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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의시의 기이한 꿈과 기이한 만남

글/ 덕혜(德惠)

【정견망】

중국 근대 강소성 무석(無錫)의 문인 후의시(侯疑始 허우이스) 선생의 본명은 후의(侯毅)이고, 자는 설농(雪農), 호가 의시(疑始)다. 후인들은 보통 그의 호를 부르고 본명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곽측운(郭則沄) 선생과는 문단 친구였다.

곽측운 선생은 정계, 문화계에 교우가 많으며 뜻이 있어서 기이한 일들을 수집했다. 이 때문에 상류 사회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과 자기가 아는 신기한 일을 곽측운에게 알려주곤 했다. 후의시도 예외가 아니어서 자기의 꿈을 이따금씩 그에게 들려주었다.

기이한 꿈

후의시는 일찍이 곽측운에게 분명히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전세(前世)에 승려였다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는 여러 번 뚜렷한 꿈을 꾸었기 때문인데 어느 절에서 자신이 여러 승려들을 거느리고 수행하는 방장(方丈)이었다. 그래서 꿈에서 본 것이 자기의 전생임을 알았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꿈을 꾸었다. 어느 날 꿈에 누가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것을 보았는데 내용은 이미 나한 과위로 수련 성취한 성승(聖僧)이 지옥에서 경을 강의하는 것으로 또 방청권이 붙어 있었다. 그가 받아 보니 방청권에는 성승의 화상이 그려져 있었는데 긴 수염을 지닌 스님이었다.

꿈에 그는 방청권을 들고 다른 사람과 함께 가서 어느 대문 앞에 도착했는데 문이 매우 좁았다. 회의장 같이 문밖에 서명하는 명부가 있는데 온 사람들은 다 서명해야 했다. 붉은 색, 검은색 두 가지 붓이 있었다. 온 사람들은 대다수 생김새가 괴상하고 달랐는데 아마 인간세상의 생명이 아니었다. 그가 다른 사람을 보니 모두 검은 붓을 들고 서명했는데 자신은 붉은 붓을 들고 서명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검은 붓이면 되는데 하필 별나게 하려고 그러는가?”

다른 사람이 말했다.

“이번에 경전을 강의하는 승려가 과거에 그의 스승이었으니 그는 붉은 붓을 써도 됩니다.”

그래서 붉은 붓으로 이름을 적었다.

서명을 한 후 안으로 들어가 걸었는데 그 속에는 우물 같이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통로의 벽에는 왕희지(王羲之)가 베껴 쓴 불경이 있었다. 통로를 다 지나 어느 곳에 도착했는데 경을 강의하는 성승이 신기하고 높은 대 위에 앉아 있었는데 매우 높아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정도였다. 아래의 중생들이 머리를 들어 우러러 보려고 해도 높은 대의 끝을 볼 수 없었고 단지 경을 강의하는 크게 울리는 소리만 위에서 전해져 왔다. 높은 대 양쪽에는 많은 높은 다리가 있었고 다리 위에는 자색 옷을 입은 승려가 서 있었다.

후의시는 어느 높은 다리 아래 꿇어앉아 스님의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아직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소?”

이때 또 어느 자색 옷 입은 스님이 성승이 한 말을 대신 전하며 말했다.

“당신은 여러 세 동안 힘들게 수행했으니 빨리 깨달아 본래 왔던 근본을 잊지 마시오.”

후의시는 묵묵히 이렇게 대답했다.

“놀라 깨달은 지 오래이며 속세의 빚이 적어지면 마땅히 귀의할 것을 맹세합니다.”

대답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속히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원래 온 길을 돌아왔다. 처음의 그 좁은 문을 나오자마자 꿈에서 깨어났다. 이 꿈은 매우 뚜렷하여 오래 지나도 꿈의 장면이 여전히 눈에 역력했다.

후의시가 꾼 기이한 꿈은 사실 그의 원신(元神)이 몸을 떠나 다른 공간에서 진실하게 겪은 일이다. 이번 경험으로 후의시는 자신이 여러 세 동안 수행했던 사람임을 알았으며 육체는 껍질일 뿐이고 사람 생명의 본질은 원신이며 원신이 윤회전세(輪回轉世)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옥 등 전설에서 말하는 다른 공간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윤회를 벗어나려면 오로지 수행하여 정과를 얻어 신이 되는 길 뿐이다. 무신론은 큰 잘못이며 사람을 잘못 이끄는 사설이다.

기이한 만남

1917(정사년) 봄 후의시는 잠시 상해에 왔다가 민후리(民厚里)의 여(呂)모 씨 집에서 묵었다. 민후리는 당시 상해의 옛 지명으로 지금 위치는 대략 정안가리(靜安嘉里) 중심 일대이다.

어느 날 떠돌이 스님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1917년) 천진에 큰 홍수가 날것이며 겁난이 매우 클 겁니다. 저는 보타산(普陀山)에 제단을 차려놓고 법사(法事)를 행해 액겁(劫)을 줄이고자 합니다. 지금 특별히 이곳에 온 이유는 화연(化緣)으로 선연(善緣)을 맺으러 온 것이니 빈부를 막론하고 돈은 받지 않고 오직 한 사발의 쌀만 받겠습니다.”

이 스님은 사람의 얼굴만 봐도 확실히 상대방의 나이를 알 수 있어서 모두들 놀랍고 신기하게 여겼다. 여(呂) 씨 동생의 아내가 병이 났는데 늘 몸이 차서 이 병에 대해 외부인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 스님은 정확히 알아냈다. 여 씨가 그 말을 듣고 이 분이 고승임을 알고 그를 청해선 제수씨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이것은 지난 세의 묵은 업이라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특정한 불경을 어느 정도 외워야만 비로소 치유할 수 있다면서 어떻게 경을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여 모의 제수씨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감격하여 반드시 돈을 내어 돕겠다고 했다.

그녀에겐 당시 비상금으로 은전 10개가 있었는데 전부 다 내려고 했다. 하지만 스님은 오히려 6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여자가 은전을 가지러 갔는데 자신의 비상금에서 남편이 4개를 가져갔고 실제로는 6개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스님을 더 믿게 되었다. 그녀가 돈을 가져다 스님에게 바치려 했으나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빈승(貧僧)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시주께서 6개의 은전을 가져다 향과 촛불을 사서 부처님께 올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스님은 또 그녀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당신은 지금 이미 임신했는데 곧 딸을 하나 낳을 겁니다. 하지만 애석하게 한 달 후 아이는 요절할 것이며 2년 후 다시 회임하여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후의시는 상해에 자주 갔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여모의 제수씨는 경건하게 불경을 수차례 읽은 후 병이 나았고 스님이 말한 것처럼 딸에 대한 예언도 그대로 실현되었다.

후의시는 당시 불교 신앙문제에 대해 이 스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는 후의시더러 전생에 스님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늘 꿈에서 보던 장면과 일치했다. 아울러 그에게 그해 아들이 생길 것을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다.

후의시가 물었다.

“당신은 이미 수도하여 나한 과위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스님이 즉시 대답했다.

“그저 약간 관상을 보는 술류(術類)에 통했을 뿐입니다.”

후의시가 또 물었다.

“제가 50세 이후 출가하고 싶은데 해도 되겠습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당신은 왜 하필 출가하려 합니까? 집에서 수련하는 스님도 과위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떠나갔다.

스님이 막 나가자 여 씨의 한 친척집의 여자가 들어오자 방금 겪었던 기이한 일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녀의 집은 홍구(虹口)에 있었는데 여씨의 집과는 몇 리(里) 떨어져 있어서 왕복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렸다. 여자가 돌아간 후 이 친척집의 사람이 여모에게 말했다.

“그날 이 여자가 막 문을 나가서 민후리로 간 후 어느 떠돌이 스님이 왔는데 법사를 행하려 한다고 하며 역시 쌀 한 사발만 원했답니다.” 생김새도 그 승려와 같았는데 시간을 따져보니 그는 여 씨와 친척집에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며칠 후 여모의 어떤 친구가 진강(鎭江)에서 와서 며칠 전 겪었던 기이한 일을 말해주었다. 역시 이 떠돌이 스님이 법사를 열려고 하는데 돈은 받지 않고 한사발의 쌀만 받는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의원이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스님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의원의 과실을 말하자 의원은 더 이상 감히 저지하지 못했다.

날짜와 시간을 추산해보니 이 떠돌이 스님은 적어도 민후리, 홍구, 진강 세 지역에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이 스님은 반드시 신통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으며 신승(神僧)이 분신한 것임을 알았다.

곽측운 선생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그렇다면 1917년 천진에 정말 수재가 있었는가? 자료를 조사해보니 그해에 큰 홍수가 있었다. 1917년 초 화북(華北) 지역에 먼저 거대한 가뭄이 있었다. 그러나 7월이 되자 두 개의 동남 연안에 태풍이 상륙하더니 북상하여 화북 지역의 강수량이 급증했다. 7월 중순 폭우가 계속 오고 대규모 산사태 홍수가 나서 조백하(潮白河), 영정하(永定河), 북운하(北運河)가 잇달아 터졌다.

홍수는 영정하에서 갑자기 바다로 들어갔고 여러 곳의 홍수가 천진에 모여 오랫동안 물러가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이 거대한 재난을 당했고 화북 지역은 거대한 재난구역이 되었다. 8월 경 또 설상가상으로 큰 해일이 나타났고 11월이 되어서야 홍수가 점차 물러갔다. 또 재난 후의 구호는 1918년 상반부까지 계속되었다.

다행히 구호가 제때에 이루어졌다. 당시 총통이던 풍국장(馮國璋)이 이 사태를 매우 중시했으며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이 노동력이 부족하여 재난을 당한 청장년들이 이 때문에 유럽으로 돈벌이를 떠났다. 아마 이런 행운의 뒤에 불문의 고인이 자비를 베풀어 재난을 삭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후의시의 기이한 만남은 수련인의 신통과 자비가 진실로 존재함을 입증한 것이다. 수련은 위대하고 진실한 것이다. 또 떠돌이 스님이 말한 “집에서 수련하는 스님도 정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는 이 말의 뜻은 깊어 수련에 반드시 출가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 세계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 파룬궁(法輪功)은 바로 기공의 형식으로 전해진 불문(佛門)의 정전(正傳) 공법으로 진정한 불법(佛法)이다. 또 출가할 필요도 없고 집에서 수련해도 정과를 얻을 수 있다. 또 파룬궁은 쉽고 명백한 언어로 심오한 불리(佛理)를 명백히 논술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불법이다. 인연 있는 많은 분들이 법을 얻을 기회와 인연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료출처: 곽측운 《동령소지(洞靈小志) 2권 후의몽유승(侯毅夢、遊僧)》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5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