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이윤 하나라로 가다
《사기 은본기》에는 이윤이 또 하조(夏朝)에 가서 관리로 있다가 나중에 상(商)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은 아주 간단한데 “이윤이 탕을 떠나 하(夏)로 갔는데 이미 하나라가 추악해져서 다시 박(亳)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즉 이윤이 한때 성탕을 떠나 하나라 조정에 갔지만 정사가 추악한 것을 보고 다시 박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 과정은 아주 길었을 것이다. 이윤이 하조를 위해 일하다가 다시 성탕에게 돌아왔다가, 또 가고 다시 오고 또 가고 다시 돌아오길 앞뒤로 5차례였다. 때문에 《맹자 고자하》에서 “탕에게 5번 나아가고 걸에게 5번 나아간 이는 이윤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하상(夏商)시기의 국가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일국(一國)이 만국(萬國)을 이끈 것으로 제후는 자기 나라를 관리하는 동시에 또 중앙기구에서 직책을 맡았다. 상족(商族)의 선공 중에서도 명(冥)은 조정을 위해 치수하다 순직했고 상토(相土) 역시 하조의 중요 관원으로 무관을 맡았다.
당시 이윤이 하나라 조정에 불려가 임시로 어떤 직책을 맡았거나 또는 성탕이 그를 하걸에게 추천해 어떤 공직을 맡겼을 수 있다. 이런 일은 모두 가능하며 그는 하걸과 성탕 사이에서 5차례를 오갔다.
이윤의 다섯 차례 왕래는 후대에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어진 입장으로 못난 사람을 섬기지 않은 이는 백이였고, 탕에게 다섯 번 나아가고 걸에게 다섯 번 나아간 이는 이윤이었으며, 더러운 임금이라도 싫어하지 않고 낮은 관직이라도 사양하지 않은 이는 유하혜다. 세 분의 길은 같지 않았으나 그 귀결점은 하나인데 하나란 무엇인가? 바로 인(仁)이다. 군자는 역시 인을 할뿐이니 어찌 반드시 같아야겠는가?” 이것은 맹자의 견해다.
“이윤은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해 오미(五味)를 조화롭게 하고 솥과 도마를 지고 다니며 다섯 번이나 걸에게 나아갔고 다섯 번이나 탕에게 나아갔다. 이는 장차 탁한 것을 맑게 하고 위태한 것을 편안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회남자‧태주훈(泰族訓)》에 나오는 이윤에 대한 평가다.
한편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자 당나라의 위대한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은 전문적으로 《이윤이 걸에게 다섯 번 나아간 것을 찬양한다(伊尹五就桀贊)》는 문장을 지었다.
“이윤은 성인이다. 성인이 천하에 나옴에 하(夏)나라나 상(商)나라 자체에 마음을 쓰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데 마음을 쓸 뿐이다. 또 ‘누가 내 말을 따를 것인가? 내 말을 따르는 이는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될 것이고 우리 백성들은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물러나서는 생각했다. ‘탕은 실로 어질긴 하지만 그 공업(功業)은 더디고 걸은 실로 어질지 못하지만 그가 아침에 나를 따른다면 저녁이면 공업이 천하에 미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걸에게 갔다. 그러나 걸은 안 되겠기에 탕을 따랐다. 그 후에 다시 생각하길 ‘그래도 열에 하나라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백성들이 빨리 그 은택을 입게 하자.’라고 하여 다시 걸에게 갔다. 그러나 걸은 안 되겠기에 또 다시 탕에게 갔다. 그렇게 백에 하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보다가 끝내 안 되겠기에 탕의 재상이 되어 걸을 정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윤이 걸왕에게 있을 때 어떤 직책을 맡았을까? 최소한 걸왕 주변의 고위관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걸왕와 함께 술을 마시고 또 간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왕세계(帝王世系)》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윤이 술잔을 들고 걸에게 나아가 간언했다. ‘군왕께서 여러 신하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면 망할 날이 멀지 않사옵니다.’ 걸왕이 듣다가 말을 자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또 요언을 하는구려, 내게 백성이 있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있는 것과 같으니 태양이 망해야만 나도 망할 것이오.’”
이렇게 어리석은 군주를 가까이 모셨으니 이윤은 확실히 쉽지 않았다. 《사기》에는 “이윤이 하걸로부터 박으로 돌아왔다. 북문(北門)으로 들어오다가 여구(女鳩)와 여방(女房) 두 사람을 만나 (자신이 돌아온 이유를 설명한) 〈여구〉와 〈여방〉을 써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여우와 영방은 모두 성탕의 대신으로 이윤이 친구를 만났으니 그 감정이 아주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두 편의 문장은 모두 일실되었고 여구와 여방에 대한 자료도 찾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그 문자에 분명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탕이 대명(大命)을 받들다
이윤은 하걸의 조정에서만 어려웠던 게 아니라 성탕에게 와서도 쉽지 않았다.
비록 이윤이 “황천의 배치로” “탕에게 나아가 하나라를 토벌하고 백성을 구하라”고 온갖 노력을 다해 설득했지만 성탕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비자(韓非子)는 일찍이 이윤의 겪었던 고생에 감동해 〈난언(難言)〉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고시기의 탕은 지극한 성인이었고 이윤은 지극히 지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지극히 지혜로운 이가 지극한 성인을 설득하기 위해 70번이나 간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사실 아주 간단한데 성탕은 새를 잡을 때조차 스스로 그물에 뛰어든 새만을 잡을 정도로 어진 인물이었으니 그가 어찌 스스로 군왕(君王)을 정벌하고 대신 왕이 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고인(古人)들은 모두 군권(君權)은 신(神)이 주신 것이며 군주와 신하는 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군신(君臣)의 도(道)는 신하는 마땅히 전력을 다해 충성을 다해야 하고 군왕에게 잘못이 있으면 나아가 진언할 수는 있지만 만약 천자에 대항해 무력을 사용한다면 이는 신하의 의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늘에 특수한 배치가 있었다. 성탕이 동쪽으로 낙수(洛水)에 이르러 요임금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낼 때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상서중후(尚書中候)》에 이런 기록이 있다. 성탕이 제사에 사용하려던 옥벽(屋壁)이 낙수에 빠지자 옆에 시립해 있던 이가 노란 물고기가 쌍쌍으로 뛰어오르고 검은 새가 물고기를 따라 제단 위에 멈췄다가 검은 옥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옥 위에 붉은 색으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현색(玄色)의 정령(精靈) 천을(天乙)이 신이 하사한 부적을 받자 너는 정벌전에서 하걸을 싸워 이기라고 명령했다. 3년 후 천하가 통일된다.”
고서 기록에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가령 《송서(宋書)‧부서지(符瑞志)》에는 물에서 나온 것이 검은 색 거북이었고 거북의 등에 붉은색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의미는 같은데 바로 천명(天命)을 분명히 드러내 성탕더러 하걸을 정벌해야 하며 또 전쟁에서 승리해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탕혁하명(湯革夏命)’의 원래 의미이니 바로 상천(上天 제)이 상탕에게 천명에 따라 하걸을 대신하는 상조(商朝)를 개창하게 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현대인들은 고대 역사자료 중에서 기이한 현상들에 대한 기록을 봐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 지금의 제한적인 과학 관념에 따라 판단해 잘못 해석하거나 간단히 부정한다. 이는 아주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생명과정 중에 많지 않은 그런 관건적인 곳에서 종종 상상조차 못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이성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거나 또는 경계로 삼겠지만,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은 이를 비웃거나 심지어 원망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모든 상황이 고인(古人) 그곳에서는 이미 아주 여러 번 연기되었을 것이다.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는 이 구절은 누구나 아는 아주 익숙한 구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비춰보지” 않거나 또 정말로 “비춰보려” 하지 않는다. 하걸은 “비춰보지” 않아 망했고, 성탕은 “비춰보았기” 때문에 흥성할 수 있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역사 역시 그리 복잡한 게 아니다.
공갑(孔甲)에서부터 시작해 하늘은 하조(夏朝)에 이미 아주 많은 경고와 시간을 주었다. 만약 하걸이 다시 덕정(德政)을 닦았더라면 역사 역시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하조는 말로(末路)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성탕은 하조의 충직한 신하 관룡봉(關龍逢)이 하걸에게 살해당하자 사람을 파견해 그를 조문했다. 걸왕이 이를 알고 크게 화를 내며 성탕 역시 붙잡아 하대(夏臺)에 감금시켰다.
하지만 성탕의 잘못을 찾아내기란 아주 어려웠고 오래지 않아 걸은 탕을 석방시켜 상으로 돌려보냈다.
이어서 발생한 사건은 아주 뜻밖인데 바로 “제후들이 걸을 배반해 탕에게 귀부했으니 같은 날 오백 나라가 조공을 바쳤다.” 즉, 성탕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하루 사이에 오백의 제후들이 탕이 있는 곳으로 와서 직책을 맡았다는 말인데 어디 그렇게 많은 직책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를 찾아와 귀부(歸附)를 표시한 ‘작은 나라’들이 끊이지 않고 왕래한 것은 분명하다. 아마 하루에 5백이 아니라 며칠에 오백이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흔히 ‘삼(三)’으로 많은 것을 표시하고 ‘칠십(七十)’으로 아주 많은 것을 표시했는데 성탕이 “천하를 차지하는데” 여러 해가 걸렸을 것이고 이윤이 성탕에게 70번 간언한 횟수 역시 정확한 통계가 아닌데 앞서 언급한 오백 나라와 마찬가지 이치다.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제아무리 나쁜 일이 일이라도 성탕에게 오면 또 좋은 일로 변한다.
성탕은 원래 하조(夏朝)의 제후들 중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었으니 바로 ‘하방백(夏方伯)’으로 하나라 왕의 지시를 받지 않고 다른 나라를 징벌할 권한이 있었다.
천명(天命)은 어길 수 없으니 비록 심리적인 장애는 있었지만 성탕은 또 출정했고 사실 이때 그는 이미 노인이었다. 나중에 그는 걸을 토벌하기 전날 지은 〈탕서〉에서 “하씨(夏氏)에게 죄가 있으니 나는 상제가 두려워 바로잡지 않을 수 없노라(夏氏有罪,予畏上帝,不敢不正)”라고 했다.
상제(上帝)란 누구인가? 바로 일체를 주재하는 신(神)을 말한다.
참고문헌:
1. 《맹자‧고자하》
2. 《회남자‧태족훈》
3. 《이윤오취걸찬(伊尹五就桀贊)》
4. 《사기‧은본기》
5. 《상서‧군상(君爽)》
6. 《맹자‧만장상》
7. 《한비자‧난언(難言)》
8. 《상서중후(尚書中候)》
9. 《송서(宋書)‧부서지(符瑞志)》
10. 《회남자‧설림(說林)》
11. 《제왕세계(帝王世系)》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7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