 유종민 등 9명은 제후(諸侯)에 봉하고 유체순(劉體純) 등 72명은 백작(伯爵), 30인은 자작(子爵), 55명은 남작(男爵)에 봉했다.
이외에도 또 군사제도를 정비해 무릇 한 마리 말이 대열에서 가지런하지 못하면 목을 베었고 말이 장원(莊園)에 뛰어들어도 목을 베었다. 정식으로 등기된 보명이 40만에 기병이 60만에 달했다. 병정시랑 양왕휴(楊王休)가 수도 건설에 나서자 횡문(橫門 장안성 북쪽의 성문)에서 위교(渭橋)까지 징소리와 북소리가 땅을 흔들 정도였다.
대순 정권의 중앙기구는 기본적으로 명조(明朝)의 것을 답습하고 단지 명칭만 바꿨을 뿐이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대순정권은 무(武)를 중시하고 문(文)을 경시해 “모든 문관은 권장군(權將軍 최고위 무관)의 통제에 따른다”고 규정해 농민군 장군들이 정권의 핵심역할을 보장하게 했다. 동시에 과거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한편 사천을 차지한 장헌충 역시 1644년 11월 성도(成都)에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대서(大西) 연호를 대순(大順)이라 하면서 성도를 서경(西京)이라 칭했다. 통천력(通天曆)을 새로 만들고 ‘대순통보’(大順通寶)란 화폐를 주조했다.
결과적으로 1644년 이 한 해는 명나라 숭정 17년, 대순 영창 원년, 대청(大淸) 순치 원년이 되는 동시에 대서의 대순 원년이 되니 모두 4개의 연호가 교차되었다.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6/7/19/n81156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