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점(一點)
【정견망】
자고로 ‘외유내도(外儒內道)’라고 해서 유가(儒家)의 근본은 도가(道家)의 것이다. 때문에 도가의 상생상극(相生相克)이론은 도가는 물론이고 유가의 사상 속에도 관통되어 있다.
대법(大法)은 일체 법(法)을 포함하는 것이니 당연히 유가와 도가를 포괄한다. 대법을 배운 후 나는 점차 ‘상생(相生)’이 ‘상극(相克)’ 앞에 있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사만물(萬事萬物)과 조화롭게 공생(共生)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만사만물의 다른 면인 ‘상극’(대립성)은 ‘상생’의 뒷면에 위치한다. 이렇게 만물이 조화롭게 공생하지만 그중에는 또 모순과 대립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살아가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가령 즐거움과 고통은 역시 ‘상생’하기에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즐거움은 사람이 향수를 누리는 것을 탐하도록 만들어 업(業)을 짓게 하고 이를 통해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 반면, 고통은 업력을 소멸시켜 덕(德)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 소위 “우환이 있는 사람이 잘 살아가고 편안히 즐기는 사람이 죽는다(生於憂患 死於安樂)”는 말이나 흔히 말하는 “부자는 3대를 가기 힘들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를 말한다.
공산사령(共產邪靈)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모순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투쟁철학을 보급하기 위해 ‘상생’의 이념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말살시키려 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필자가 어릴 때 중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면 교과서에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국경 지대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으로 술법에 정통한 자가 있었는데…중략…그의 아들은 절름발이가 되었던 까닭에 아버지와 아들은 살아남게 되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년 후 내가 발견한 것은 중국 교과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앞뒤로 핵심적인 구절이 각각 삭제되어 있었다.
원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화(禍)와 복(福)은 서로 번갈아 일어나서 그 변화는 짐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국경지대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으로 술법(術法)에 정통한 자가 있었는데, 집의 말(馬)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망쳐서 오랑캐(胡) 땅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위로하였다.
그 집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이 일이 어찌 복(福)이 되지 않으리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을 때 그 말이 호(胡) 땅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축하했다.
그 집 아버지는 말하였다.
“이 일이 어찌 화(禍)가 되지 않으리오?”
집에 좋은 말들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말 타기를 좋아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넓적다리뼈가 부러졌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위로하였다.
그 집의 아버지는 말하였다. “이 일이 어찌 복(福)이 되지 않으리오?”
일 년이 지난 후 오랑캐가 대거 국경을 넘어서 쳐들어 왔다. 젊은이들은 활들 들고 전쟁에 나가 싸웠는데 국경 부근의 사람들은 열 명 중에 아홉은 죽기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은 절름발이가 되었던 까닭에 아버지와 아들은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복(福)이 화(禍)가 되기도 하고 화(禍)가 복(福)이 되기도 하는데 그 변화는 무궁무진하고 심오한 도리는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용출처: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
여기서 보다시피 원래 교과서에 인용된 문장의 앞뒤로 한 구절씩 즉 “무릇 화(禍)와 복(福)은 서로 번갈아 일어나서 그 변화는 짐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와 “그러므로 복(福)이 화(禍)가 되기도 하고 화(禍)가 복(福)이 되기도 하는데 그 변화는 무궁무진하고 심오한 도리는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이다.”가 생략된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노자가 말한 “화는 복이 의지하는 것이고 복은 화가 숨어 있는 것(禍兮福之所倚,福兮禍之所伏)”이란 말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런 이치를 분명히 알게 되면 사람은 자연히 일률적으로 화(禍)를 피하고 복(福)만을 추구하지 않게 되며 또한 죽어라고 목숨을 걸고 남과 투쟁하진 않을 것이다.
‘상생’의 도리는 이처럼 도처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좋은 일이지만 지나친 애호는 오히려 아이를 나쁘게 만들어 이기적으로 변하게 만들며 ‘온실 속의 화초’로 만든다. 반대로 고인(古人)들은 자식을 엄격히 통제하도록 가르쳤는데 아이가 어려서부터 고통스런 단련을 거치게 하면 종종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5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