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동흔(童欣)
【정견망】
5. 무훈에 대한 존경과 기념
웃으며 떠난 무훈의 장례에 수많은 사람이 참여
1896년 4월 23일 무훈은 어사항(禦史巷) 의숙에서 숙환으로 사망하니 향년 59세였다. ‘청사(清史)’의 기록에 따르면 “무훈은 병이 위급한 상태에서도 여러 학생들이 책 읽는 소리를 듣고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웃었다.”고 했다. 무훈은 이렇게 웃으면서 죽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들이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는 그의 일생에 대한 가장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한평생은 헛되게 산 게 아니었다. 고생스레 걸식하며 의학을 설립해 가난 때문에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다는 소망을 실현시켜 주었다. 때문에 그의 내심에 부끄러움이라곤 전혀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한평생 양심에 꺼리는 일은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임종할 때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사실 이렇게 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무훈은 해냈다.
과거에 7~80대 노인들은 임종할 때가 되면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평생 한 가지 양심에 꺼리는 일을 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몹시 후회된다. 평생 동안 줄곧 잘못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아직 멀었구나.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나를 도와 잘 마무리해주기 바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평생 몇 가지 좋은 일을 했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은 그다지 선량하지 않고 양심을 어기는 일이 너무 많아서 셀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중국에서는 소위 대약진(大躍進) 이후 한 무(畝)당 만 근의 소출이 나온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당신이 나서서 다른 말을 할 수 있었는가? 반우파 투쟁이니 류소기나 임표 비판 등소평의 우경화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차례 운동에서 사람마다 모두 태도를 표시하고 고비를 넘겨야 했다. 수시로 정치상황이 변하는데 어떻게 올바른 태도를 표시한단 말인가?
지주와 자본가를 탄압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가진 것은 약탈이 아닌가? 문화대혁명은 문물을 파괴하고 사람이 사람과 투쟁했고 64때는 군대가 비무장한 애국학생들을 도살했으며 최근에는 선량한 파룬궁 단체를 탄압하고 박해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사건에 대해 여러분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가, 정말로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교에서는 동토(東土)에서 태어나기 어렵다고 말하고 또 동토는 대덕지사(大德之士)가 나오는 곳이라고 말한다. 지난 수십 년간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중국인이 되기란 실로 너무나도 어려웠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고 가장할지라도 저승에 가면 모든 일이 다 분명하고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무훈처럼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으로 진정으로 우리 후손들이 무한히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때문에 그는 평생을 담담하게 살 수 있었고 웃으면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훈은 이 세상에 대해 떳떳했다.
중화민국 시기 저명한 평민교육가 도행지(陶行知) 선생은 “오직 마음만을 받들 뿐 풀 반 포기조차 가져가지 않는다(捧著一顆心來,不帶半根草去)”는 말을 했는데 무훈이 바로 그랬다. 그는 개인적으로 물질에 대한 추구가 전혀 없었고 중화민족에게 불후의 정신만을 남겨주었다. 명예와 이익은 사실 사람이 가져갈 수 없는 것이다.
‘홍루몽’ 호료가(好了歌)에서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며, 흔히들 말하는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간다.” 무훈은 59년을 살았으니 당시 나이로 그리 장수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아주 거대한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
무훈의 관이 장지로 떠나가던 날 당읍(堂邑), 관도(館陶), 임청(臨淸) 등 인근 3현의 모든 관리와 신사(紳士)들이 전부 장례식에 참석했다. 무훈의 유언에 따라 장지는 그가 처음 설립한 의숙인 당읍현 유림진 숭현의숙 동쪽에 마련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현과 향에서 자발적으로 무훈의 장례식에 참가한 백성들이 만 명을 넘었고 연도에도 그가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하는 곡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고 향민(鄕民)들도 앞을 다퉈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누가 무훈더러 아들이 없다고 했는가?”라고 말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한 개인이 사망할 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장례식에 참석했고 또 평생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 사실 그에게는 이렇게 많은 아들이 있는 것과 같고 또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의 도움을 받은 아이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으니 당시 사람들이 “누가 그에게 아들이 없다고 했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사실 고인들이 말한 ‘효(孝)’와 “불효(不孝)에 3가지가 있으니 그중에도 후사가 없는 게 가장 큰 불효”라고 한 말에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정신의 계승 여부다. 미덕(美德)이 유전될 수 있다면 망자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후사가 있는 것(有後)’이고, 자녀나 후손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이 진짜 ‘효’다. 당시 관리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장례에 참석했고 일개 거지에 대해 관부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내심으로 그를 기렸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무훈의 높은 지위와 거대한 영향
이후 10년간 청나라 조정에서는 무훈의 업적을 국사관(國史館)에 보내 그에 관한 전(傳)을 쓰게 했다. 중화민국 시기에 들어와서는 북양(北洋)정부가 무훈의 사적을 열전의 형식으로 ‘청사고(清史稿)’에 편입시켰다. 중국 정사(正史) 역사상 최초로 거지 열전이 탄생한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그동안 과거 역사는 모두 왕공(王公)이나 대신(大臣) 등 위대한 인물들만 전기가 있었고 작은 관리들은 여기에 끼어들어가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무훈은 거지의 신분임에도 정식으로 정사 열전에 들어갔으니 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일이다.
양계초(梁啓超)도 일찍이 무훈의 전기를 쓰면서 전체 편에서 선생이라는 존칭을 사용했다. 평민 교육자 도행지는 “무훈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오히려 천만년을 살아남을 것이다. 만약 우리 개개인이 모두 무훈의 정신을 지닌다면 어찌 나라가 진보하지 않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라에서는 그의 묘를 수리하고 사당과 비석을 세워주었으며 무훈의 업적은 세인들의 존중과 탄복을 받았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전국적으로 무훈이란 이름이 들어간 학교가 수없이 생겨났다. 나중에 동북(東北)에서는 또 무훈전(武訓傳)이란 영화까지 찍었다.
무훈에 대한 후세의 존중과 기념
무훈이 세상을 떠난 후 역대 정부와 백성들은 모두 그를 끊임없이 기념해왔다. 1903년 산동 순무아문(巡撫衙門)에서는 무훈의 능(陵)을 새로 단장하고 무훈사(武訓祠)란 사당을 만들고 기념비까지 세워주었다. 과거에 사당이라고 하면 주로 왕공대신만이 가질 수 있었다.
중화민국 시기 산동교육청장을 지낸 하사원(何思源) 선생은 무훈사 중건(重建)을 위한 돈을 대고 한백옥(漢白玉 주로 궁전 건축에 사용하는 희고 아름다운 돌)으로 만든 무훈 조상(造像)을 세웠다. 다시 말해 대청 조정에서 그를 기념했고 중화민국에서도 그를 기념했다.
1932년 산동성 주석 한복거(韓複矩)는 ‘무공기념당(武公紀念堂)’을 설립하고 또 다른 두 곳에 ‘무공기념청(武公紀念廳)’을 설립했다.
1934년 임청현 무훈 소학교에서는 무훈 탄생 99주년 기념활동을 가졌다. 이 행사에는 장개석, 풍옥상, 이종인, 장학량, 양호성, 채원배 등 민국 시기 저명한 정치인, 교육자, 문화예술인 등이 앞을 다퉈 기념사와 시가(詩歌), 산문 및 전기 등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무훈의 업적을 찬양했다.
특히 장개석은 친필로 ‘무훈선생전찬(武訓先生傳贊 무훈선생전을 찬양)’을 써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힘껏 구걸하며 덕(德)을 이루고 뛰어난 재능에 도달하는 위업을 수립하셨다. 배운 게 없는 몸으로 선량한 사람과 세상에 복을 남기는 은택을 남기셨노라. 홀로 전례가 없는 일을 해냈으니 어질고 진실하고 의롭고 화합함이 진실로 위대한 견인불굴의 정신이라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도다. 이는 세상에 풍족한 유산을 지녔음에도 완고하고 이기적인 자들이 듣고도 따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제목에 ‘인륜사표(人倫師表)’라고 썼다. 즉 인륜의 모범이자 본보기란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당시 무훈의 영향이 이렇게 커질 수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숭배했던 것일까?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는 무훈처럼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사회든 모두 그를 존경하고 환영할 것이다. 이때 일본은 동북(東北 만주국)만 차지하고 아직 중국 전체를 침입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들 역시 무훈을 성대하게 기념했다.
특히 도행지는 적극적으로 무훈정신을 선전하면서 또 힘껏 실천한 무훈정신의 충실한 실천가였다. 다음은 그가 한 말이다.
“농부마다 모두 하나의 무훈이 되고 어린이마다 모두 하나의 어린 무훈이 되자.”
“우리가 교육을 보급하려면 반드시 무훈을 배워야 한다.”
“중국이 배움을 좋아하는 민족이 되려면 1백만 명의 무훈이 필요하고 3백만 개의 학교와 독서할 곳을 만들어야 한다. 매 학교마다 평균 150명을 교육해야만 전체 중화민족 4억 5천만 명이 집집마다 책을 읽고 사람마다 이치에 밝아질 수 있다. 배움에 끝이 없어야지만 비로소 전체 민족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
1945년 일본에 대한 거국적인 항전의 와중에도 도행지 등 대부분의 교육자와 문학예술가 및 사회각계의 애국인사들이 중경(重慶)에서 열린 무훈탄생 107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했다. 당시 대회는 천여 명이 참가한 전례 없이 큰 대회였고 곽말약(郭沫若), 도행지, 유아자(柳亞子) 등 저명한 학자들과 사회 활동가들이 회의에 참가하고 강연을 했다. 사회 각계, 특히 문화계와 교육계 명사들이 앞을 다퉈 기념활동에 참가했으며 ‘의개무훈전(義丐武訓傳)’, ‘무훈선생연보(武訓先生年譜)’, ‘무훈화전(武訓畫傳)’ 등의 서적도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이렇게 일자무식의 거지가 교육계 및 문화계 존중을 받았다.
여러분 알다시피 1930~40년대에 무훈은 중화대지 전역에서 큰 존경을 받았고 그의 지위는 갈수록 더 높아졌다. 민국 초기 군벌들의 혼전 속에서 국민정부는 경제적으로 아주 곤란한 상태에 있었고 8년 항일전쟁 시기에는 각 방면에서 자금이나 재정 압박이 더 심해졌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헌신적인 교육정신을 더욱 희망했을 것이다. 가난한 거지마저 의학을 설립할 수 있었으니 그보다 형편이 나은 우리 누구나 다 약간의 힘을 내면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중화민국 시기 무훈의 사적(事跡)은 정식으로 교과서에 편입되었다. 때문에 당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모두 그를 잘 알았다. 1949년 이전에 역사 수업시간에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4백여 명의 학생들 중 절대다수의 아이들이 답안지에 무훈이라고 적을 정도였다.
전국적으로 30여 곳에 무훈학교가 출현했다. 풍옥상(馮玉祥)이란 장군은 1932년부터 35년까지 3년 사이에 무려 15곳에 무훈 소학교를 설립했다. 이외에도 무훈출판사, 무훈거리, 무훈항구 등을 만들었고 당읍현의 지명은 무훈현으로 고치고 유림진은 무훈진으로 고쳐서 모두 무훈을 기념했다. 산동 명인록(山東名錄)에는 그를 무성인(武聖人)이라 불렀다.
여러분 알다시피 역사적으로 성인이라 불린 인물은 극히 드물다. 우리 역사에서는 현인(賢人)이 성인(聖人)에 비해 훨씬 많았다. 보통 성현(聖賢)을 통상 합해서 부르긴 하지만 성인은 현인보다 훨씬 드물었고 청나라 말기에는 더더군다나 희소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성인인 공자(孔子)는 뛰어난 학문이 있었고 육경(六經)을 찬술했으며 중화전통문화에서 사람이 되는 부분을 전승해 내려왔다. 하지만 무훈은 일자무식한 사람임에도 마찬가지로 성인으로 불렸으니 이는 아주 기괴한 일이 아닌가?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 중에 누가 그보다 학문이 부족한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문화(文化)란 무엇인가? 사실상 선량(善良)이며, 생명에 대해 그만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정한 문화라 할 수 있다. 이런 표준으로 가늠해본다면 우리 오늘날 중국에 문화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지금 중국에서는 교육이 산업이 되었고 대학은 돈을 벌기 위해 광고를 하며 백성들의 쌈지돈을 가져가는데 이런 것은 문화라 부를 수 없다. 문화란 모두 도(道)와 조화를 이룬 것이다. 고대의 독서인(讀書人)들은 단순히 책만 읽은 게 아니라 병을 치료할 때면 처방을 낼 수 있었고,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리를 말해줄 수 있었다.
성현의 책을 읽으면 진정으로 도리를 말할 수 있고 그 역시 이런 도리를 따르기 때문에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된다. 우리 오늘날 많은 교사들이 자신은 불행하다고 여기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성현을 배워야 한다. 단지 아이들만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선 안된다. 물론 행복한 사람이 되자면 반드시 선량해야 하며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과 사사로운 정(情)을 좀 내려놓아야지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가 모두 무훈의 정신을 따라배운다면 사업은 성공할 것이고 인생도 행복해질 것이며 미래 역시 아름답게 변할 것이다.
1951년 영화 무훈전이 대대적으로 비판받기 이전, 중국의 다양한 사회계층과 역대 정권들은 모두 무훈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일치했다. 청나라 조정은 물론이고 민선의 중화민국 시기 심지어 왕정위(汪精衛) 친일괴뢰정권까지도 모두 무훈을 몹시 존경했다. 때문에 매 정권마다 무훈은 정면(正面)적이었고 사람들의 찬양과 존중을 받았다. 아울러 나중에 무훈선생은 세계적으로도 존중을 받았고 세계교육사전에도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비록 일자무식한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소리 없는 교육자이자 빈민교육가로 불려졌다.
스위스의 무훈 페스탈로치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스위스의 무훈에 대해 말해보자. 바로 유명한 페스탈로치를 말한다. 그는 1746년에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정신은 서로 일치한다. 스위스는 당시 아주 가난하고 구석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다. 페스탈로치의 노력을 통해 스위스 빈민들에게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고 그의 교육이 성공한 이래 유럽 각국의 지도자와 교육자들이 모두 스위스로 가서 학습했다. 편벽하고 낙후된 작은 나라였던 스위스가 교육에서만큼은 강국이 된 것이다.
스위스는 나중에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아주 아름답게 변했으니 이는 한 사람이 한 나라를 변화시킨 것이다. 때문에 서양인들은 페스탈로치를 가리켜 교육의 성인이라 부르며 평생 교육에 헌신한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고 또 ‘성심(聖心)’, ‘성덕(聖德)’으로 기리며 중국의 성현과 마찬가지로 존중한다.
그는 일찍이 “나는 줄곧 냉대받고 의지가 약한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기본상식 서적만 실은 일륜차(一輪車)를 밀고 다녔다. 그러다가 뜻밖의 사업에 투신하게 되었고 여기에는 유아원 한 곳을 설립하고 교사학교 및 기숙학교 한 곳의 설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일을 하던 첫해에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당시 나는 이 돈의 10분의 1조차 구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사업에 성공해 나라를 변화시켰으며 가난하고 낙후된 작은 나라 스위스를 교육 강국으로 변모시켰다.
무훈정신에 대한 비판과 삭제 및 망각
그렇다면 왜 지금 사람들은 무훈에 대해 전혀 모르게 된 것일까?
영화 무훈전은 원래 1949년 이전에 찍었지만 나중에 공산당 혁명정신에 영합하기 위해 추가촬영을 거쳐 뒷부분에 혁명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1950년 연말부터 상영에 들어간 이 영화는 널리 호평을 받았고 극장마다 만원사례였다. 북경, 천진, 상해 매체에서 불과 몇 달간 40여 편의 찬양문장이 발표되었을 정도였다. 1951년 무훈전이 중남해(中南海) 회인당(懷仁堂) 에서 상영되어 유소기(劉少奇), 주덕(朱德) 등 백여 명의 중앙 지도자들이 시청했고 모두들 영화가 아주 좋다고 했다.
문예계, 지식계, 교육계는 물론이고 사회 각층의 여러 명사들이 모두 글을 써서 영화를 찬양했다. 하지만 유독 모택동의 동의는 얻지 못했다. 그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갑자기 방향을 바꿔 2편의 비판문장을 써서 정치적인 입장에서 큰 모자를 씌웠다.
무훈은 뜻밖에도 “봉건통치계급의 노예로 농민 기의(起義)의 적이며 제국주의 침략의 공범”이 되었고 “대건달, 대채권자이자 대지주”로 둔갑했다. 갑자기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선과 악,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전부 뒤집어졌다. 이렇게 되자 아무런 기개나 뜻도 없고 무훈처럼 그런 굳센 정신이 없는 유명인들이 앞 다퉈 그를 비판하고 검토하는 문장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계의 곽말약, 전한(田漢), 하연(夏衍) 등은 즉각 찬양하던 입장을 바꿔 비판에 나섰다. 또 영화에서 무훈 역할을 맡았던 배우 조단(趙丹), 감독 손유(孫瑜)는 나중에 모두 큰 충격과 비판을 받았으며 이 영화로 인해 40여 명이 연루되었다.
중화전통문화는 문화대혁명 시기 크게 파괴되어 뿌리가 끊어지고 단절되었지만 사실 전통문화와 사상에 대한 최초의 강력한 비판은 1951년 무훈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러분 보다시피 성인 무훈은 청나라 정부에서 군벌 및 민국정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왕정위 친일괴뢰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찬사를 보냈으며 심지어 공산정권에 들어와서도 초기에는 모두 찬양일색이었다.
하지만 ‘위대한 영수’ 모택동 일개인에 의해 단번에 뒤집어졌고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조차 가리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조용히 이성적으로 지난 수십 년의 현대사를 되돌아본다면 바로 이 사악한 힘이 갈수로 더 격렬해짐을 알 수 있으며 아직까지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교훈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깊이 반성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훈이 모택동의 비판을 받은 후 중공 중앙에서 조사팀을 만들어 강청(江青 모택동의 부인이자 문화혁명을 일으킨 4인방의 하나)을 조장으로 산동에 가서 조사하게 했다. 당시 80대였던 이한방(李漢邦) 노인은 원래 산동순무 장요 밑에서 병사로 있었다. 북경에서 사람이 나와서 조사한다는 말을 듣고는 “무성인(武聖人)은 좋은 사람이오! 그는 평생 고생을 참아가며 돈을 모아 가난한 집 아이들을 위해 의학을 만들었으니 아주 좋은 사람이오!”라고 말했다.
현지 간부가 급히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무훈은 비판받고 있으니 말을 주의하시오!”라고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중앙조사팀이 다시 방문했을 때 노인은 “뭐라고? 안 들려요, 뭐라는 거요? 귀가 들리지 않아서 못 알아들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라도 차마 양심에 어긋나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귀가 먹은 척 가장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는 더 심각했다. 1966년 여름 산동 관현(冠縣)의 홍위병들이 쇠망치와 정을 들고 ‘네 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4가지를 수립하자’는 구호 하에 무훈의 묘를 파헤치고 남아 있던 유골을 꺼내서는 망치로 산산조각을 냈다. 또 이미 썩은 관과 함께 불태워버렸다. 한백옥으로 만든 무훈의 조각상과 ‘의학정(義學正)’이란 편액조차 모두 파괴되었다. 홍위병은 어째서 무훈과 같은 이런 분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우리 중화민족의 위대한 조상이자 교육계의 아주 특별한 모범이었던 그는 이렇게 해서 더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는 글도 모르고 돈도 없었지만 남의 아이들이 잘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아무리 힘들고 큰 고생을 겪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느 민족 어느 시대든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왔던 것이다. 우리가 그를 따라서 배운다면 이는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도 모르는데 이 얼마나 비참한가! 중화민족의 큰 비애가 아닐 수 없다!
무훈선생을 해방시키자
다음은 도행지 선생이 쓴 ‘무훈송(武訓頌)의 한 단락이다. 무훈정신을 총괄하고 그의 평생을 아주 잘 요약한 작품이니 한번 같이 감상해보자.
무훈송(武訓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주 즐겁게
평생토록 도처로 분주히 다녔네.
고난 받는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낙타가 되어
남에게 이로움을 주려 소나 말처럼 일했다네.
공적인 배경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았지만
교육을 받거나 과거를 본 적도 없다네.
여러 사람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하니 완고한 이들조차 마음을 바꿨네.
재산을 모으거나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큰일만을 하러 왔으니 그것은 바로 학교설립이었네!
朝朝暮暮,快快樂樂。
一生到老,四處奔波。
爲了苦孩,甘爲駱駝。
與人有益,牛馬也做。
公無靠背,朋友無多。
未受教育,狀元蓋過。
當眾跪求,頑石轉舵。
不置家產,不娶老婆。
爲著一件大事來,興學,興學,興學。
1940년대에 도행지 선생은 무훈과 연루되어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무훈선생을 해방시키자’라는 이 글을 지었으니 바로 1940년대에 쓴 것이다. 지금에 와서 봐도 여전히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있다.
“나는 무훈선생은 우리 작은 울타리에 속한 분이 아님을 성명합니다. 그는 어느 한 당(黨)이나 어느 한 파(派)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 당과 여러 파에 속하며 당파가 없습니다. 그는 전체 중화민족에 속합니다. 그는 중화민족 4억5천만 명의 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정말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무훈은 사심(私心) 없는 성인으로 보편적 가치와 인류 공동의 인성이 본래 갖춰야할 선량한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라면 그 어떤 사회 그 어떤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다. 그는 당파를 초월했기 때문에 어느 당파든 그를 부정할 자격이 없으며 어느 국가와 민족도 그를 부정할 자격이 없다!
필자는 ‘천고의 거지 성인 무훈’이란 이 시리즈를 쓰면서 아주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눈물이 너무 많이 흘러 말을 마치기도 힘들 정도였다. 무훈과 같은 이런 인물은 마땅히 우리의 좋은 벗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좋은 스승이나 이로운 벗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에게 이런 벗이 없다면 그럼 우리의 유감이 아닌가?
그는 우리에게 바라는 게 없었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으로도 널리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 교육자로서 우리는 천하에 대해 또 미래에 대해 책임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아이들에게 무훈과 같은 성현을 알려야 하고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려야 한다. 아이들에게 이런 도리를 알려주고, 굴원(屈原)이라든가 악비(岳飛)라든가 강희제(康熙帝)라든가 무훈과 같은 이런 분들을 알려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이런 성현을 알게 하고 이런 아름다운 성현을 따라 성장하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늘날 사회적으로나 교육의 모순이 왜 이렇게 많은가? 왜냐하면 우리의 교육이 이들 성현들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상하관계, 부부관계, 사제관계 등이 모두 혼란해졌고 사람 자신이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성현을 모범으로 삼고, 이들 성현을 참조로 삼는다면 우리 모두는 반드시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필자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여러분이 자아를 조금 더 내려놓는다면 조금 더 선량해지고 그렇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조금만 더 감당한다면 아이들에게도 수확이 있을 것이며 여러분 역시 더 행복해질 것이다.
끝으로 우리 도행지 선생이 쓴 문장을 한번 같이 읽어보고, 진심을 다해 보다 많은 중국인들에게 호소해 우리가 함께 성현을 학습하고 도덕을 굳게 지키며 정통문화를 널리 선양하도록 합시다.
무훈선생을 해방시키자(把武訓先生解放出來)
도행지(陶行知)
“주동적으로 무훈선생을 우리의 작은 울타리 속에 그려 넣었든 아니면 피동적으로 무훈 선생을 우리의 작은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었든 어쨌든 우리에게 작은 울타리가 있기 때문에 무훈 선생 역시 봉쇄된 것이다. 나는 무훈선생은 우리의 작은 울타리에 속하지 않음을 성명하는 바이다. 그는 어느 한 당이나 어느 한 파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각 당 각 파에 속하지만 그에게는 당파가 없다. 그는 전체 중화민족에 속한다. 그는 4억 5천만 명 중의 매 한 사람에게 속한다.
우리 무훈선생을 우리의 작은 울타리에서 해방시킵시다. 무훈선생을 우리의 울타리로부터 4억 5천만 명의 머릿속으로 날아가게 만들어 매 사람이 모두 스스로 움직여 학교를 세우게 하고 모두 자발적으로 배움을 좋아하고 남이 잘 배우도록 도와주어 배움을 좋아하는 중화민족을 만들어냅시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34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