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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1: 흥미로운 상고 삼대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历史

천명(天命)이 순환하면서 하조(夏朝)가 역사의 무대 위에서 4백여 년을 연기하고 막을 내려야 할 즈음 마지막 임금 하걸(夏桀)이 무대 위로 올라와 ‘자신을 망각하고’ 천도(天道)를 지키지 않으면서 향락과 폭정을 일삼자 ‘하늘에 순종하고 인심을 얻은’ 상조(商朝)가 대신했다.

상조는 또 은상(殷商)이라고도 불리는데, 1928년 최초로 상조의 문물이 대량으로 발굴된 지역의 이름이 바로 은허(殷墟)였다.

역사학자들은 진한(秦漢)이전을 상고(上古) 시기라 부르는데 상고에는 3개의 ‘가천하(家天下)’가 있었다. 즉 하조(夏朝), 상조(商朝) 및 주조(周朝)다. 중국의 역사문화를 말하자면 늘 삼대를 떠날 수 없다. 이에 하상주(夏商周)는 마치 삼형제처럼 일종의 전문술어가 되었고 상고삼대(上古三代) 또는 간단히 삼대(三代)라 한다. 그러므로 상조(商朝)를 또 상대(商代)라고도 한다.

또한 천명이 순환하기 때문에 수백 년 후 상조(商朝)의 수명을 다한 후 장차 또 한 차례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움이 있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얼(妖孼 괴이하고 불길한 징조)이 있다”는 것을 연기하게 된다. 주조(周朝)가 배턴을 이어받아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본받는 도통(道通)과 예와 음악으로 천하를 다스린 예악천하(禮樂天下)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다지고 제도화하는 것을 연기했다. 천리(天理)인 성주괴멸(成住壞滅)에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이에 형이 끝나면 아우가 이어가면서 힘을 합쳐 행동했다.

상고삼대(上古三代)라는 이 전문술어에서 ‘상(商)’은 중간에 있어서 앞에서 보든 뒤에서 보든 이웃한 왕조와 기본적인 스토리가 아주 흡사하다. 마치 모두 자신의 각도에서 동일한 역사명제를 연기한 것처럼 후인들에게 각자의 역사적인 참조와 교훈을 남겨주었다.

가령, 하에 걸왕이 있다면 상에는 주왕(周王), 주에는 유왕(幽王)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천명을 어기고 제사를 문란하게 했으며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 또 걸왕에게 말희(妺喜)가 있었다면 주왕에겐 달기(妲己)가 있었고 유왕에겐 포사(褒姒)가 있었으니 모두 절세의 미인으로 왕조를 종말에 이르게 한 원인이 되었다. 또 상나라의 성탕(成湯)은 걸왕에 의해 감옥에 갇혔고 주나라 문왕 역시 성탕의 후예(주왕)에 의해 감금되었다. 또 삼대를 개창한 세 임금은 지금까지도 성망이 드높고 말세의 세 임금 역시 너무나 유명하다.

또 왕족(王族)의 시조는 모두 일반인과는 남다르게 태어났다. 하나라의 시조 우임금은 율무에 감응해 태어났고, 주나라의 시조 기(棄)는 거인의 발자국에 감응해 태어났으며, 은상(殷商)의 시조인 설(契)은 검은 새에 감응해서 태어났다.

아주 의미심장한 것은 세 조대(朝代)가 돌아가면서 중원 대지에서 수백 년간 뭇 영웅들을 다스리면서 이들의 선조는 오히려 서로 잘 알던 사이였다. 즉 동료 또는 친구였으니 세계는 그렇게 작았다.

대우(大禹)가 물을 다스릴 때 두 명의 조수가 있었으니 하나는 설이고 또 하나가 기였다. 이들은 함께 13년간 물을 다스렸고 마침내 임무를 완성해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대우는 순임금의 조수 사공(司空)이 되었고 설은 사도(司徒), 기는 사농(司農)이 되었다.

대우의 치수. 명나라 구영이 그린 《제왕도통만년도(帝王道統萬年圖)》 삽화.

나중에 대우가 순임금의 제위를 계승한 후 그의 아들이 대우의 종주(宗主)지위를 계승해 하조(夏朝)를 개창했고 설의 후손과 기의 후손은 각자 자신의 봉지(封地)에서 살았다.

설은 ‘상족(商族)’의 시조이고 기는 ‘주족(周族)’의 시조였다. 봉지 역시 달라서 이들의 발상지 역시 달랐는데 상나라는 하나라 동쪽에 있었고 주나라는 아득히 먼 섬서(陝西) 지역에 있었다. 대우의 후대가 왕을 칭한 하나라에서 이들은 오직 자신의 토지를 지니고 각기 상나라와 주나라가 되었다.

상나라를 하조(夏朝) 4백여 년과 비교해보면 하가 가천하(家天下)였듯이 상 역시 가천하였다. 하조가 14세(世)에 끝났다면 상은 14세에 중원의 맹주가 되었다. 상뿐만 아니라 주 역시 마찬가지로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하상(夏商)과 독립해 있었지만 또 하상과 동시에 존재했다.

마치 삼형제가 같은 일을 해도 업무성과는 다른 것처럼 이들은 천명의 배치에 따라 합작의 형식으로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았고 각자 수백 년간 ‘왕천하(王天下)’하면서 중원대지에거 천 개가 넘는 제후국들을 관리했다. 때문에 이들을 각기 하조(夏朝)・상조(商朝)・주조(周朝)라 부른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동일한 무대 위에서 공연하면서 동일한 주제를 연기했다. 그것은 바로 천명은 순환하며 예악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덕을 세우면 흥하고 덕을 잃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기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존중하며 예악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풍채를 펼쳐냈다.

대우가 세상에 있을 때 상(商)과 주(周)의 제1대 선공(先公)은 바로 대우의 조수였고 하조가 집권했을 때는 하 왕조의 제후국이었다. 하가 맹주지위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는 상이 이어받았고 상 역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때 주가 나섰다.

이들은 함께 손을 맞잡고 경천존신(敬天尊神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존중)・예악천하(禮樂天下)의 중화문화를 펼쳐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까지도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제사, 점복, 문자, 이정(彝鼎), 종과 북, 역(易)의 이치, 시서(詩書 시경과 서경), 예악형정(禮樂刑政) 등등이다.

삼대 이후 몇 백 년이 지나 공자가 노나라의 사제(蜡祭 12월에 올리는 납제)에 참가해 제사를 마친 후 안색이 어둡고 탄식하는 모습을 본 제자 언연(偃然)이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시대와 삼대(三代)의 영명한 임금들은 내가 만나지 못했지만 동경하고 있다.”

“우(禹)와 탕(湯),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 그리고 주공(周公)은 이러한 예의로 시비를 구별하였다. 이 여섯 군자들은 예의에 삼가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럼으로써 그 의로움을 분명히 하고, 그 신의를 깊이 헤아렸으며, 허물을 드러내고, 형벌과 어짊을 꾀하고 꾸짖어, 백성들에게 항상 그러함을 보여주었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권세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물리쳐 대중들이 재앙으로 삼았다. 이를 일컬어 소강(小康)이라고 한다.”

‘소강사회’란 단어는 원래 여기에서 기원했다.

“은(殷)은 하(夏)를 잇고 주(周)는 은(殷)을 이었으니 제도의 명칭은 바뀌어도 도(道)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

마치 역사 대희(大戲)의 초기 한 단락에 역사 무대 위에서 하(夏)가 연기하고 있을 때 상(商)과 주(周)는 모두 극장 안에 있었는데 상은 바로 다음 공연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주는 무대 방향으로 나오고 있었다.

참고문헌:

1. 《공자가어》
2. 《예기》
3. 《유례부집(劉禮部集)》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37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