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열한 번의 정벌(十一征戰)
성탕이 부친을 이어 상족(商族)의 군주가 된 이후 원래 조상들의 근거지였던 박(亳)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최초의 조상인 제곡(帝嚳)이 일찍이 이곳에 도읍했었는데 성탕 시기에 다시 박으로 돌아온 것이다. 성탕은 이에 《제고(帝誥)》란 글을 지어 천제께 도읍을 옮기게 된 상황에 대해 정중히 고했다. 몇 년간의 경영을 거쳐 상나라는 문무가 번창한 제후국이 되었다.
갈나라(葛國)는 성탕의 상나라와 이웃에 있었는데 늘 반목했다. 갈나라는 빈곤해서 백성들의 생활도 몹시 힘겨웠다.
어떤 사람이 성탕에게 갈백(葛伯 갈나라 제후)이 이미 오래 전부터 예법에 따른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백성을 대표해 천지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임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큰일인데 어찌하여 진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성탕은 이에 사람을 파견해 그 원인을 알아보게 했다.
갈백은 성탕이 보낸 사자에게 자신은 본래 예법을 위반할 생각이 없었지만 자신은 매번 제사 때 필요한 많은 소와 양이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고 변명했다.
성탕은 사자의 보고를 들은 후 사람을 시켜 살찐 소와 양을 골라 갈백에게 보내주었다.
갈백은 적지 않은 소와 양을 받고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전부다 잡아먹었다.
성탕이 이를 알고 다시 사자를 보내 갈나라에 문의했다.
그러자 갈백은 “내가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우리 밭의 종자는 소출이 좋지 않으니 풍성한 곡물이 없어 상천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고 변명했다. 고인(古人)은 아주 경건해서 원래 하늘에 바치는 제물로 좋지 않은 물건을 쓰지 않았다. 갈백은 자신들의 땅에서 나는 곡식은 전부 하자가 있어 제사에 사용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사람이 물에 비춰보면 자신의 외모를 볼 수 있고 백성들의 상황을 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성탕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탕은 또 박성(亳城)에서 사람을 선발해 갈백의 영지에 보내 대신 농사를 짓게 했다.
갈나라는 아주 가난해서 도와주러온 상나라 백성들의 밥을 먹었다. 성탕은 또 국경 주변의 사람들을 갈나라에 보내 술이며 밥을 보내주게 했다. 그런데 상나라에서 술과 밥을 보내주는 사람들은 모두 노약자나 어린이들이었는데 갈백의 사람들이 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술과 밥을 약탈하곤 했다. 한번은 술과 고기를 주던 아이 하나가 약탈에 저항하다 갈백이 보낸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성탕은 이에 ‘하방백(夏方伯)’이란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하왕(夏王)의 비준을 받지 않고 병사를 보내 토벌했다. 그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가서 포위했으며 갈백를 체포한 후 사형판결을 내렸다.
소위 “파병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정벌 당하는 측에서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야만 파병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하방백 성탕이 다른 나라를 정벌하자 다른 소국과 제후들도 모두 관심을 가졌다.
성탕이 갈백에게 말했다.
“그대가 천명을 공경히 따르지 않았으니 그대를 너그럽게 사면할 수 없고 반드시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소.”
성탕의 이번 행동과 이치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하늘에 알린 의식을 기록한 문장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오래 전에 실전되었다. 이에 하조의 최후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탕이 갈나라를 멸망시킨 후 좋은 평가가 잇따랐다. 갈나라 백성들이 어진 임금의 돌봄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여러 제후국들도 대부분 갈백이 어질지 못해 피살당한 것은 그의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하걸(夏桀) 역시 성탕이 손을 쓰길 원했는데 당시 필경 수천 개의 방국(方國)이 존재했으니 그중에는 누군가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성탕은 계속해서 낙(洛), 형(荊), 소(蘇), 동(董), 온(溫), 시(豕), 위(韋), 고(顧), 곤오(昆吾) 등의 부락과 방국을 정벌했다. 성탕은 가는 곳마다 줄곧 환영을 받았는데 성탕이 동쪽으로 가면 서쪽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원망했고, 또 남쪽으로 진군하면 북쪽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원망했다. 이들이 원망한 이유는 “무엇 때문에 우리를 먼저 정벌하지 않고 나중에 하는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성탕을 자신의 임금으로 인정했고 “우리 임금님을 기다려왔는데 임금님이 오시면 우리도 더는 형벌 받을 일이 없겠구나.”라고 하면서 빨리 자기 차례가 오기를 희망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외치면 많은 이들이 호응하는 것처럼 성탕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휩쓸었다.
맹자는 《등문공하》에서 성탕에 대해 “열한 번 정벌하자 천하에 적이 없어졌다.(十一征而天下無敵)”고 말했다.
이렇게 전과를 올리는 과정에 아마 몇 년의 시간이 쌓였을 것이다. 특히 곤오국은 하조의 심복으로 곤오가 멸망한 것은 하걸의 태양 역시 끝날 날이 온 것이다.
탕혁하명(湯革夏命)-탕이 하나라의 천명을 바꾸다
하걸(夏桀) 연간에 태산(泰山)에서 산이 무너진 후 지진이 발생해서 “사(社 역주: 토지 신을 모시는 곳)가 무너졌다.” 가장 신성한 제당(祭堂)인 하사(夏社)가 갈라져서 무너졌고, 날씨는 더 엉망이었다. “해와 달이 제때에 운행되지 않았고 사계절이 어긋났으며 오곡이 말라죽었고 나라에 귀신이 울부짖었고 학의 울음소리가 십여 일간 지속되었다.”
바로 이렇게 혼란한 상황 하에서 천명(天命)이 바뀔 시간이 온 것이다.
성탕의 군대가 “열한 번 정벌해 천하에 적이 없어진” 과정 중에는 끊임없이 새로 가입하는 제후들이 있었다. 하걸의 동맹국인 위(韋), 고(顧), 곤오(昆吾)를 멸망시켰을 때는 이미 전투력이 아주 막강한 ‘국제연합군’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승리하며 하조(夏朝)의 수도를 압박했다.
이때 하늘이 다시 한 번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늘이 이에 표궁(鑣宮)에서 탕에게 명령했다. ‘내가 하나라에 내린 대명(大命)을 받들라. 하나라의 덕(德)이 크게 문란해 내 이미 하늘에서 그의 명을 끊었으니 너는 가서 그를 주살해 반드시 그를 응징하라.’”
성탕과 이윤 및 또 다른 대신 중훼(仲虺)는 이에 70대의 전차와 5천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리고 서진해서 하나라 국경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 참전한 연합군 앞에서 성탕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명을 설명했다. 이 내용을 사관이 기록한 것이 바로 유명한 《상서 탕서(湯誓)》다.
“오라, 여러분은 부디 내 말을 들어보라. 내가 함부로 행동해 난(亂)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라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천제(天帝)께서 나더러 가서 토벌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지금 너희들은 ‘왜 우리 임금은 우리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우리의 농사일을 버려둔 채 하나라를 쳐서 바로잡으려 하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내 이미 너희들의 이런 말을 들었지만 하나라가 죄를 지었으니 나는 상제(上帝)를 경외하니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노라. 너희들은 아마 ‘하나라의 죄가 어떤 것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라 임금은 가혹한 세금과 무거운 노역으로 백성들의 힘을 다 소모시켰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그에 대해 나태하며 협력하려 하지 않고 ‘이 태양이 언제 없어지려나? 내 차라리 너와 함께 죽겠노라.’라고 말한다. 하나라 걸의 덕행이 이와 같으니 지금 나는 반드시 가야만 한다.”
역사상 남겨진 고대의 전쟁문서 가운데 《탕서》는 아마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할 것이다. 또 아주 의미가 깊다. 원래 고대사회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어서 출정은 군주가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하늘에서 내려온 명령인지 아닌지 다른 제후들이 믿지 못했다면 성탕은 아마 그들을 잡아두지 못했을 것이다.
성탕의 대군이 행진하는 길에 아직 하나라 왕의 영지까지 이르지 못했을 때 하늘에서 폭풍이 몰아쳐 하나라 도성을 무너뜨렸다. 얼마 후 천제(天帝)는 또 신인(神人)을 파견해 성탕에게 알려주었다.
“하나라 걸의 품덕(品德)이 크게 문란하니 너는 가서 공격하라. 내 반드시 너로 하여금 하나라를 크게 이길 수 있게 해주겠다. 나는 이미 하늘의 명을 받았으며 하늘은 축융(祝融 역주: 불의 신)에게 하나라 도성 서북쪽 모퉁이를 불태우라고 명령하셨다.”
성탕이 신의 도움을 받자 연합군의 기세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명조(鳴條 지금의 하남성 봉구封口 일대)에서 양군이 대치했다. 이때 하늘이 또 한 차례 큰 비를 내리니 양군이 만났어도 격렬한 싸움은 거의 없었고 하나라 군대는 이미 패배를 수습할 수 없었다.
하걸은 동쪽으로 패주했으나 결국 성탕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지닌 보옥(寶玉)과 재산 등도 다 몰수되었다.
하걸이 포로가 되면서 수백 년에 걸친 하 왕조 역시 끝났다.
탕혁하명(湯革夏命)이란 바로 이때 성탕이 하걸을 정벌한 것을 설명하는 전문 용어다.
하늘의 배치가 바뀌자(革) 하왕(夏王)에게 부여한 천하를 다스릴 사명을 회수해야 했고, 혁명(革命)이란 바로 이 때문에 발생했으니 다시 말해 하왕의 천명이 제거된 것이다.
《역경(易經)‧혁괘(革卦)》에는 “탕과 무왕의 혁명은 하늘에 따르고 사람에 응한 것이다.(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라고 했다. 즉 성탕이 천명(天命)과 세간 인심(人心)의 향배에 따라 하걸(夏桀)의 천명을 혁파했다는 뜻이다. 혁명이란 이 단어는 원래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혁(革)이란 제거하고 고친다는 뜻이고 명(命)이란 천명이다.
혁명이란 이 단어는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내함(內涵)이 변질되었고 단어에 담긴 뜻 역시 너무 사악하게 변했다. 일신의 이익을 위해 원래 있던 사물을 대규모로 훼손하고 파괴하며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다시 ‘혁명’이라 선전하는 것이다. 언제 천벌이 닥칠지도 모르는 짓이다.
하늘이 하계(下界)의 중생을 보호하기 위해 대대로 큰 덕을 쌓고 금생에도 너그럽고 어질며 성대한 덕을 구비한 상나라 성탕에게 천명을 옮겨준 것이다.
이렇게 한 조대(朝代)가 끝나면서 덕(德)을 핵심으로 하는 중화문화의 내함(內涵)을 연기했다. 부귀란 모두 덕에서 생긴 것으로 설사 천자처럼 귀한 신분이라도 덕(德)이 그 운수(氣數)를 다하면 마찬가지로 끝나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사기》
2. 《맹자》
3. 《묵자》
4. 《상서・탕서》
5. 《죽서기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7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