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봉신연의》의 ‘의(義)’를 말하다

글/ 여일(如一)

【정견망】

《봉신연의》의 의(義)는 《삼국연의(三國演義)》나 《수호전(水滸傳)》에 표현된 ‘의’의 내함(內涵)과 표현이 모두 다르다.

《삼국연의》과 《수호전》의 등장인물들이 배운 것은 모두 18반 무예로 완전히 사람 속의 기능을 사용해 자신을 지키고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런 무술(武術)에도 도덕에 대한 요구가 있어서 강한 힘을 믿고 약자를 능멸하지 말아야 하며 의협심이 강해야 한다는 등이다. 그래도 이들이 주로 따르는 것은 유가(儒家) 군자의 표준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다.

한편 《삼국연의》의 ‘의(義)’는 국가대의(國家大義)로 개인들 사이의 강호(江湖)의 의리 역시 국가대의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가령 유비・관우・장비 삼형제의 도원결의(桃園結義)는 당면한 적(즉 황건군)을 깨뜨리고 공을 세우는 것을 중심에 두고 하루 빨리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유비가 세 번이나 제갈량(諸葛亮)을 찾아갔다는 감동적인 삼고초려(三顧草廬) 이야기 역시 천하대업(天下大業)을 위한 것이고 위촉오 세 나라 사이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의 대결 역시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가 여부를 둘러싼 것으로 이 역시 국가대의다.

반면 《수호전》의 ‘의’는 개인 사이의 고만한 강호의 의리이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십팔반무예를 지니고 관부에 쫓겨 양산(梁山)에 올라갔기에 비록 의협심은 있지만 가슴에 담은 것은 국가나 천하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작은 집일 뿐이다. 비록 모두들 양산박에 함께 모였지만 추구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재산을 나누고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고 마시는 것으로 오늘 마실 술이 있으면 오늘 실컷 취하는 식이다. 때문에 강호의 의리만으로는 큰일을 이루기 어렵고 결국에는 각자 서로 다른 결말을 맺는데 하나도 완전해서 결함이 없는 이가 하나도 없다.

《삼국연의》와 《수호전》 속에도 물론 개별적인 수련인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이 신통(神通)을 펼치기란 아주 어렵다. 《수호전》의 화화상(花和尚) 노지심(魯智深)은 ‘망화상(莽和尚)’으로 불릴 정도로 선장(禪杖) 하나로 무공을 펼쳐 보이지만 그리 조예가 가장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의 시각에 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운이 좋다고 보았다. 실제로는 신불(神佛)의 보호가 있는 것으로 최후에는 정말로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원적(圓寂)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노지심이 수련하는 사람임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다.

한편 《삼국연의》의 제갈량은 천지(天地)를 경륜(經綸)할 수 있는 뛰어난 재주를 지닌 반신반인(半神半人)에 속하지만 그의 신적(神跡)은 여전히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드러나며 의(義)의 표현 역시 노심초사하거나 노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죽을 때까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鞠躬盡瘁 死而後已) 진정으로 그의 신적을 드러낸 사례가 있다면 하천에 들어가기 전에 강변에서 돌로 팔진도(八陣圖)를 배치한 것이다. 단 애석하게도 육손(陸遜)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했을 뿐 백만 정병을 포위하는 신적을 펼쳐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육손이란 인물은 아직 하늘이 그를 멸망시킬 시기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떤 노인이 배치되어 그를 구해 진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하지만 《봉신연의》에서는 이것과 다르다.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배운 것은 18반 무예가 아니며 이들은 모두 수련하는 사람들이다. 산상(山上)에서 어느 정도 수련된 후 사부의 명을 받들어 산에서 내려와 조정을 보좌한 것이다.

과거에 “한 가지 재주가 뛰어나면 세상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다(一招鮮,吃遍天)”는 말이 있다. 이들 중 방문좌도(旁門左道)는 오직 단 한 가지 초식만으로도 천하에 적수가 없어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 이들이 자기 문파를 지키고 나라를 수호할 때 사용한 것은 난폭한 힘이 아니라 신통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수련인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강호의 의리 따위의 그런 의협심은 많이 없고 그들이 따르는 것은 그들 그 한 문(門) 중의 법(法)이며 사부의 요구에 따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그들이 표현하는 ‘의(義)’는 바로 천의(天意)이며 천리(天理)에 따라 일하는 것이다.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자는 곧 복보(福報)가 있고 하늘의 뜻에 거슬러 행하는 자는 곧 악보(惡報)를 받는다.

여우 요정 소달기(蘇妲己)는 여와낭랑의 명을 받들어 성탕(成湯)의 천하를 어지럽히려 했다. 왜냐하면 성탕의 기수(氣數)가 이미 다했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 멸망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기는 신의 뜻을 어기고 군주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향락을 누리길 원했으며 중생을 잔혹하게 해쳤고 진정으로 무왕(武王)이 주를 토벌하도록 돕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의 최후는 목을 잘라 사죄해야 했다.

또 상나라 주왕(紂王)은 신을 공경하지 않고 여와낭랑의 신상(神像)을 보고 순간적으로 음심(淫心)을 일으켜 여우요정을 불러들였다. 또한 수련인인 운중자(雲中子)와 조정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자기고집을 부려 멋대로 살육하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나라를 불태우고 자멸해버렸다.

한편, 주나라 무왕은 자신은 신하이고 주왕을 군주라 여겼다. 비록 하늘이 상나라을 멸하려 하지만 자신이 병사를 일으켜 주왕을 토벌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윗사람을 범하는 것으로 사람 사이의 이치에 위배된다고 여겨 진심으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선을 권하는 강자아(姜子牙)의 권고를 듣고 그 말에 따를 수 있었으며 강자아를 ‘아보(亞父)’라 존칭하면서 그를 신임했다. 그러므로 하늘의 뜻에 따라 병사를 일으켜 주를 토벌했고 자신을 도우러 온 모든 수련인들을 예의 바르게 상대하며 몹시 존경했다. 비록 끝가지 각종 마난이 중첩되긴 했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거뒀고 천하통일의 영광과 위엄을 얻었으니 이는 그가 하늘의 뜻에 순응해 복을 얻은 것이다.

삼교(三敎)가 애초 봉신방(封神榜)을 세우고 그 교주들은 각자 자기 문파의 제자들에게 멋대로 수행 장소를 떠나 살신지화(殺身之禍)를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절교(截教) 제자들은 신공표의 세치 혀에 놀아나 속세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범심(凡心)을 움직여 주왕의 학정을 도왔고 심지어 교주마저 살심(殺心)을 움직여 주선진(朱仙鎮)을 펼쳤다. 그 결과 하늘의 뜻을 위배해 스스로 수모를 받아야 했다.

《봉신연의》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에 아주 생생하고 다양하게 천의(天意)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천의를 대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표현해준다.

천의가 이와 같음을 분명히 알아도 속세의 마음(凡心)이 한번 움직이면 겁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반면 심성을 잘 지키고 수련인의 본분을 지키면서 천의에 순응하려 노력하고 무왕의 토벌을 도운 이들은 모두 정신(正神)의 반열에 올라 원만공성(圓滿功成)했다.

오늘날의 인류, 특히 중국을 돌이켜보면 공산당 당문화(黨文化)의 독해(毒害) 아래 사람들은 이미 신(神)을 믿지 않게 되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마음속에 선념(善念)이 없으며 투쟁철학을 신봉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국가대의를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강호의 의리마저도 볼 수 없다.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한다. 불량식품이 도처에 횡행하며 포르노, 도박, 마약이 범람하며 부정부패는 이미 사회풍속이 되었다. 가난은 비웃어도 매춘은 비웃지 않으며 첩을 여럿 두는 것이 신분의 상징이 되는 등등이다.

바로 이렇게 도덕적인 최저선이 없다면 사람들은 모두 신불(神佛)에 의해 소각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런 상태임에도 아직 한 가지 ‘의(義)’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봉신연의》에서 말한 천의(天意)이다. 사람이 여전히 천리(天理)를 인식할 수 있는지 또 천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천의에 순응해 실천하는 사람은 바로 대의지인(大義之人)이니 이번 겁난을 넘기면 생명이 복보를 받게 된다. 반대로 진상을 거절하는 사람은 곧 주왕의 학정을 도우며 천의를 거슬러 행동하는 대악지인(大惡之人)이니 생명이 악보를 받아 겁난을 벗어나기 어렵다.

(중략)

사회가 크게 혼란하고 불안해져야 영웅의 진짜 면모가 드러나는 법이다. 어려움 속에서라야 영웅의 본색과 생명의 고귀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워 보일지라도 당신이 정말로 진상을 알려는 마음을 굳게 먹기만 한다면 관념을 바꾸기란 어렵지 않다.

당신이 천의에 따라 대의지인(大義之人)이 되면 당신 생명이 복보를 얻을 것이고 반대로 천의를 거슬러 대악지인(大惡之人)이 된다면 생명이 겁난을 만나 악보를 받을 것이다. 바로 사람 자신의 일념(一念)에 달려 있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