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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2: 한약재 속에서 발견된 사료(史料)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아이가 셋인 집에서 둘째는 늘 무시되기 싶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상주(夏商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조(商朝)의 앞에는 구주(九州)를 확정한 거대한 공을 세운 대우(大禹)가 있고 뒤로는 문무의 도와 예악이 번성했던 주조(周朝)가 있었고 이와 비교해보면 상조는 비교적 소홀히 여겨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갑골문(甲骨文)의 발견과 은허(殷墟)의 발굴은 이 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고학적인 증거를 표준으로 간주하는 오늘날 학자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신사시대(信史時代)’의 첫 번째 조대라 한다.

소위 ‘신사시대’란 ‘전의시대(傳疑時代)’와 상대한 것으로 근대 서양학문이 동쪽으로 진출한 결과물이다. 즉, 문자 또는 출토문물로 사회상황을 증명할 수 있어야지만 신사시대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의(傳疑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니 함부로 논단하지 않고 훗날 연구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간주한다. 은허가 발견되기 전까지 상조(商朝) 역시 ‘전의시대’로 귀납되었고 불행히도 상조 이전의 조대는 아직도 ‘전의’ 속에 있다.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현상인데 주나라 사람들은 상조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었고 상나라 사람들은 하나라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었으며 후대의 여러 조대에서도 줄곧 그 존재를 확신했는데 근대에 와서 도리어 전의가 되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자면 아버지는 확실히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고 아들 역시 조부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아들의 아들 역시 확실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대대로 내려가던 어느 날 조부의 한 자손이 “나는 이 분을 본 적이 없고 유물도 본 적이 없으니 그는 분명 우리 조상이 아닐 것이다. 족보에 기록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 조상이 날조했을지 모른다.”라고 하는 셈이다.

일부 학자들에게 있어 상나라 이전의 조대는 여전히 ‘전의’ 속에 있다. 이는 바로 당문화(黨文化)와 근현대의 변이된 관념이 우리의 ‘덕신고인(德信古人 옛사람에 대한 큰 믿음)’하는 우수한 전통을 ‘수전망조(數典忘祖 눈에 보이는 전적만 중시하고 조상을 망각)’하도록 강요한 후유증 중의 하나다. 다행히 하늘은 호생(好生)의 덕을 지녔기에 자손들이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상나라 유물이 드러나게 하셨다. 현대인들은 갈수록 청성하고 이성적으로 역사의 오랜 먼지에서 점점 더 질서 있게 깨어나고 있으며 상나라 이전의 상고 역사에 대한 고고문물자료 역시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백여 년 전 청나라 말기 북경에서 학질에 걸린 한 경관(京官 중앙관리)이 있었다. 그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구매한 한약 속에 한 가지 약에 인위적인 조각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약재가 바로 용골(龍骨)이었다. 그가 이 용골을 가져다 자세히 조사해보니 새겨진 것이 상고 문자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약국에 있는 용골을 모두 사들여 집에 가져와서는 연구했다.

이 관리의 이름이 바로 왕의영(王懿榮)인데 진사(進士)출신으로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로 있었다. 여기서 좨주란 사실 술과는 무관하며 학문과 관련이 있다. 국자감이란 국가에서 교육을 주관하던 기구로 국자감좨주란 바로 국자감 최고 책임자를 말한다.

[역주: 국자감은 오늘날로 치면 수도에 있는 국립대학에 해당하고 국자감 좨주는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한다.]

한약재 속에 확실히 용골이란 약이 있는데 화석화된 동물의 뼈를 말한다. 용골을 갈아서 가루로 복용하면 신체가 허약한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또 파상풍에도 효과가 있다.

《신농본초경집주》에서는 “진(晉) 지역의 시내와 골짜기 및 태산(太山)의 바위와 물가, 절벽의 구멍 속에 용(龍)이 죽은 곳”에서 난다고 했다. 또 주치(主治)에서는 “가슴과 배 속의 귀주(鬼疰), 정령과 늙은 귀매(鬼魅), 해역(咳逆), 피고름을 설사하는 증상, 징가(癥瘕 역주: 종양)가 단단해진 증상, 어린아이가 열이 나고 간질을 일으키는 증상 등을 치료한다.”라고 했다.

지금부터 백여 년 전 용골의 주 산지가 바로 중국 하남성 북부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 일대였다. 마을 사람들은 늘 땅을 경작하다가 귀갑(龜甲)이나 동물 뼈가 나오곤 했는데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이 뼈들을 수집해서 한약상에게 팔았다.

신(神)이 전한 중의학(中醫學)에서는 용골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이 거의 다 약이 될 수 있다. 가령 백초상(百草霜)은 바로 솥 밑바닥의 검은 재를 말하고 오령지(五靈脂)는 박쥐의 배설물이다. 수많은 상대(商代)의 역사기록이 이렇게 사라졌고 또 많은 것들이 가루로 변해 바람에 따라 흩어져버렸을 따름이다. 이렇게 약으로 마셔버린 역사가 몸을 자보(滋補)할 수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온다.

다행히 아직 다 마셔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전문가를 만났다. 왕의영은 바로 금석학 분야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용골에 새겨진 것이 상고시기 문자라고 확정했다. 갑골문은 바로 이렇게 발견되었다.

몇 년 후 용골의 산지를 찾아냈고 그곳에서 용골뿐만 아니라 고묘(古墓)와 청동기, 고성(古城) 등이 발견되었다. 이 지방은 나중에 은허라 불리게 되는데 바로 은상(殷商)시대의 유적이란 뜻이다.

은허는 일찍이 상조(商朝)의 도읍이었고 고대에는 은(殷)이라 불렸다. 왜냐하면 상조는 또 은상(殷商)이라고도 불렸기 때문이다. 상조가 멸망한 후 은나라 도읍이 버려졌고 땅속에 파묻혀 3천여 년을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28년 중화민국시기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가 은허에 대한 최초의 고고학 발굴조사를 벌인 후 이 휘황한 문명이 비로소 점차적으로 세인들의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사실 은허의 발견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갑골의 출토지로만 알려져 있었기에 역사언어연구소는 발굴에 앞서 그곳을 조사할 가치가 있는 지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당시 파견된 젊은 학자가 탐방해보니 다행히 적지 않은 갑골문들이 지하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역사언어연구소에서 은허에 대한 발굴을 결정했고 뜻밖에도 이곳에서 파천황의 발견이 전개된 것이다.

은허의 발견은 역사적으로 비범한 의미를 지닌다. 더 이상 상조(商朝)의 존재 여부가 문제되지 않았고 고대 중국의 문명은 일찍이 이렇게 휘황찬란했다. 또 “조상들이 족보를 날조했다”고 여기던 ‘후손들’에게 “옛사람들은 남을 속이지 않았다”는 도리를 분명히 알려주었다.

은허에 대한 발굴은 1928년부터 시작되어 이미 89년(역주: 이 글이 작성된 2017년 기준)이 지났다. 현재 개괄적인 상황은 폭과 너비가 각각 6Km로 총면적이 약 36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소둔촌이 바로 상조의 궁궐과 종묘가 있던 곳으로 다시 말해 은허의 중심이다. 원하(洹河)가 전체 유적지 중간을 관통하고 건축물들이 원하 양쪽에 환상(環狀)으로 분포되어 있다.

은허의 발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이미 발견된 유적으로는 궁전, 종묘, 왕릉, 상성(商城), 족읍(族邑), 갑골교혈(甲骨窖穴), 구리를 주조하던 유적, 수공업 작업장, 가족묘지 등이다. 앞으로 어느 날인가 극장이나 정거장이 발견될지 알 수 없다.

1936년 은허에서 YH127 갑골요혈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상나라 왕 무정(戊丁)시대의 왕실문서보관소로 무정 시기 1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또 사모무대방정(司母戊大方鼎)과 부호(婦好)의 묘가 발견되었다. 최근에는 또 하남 언사 유적지가 발견되었는데 상조의 면모가 갈수록 더 분명해지고 있고 또한 갈수록 더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면 상조 초기의 갑골문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금 기다려보면, 언젠가는 그것들이 발견될 날이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당신을 갑골문의 세계로 안내하는 은허갑골학(殷墟甲骨学 带你走进甲骨文的世界)》,상해대학출판사 2007.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7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