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무사(無思)
【정견망】
왕유(王維 701~761)는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인이자 화가이자 음악가로 “문장은 세상을 압도했고 그림은 고금 제일(文章冠世,畫絕古今)”이었다. 시가(詩歌)에서는 맹호연(孟浩然)과 더불어 당나라 산수전원시의 대표로 불리며 지금까지 많은 작품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선인들은 왕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특히 오언시를 잘 지어 당시(當時)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왕우승(王右丞 왕유)은 마치 가을 물 속의 연꽃처럼 바람 앞에서도 미소를 짓는다.”
“한 마디 한 구절도 세속과 같지 않았다.”
왕유는 특히 부처수련에 정진했고 늘 채식을 했으며 훈채나 육식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옷도 승려처럼 무늬가 있는 것은 입지 않았다. 31세 때 아내를 사별한 후로는 재혼하지 않고 30년을 혼자 살면서 속세의 번잡함을 피했다. 그래서 “마힐(摩詰 왕유의 자)은 대웅(大雄 석가모니)씨의 학문에 정통해 구구절절 성교(聖敎 불교)와 부합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후인들은 흔히 그를 시불(詩佛)이라 불렀다.
하지만 사실 왕유는 시보다는 그림에 조예가 더 깊었고 중국 문인화(文人畵 남종화)의 비조가 되었다. 문인화는 사실 왕유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구당서 왕유전》에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서화(書畫 글씨와 그림)에서도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그 필적(筆跡)의 배치가 조화를 이뤘으며 화의와 구도가 이전과 달랐는데 결함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산수가 평원(平遠)하며 구름봉우리와 바위 색이 조화의 극에 도달해 그림을 그리는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필자는 여기에 《단청기(丹青記)》에 나오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일찍이 왕유가 기왕(岐王 현종의 동생인 이범李範으로 왕유와 친분이 두터웠다)에게 큰 바위 그림을 하나 그려준 적이 있다. 붓 가는 대로 색을 입히자 자연히 천연의 운치가 갖춰졌다. 기왕이 이 그림을 몹시 아껴 늘 홀로 앉아서 그림을 감상하노라면 마치 산속에 들어간 것 같았고 자연스럽게 한가하고 여유 있는 흥취가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수년 후 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갑자기 그림 속의 바위가 날아올랐다. 바위가 날아가는 바람에 건물마저 다 무너졌다. 하지만 대체 어찌된 까닭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그림을 걸어둔 화축(畫軸)이 텅 빈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그림 속에 있던 바위가 날아가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당나라 헌종(憲宗) 시기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했는데 사신이 이렇게 아뢰었다.
“모(某)년 모월 모일 비바람이 크게 몰아치던 어느 날 신성한 숭산(崇山) 위에서 기이한 바위하나가 날아왔습니다. 바위 위에 왕유(王維)의 자(字)와 인장이 찍혀 있어 이 물건이 중국에서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국왕이 감히 사사로이 남겨두지 못하고 이에 특별히 사자를 파견해 봉헌(奉獻)하게 되었습니다.”
헌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왕유의 필적과 대조해보게 하니 형신(形神)이 모두 갖춰진 것이 한치의 차이도 없었다. 헌종은 그제야 왕유 그림이 신묘한 것을 알았고 이에 널리 왕유의 그림을 수집해 궁중에 보관하게 했다. 또 그림을 보관하는 곳에는 모두 닭과 개피를 발라 혹시라도 날아가지 못하도록 눌러놓았다.
전에 장승요(張僧繇)에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신묘함이 있었다면 나중에 왕유가 그린 바위가 날아갔다는 신기함이 있다. 이런 기예의 높고 신묘함은 사람이 믿기 힘들 정도다.
사실 세간의 도(道)는 모두 신(神)과 통할 수 있다. 마치 노반(魯班 춘추시대 노나라의 전설적인 목수)의 신묘한 목공 기예나 편작(扁鵲)의 정묘한 의술도 모두 이와 같다. 관건은 사람 심성의 경지(境界)와 정성의 정도가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76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