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이뤄진 우의 공(功)
요임금 재위 72년 대우(大禹)가 천명(天命)을 받들어 수토(水土)를 다스리니 그를 보좌해 함께 물을 다스린 사람에는 백익(伯益)과 후직(后稷), 기(夔) 등이 있었다. 제후와 백성들은 대우의 영도아래 높은 산에 올라가고 깊은 계곡을 건너며 숲을 개간해 길을 내고 산을 뚫고 하천을 소통시키는 치수(治水)의 장도에 올랐다.
(1) 구주를 나누고 구산을 이끌어 구천을 다스리다
중국의 지형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西高東低)라 홍수가 범람할 때에도 하류에 위치한 동부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때문에 대우가 물을 다스릴 때 동쪽을 먼저하고 서쪽을 나중에 했다. 그런데 동부의 여러 주(州) 중에서 북부의 기주(冀州)에 도읍이 있었기 때문에 대우의 치수는 여기서부터서 시작되었다. 그 후 동남방의 연주(兗州)를 다스리고 더 나아가 청주(淸州)를 다스렸다. 이후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서주(徐州)를 다스리고 이후 양주(揚州)를 다스렸다. 양주에서 서쪽으로 형주(荊州)를 다스렸으며 형주에서 북쪽에 있는 예주(豫州)를 다스렸다. 예주에서 서쪽으로 향해 양주(梁州)를 다스렸고 마지막으로 양주 북쪽에 위치해 지대가 가장 높은 옹주(雍州)를 다스렸다.

구주(九州) 대지 위에서 대우는 아홉 갈래 노선에 따라 산을 다스리고 물을 통하게 했다. 각각 견산(岍山)과 기산(岐山)에서 형산(荊山)에 이르렀고, 호구(壺口)와 뇌수(雷首)에서 태악(太岳)에 이르렀으며, 지주산(厎柱山)와 석성산(析城山)에서 왕옥산(王屋山)에 이르렀고, 태항산(太行山)과 항산(恒山)에서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또 서경산(西傾山) 주어산(朱圉山) 조서산(鳥鼠山)에서 태화산(太華山)에 이르렀다. 웅이산(熊耳山)과 외방산(外方山) 동백산(桐柏山)에서 배미산(陪尾山)에 이르렀고 반총산(嶓塚山)에서 형산(荊山)에 이르고 내방산(內方山)에서 대별산(大別山)에 이르렀으며 민산(岷山)의 북쪽에서 형산(衡山)에 이르렀다.
그러자 전에는 산을 삼키고 언덕을 뒤덮던 큰물이 하도(河道)로 돌아갔고 구주(九州) 대지 위에 약수(弱水), 흑수(黑水), 황하(黃河), 한수(漢水), 장강(長江), 제수(濟水), 회수(淮水), 위수(渭水), 낙수(洛水) 등 9개의 하천이 마치 용이나 맥(脈)처럼 생겨나 구주를 널리 돌아 바다로 향하게 되었다.
이는 그야말로 간고하고 호번한 한차례 공정이었고 각 주(州)에서 3만 명씩 9주에서 모두 27만 명의 인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큰물이 올 때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듯이 큰물을 다스리는 것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반드시 천명(天命)을 잇고 성덕(聖德)을 지니며 천시와 지리의 협조를 얻어야지만 큰 공을 이룰 수 있었다.
(2) 성덕을 밝게 드러내니 천지가 돕다
대우는 천하를 두루 다니며 큰 바다를 건널 때는 큰 자라와 악어가 만든 가교(駕轎)를 탔고, 산을 넘을 때는 신룡(神龍)을 몰고 다녔다. 매번 명산이나 큰 늪에 이르면 그곳의 신명(神明)을 소환해 산천의 맥리(脈理)에 대해 자세히 자문한 후에 치수 방안을 정했다.
한번은 대우가 황하 강변에 서서 어떻게 물을 다스릴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때 사람 머리에 물고기 몸을 한 하백(河伯)이 나타나 대우에게 하도(河圖)를 전해주었다. 하도를 얻은 후 대우는 곧 황하를 다스리는 법을 얻었다. 그는 청해의 적석산(積石山)에서 시작해 물길을 소통시켜 섬서(陝西)와 산서(山西) 경계에 있는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렀고 용문산에서 산을 뚫고 문을 만들어 황하의 물이 절단된 산 사이로 흐르게 했다. 또 남쪽으로 화산(華山)에 이르렀고 또 동쪽으로는 하남(河南) 지주산(砥柱山)까지 이르렀다. 다시 동쪽으로 낙수 북쪽의 맹진(孟津)에 이르렀고, 낙수가 황하로 들어가는 곳을 지나 대비(大邳)에 이르렀다. 그 후 북쪽으로 올라가 강수(降水)를 지나고 직접 대평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황하는 9갈래로 나뉘었으니 도해하(徒駭河)가 그중 하나였다. 황하가 9갈래로 나뉘자 그 세력이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다시 하나로 합하니 이 강의 이름을 역하(逆河)라 하며 발해로 들어갔다.
대우가 완위산(宛委山) 정상에 청옥(靑玉)으로 된 글자에 백은(白銀)으로 엮은 금간(金簡)의 서적이 반석(磐石) 아래 봉폐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동쪽으로 순행하면서 이 책을 얻으려 했다. 신인(神人)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의 점화를 받고 석 달간 목욕재계하고 경자(庚子)일에 산에 올라 금간옥자(金簡玉字)의 책을 얻었다. 이후 세 하천의 형세를 깨닫고 치수의 이치에 통달해 온갖 하천을 소통시켜 각자 그 마땅함을 얻게 했다.
대우는 이렇게 줄곧 온갖 어려움을 겪어냈다. 역사책에는 그가 헌원산(軒轅山)을 뚫을 때 기록이 나오는데 산의 바위가 너무 커서 사람의 힘으로는 해내기 힘들었다. 그는 일찍이 큰 곰으로 변해 신력(神力)으로 산을 열었다. 그가 남순(南巡)해서 장강(長江)을 건널 때는 한 마리 황룡이 수면위로 나타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 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를 깜짝 놀라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대우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늘의 명을 받아 전력을 다해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명에 달린 것이니 어찌 황룡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황룡이 대우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배를 버리고 떠나가 망망한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산이 제아무리 높고 강이 험해도 대우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이외에도 대우는 용문산(龍門山)을 뚫을 때 천지를 측량할 수 있는 복희씨(伏羲氏)의 옥간(玉簡)을 얻었다. 이 자는 용문산 깊은 곳 수십 리에 달하는 암굴 속에 있었다. 대우가 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니 신수(神獸)가 야명주(夜明珠)를 물고 길을 인도했다. 약 10리를 더 가자 한 신인(神人)을 만났다. 신인은 대우에게 팔괘(八卦)의 그림을 보여준 후 옥간을 하나 꺼내 대우에게 주었다. 옥간의 길이는 1자 2치로 모두 12시의 수(數)에 부합했으며 해나 달처럼 빛이 났으며 천지를 측량할 수 있었다. 대우는 이 옥간을 잡고 우보(禹步)를 걸으며 천하를 주행했다.
여기서 우보(禹步)란 대우가 창조한 것으로 큰 물가에서 대우가 북두칠성에 따라 걸으면 바람을 일으키고 신령(神靈)을 소환하며 사악한 짐승을 물리치고 돌과 모래를 날릴 수 있었다. 후세 도교에서는 우보에 근거해 여러 가지 기(氣)를 모으고 몸을 닦으며 사(邪)를 물리치고 신(神)을 청하는 술법을 만들어냈다. 대우의 발자취가 신주대지(神州大地)에 두루 미쳤기 때문에 후세에 우적(禹跡)이란 단어는 중국의 대명사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망망한 대우의 발자취 구주를 그렸네(芒芒禹跡,畫爲九州)”라는 것이다.
대우는 이렇게 구주(九州)를 정하고 구산(九山)에 길을 내고 구천(九川)을 다스리는 방대하고 힘든 거대한 공정을 완수했으니 마치 한편의 장엄한 서사시와 같았다. 큰물이 물러난 뒤 평지와 구릉, 깊은 계곡과 높은 산이 드러났다. 옹주와 예주의 물은 청주와 서주로 흘러 나중에 바다로 들어갔다. 양주(梁州)와 형주(荊州)의 물은 양주(揚州)로 흘러 나중에 바다로 들어갔다. 연주(兗州), 익주(翼州)의 물은 각각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구주 대지 위에는 마치 골격과 같은 산과 혈맥과 같은 강이 나타나 만물의 질서가 정연해졌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참고문헌:
1. 《강감이지록》
2. 《역사(繹史)》
3. 《오월춘추》
4. 《태평광기》
5. 《여씨춘추》
6. 《상서정의》
7. 《습유기》
8. 《노사(路史)》
9. 《동신팔제원변경(洞神八帝元變經)》
10. 《포박자》
11. 《운급칠첨》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7/3/5/n8876100.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