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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감진(鑑真)화상 일본에 가다

글/ 류신우(劉新宇) 정리

【정견망】

당대(唐代)에 현장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 일과 감진(鑑真)화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계율(戒律)을 전한 것은 중국 불교 역사상 두 가지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감진화상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간 이야기를 소개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생전에 일찍이 제자들에게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계율의 전수는 과거 불교계에서 지극히 신성하고 중요한 대사였다. 과거에 계율을 전수하려면 덕과 학문을 겸비한 고승이 전문적으로 계율을 전하는 도량(道場)을 설치해 모든 계율에 대해 일일이 한 조목씩 자세히 설명해야 했고 그리고 나서 계를 받는 사람이 과연 실천할 수 있는지 자세히 물어보았다. 때문에 종종 계율을 전하는 의식을 전부 끝마치려면 며칠이 걸리곤 했다.

불교는 6세기에 전래된 이래 7~8세기에 전성기에 도달해 일본에서 주요한 종교로 되었다. 하지만 정통적인 불교 전승(傳承)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승려들 중에는 구족계(具足戒)의 자격을 갖춘 고승(불교 계율에는 오계, 팔계, 구족계 등 몇 가지 등급이 있는데 구족계란 바로 불교의 모든 계율을 말한다)이 없어서 일본 불교의 계법(戒法)이 완벽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 불교계의 고승들이 일본 정부에 당나라에서 계율을 전해줄 고승을 초빙해줄 것을 요청했고 아울러 영예(榮睿), 보조(普照) 두 젊은 승려를 당나라에 파견해 계율을 전할 고승을 모셔오게 했다.

바로 이런 역사적인 배경 아래 영예와 보조 두 스님이 무거운 책임을 지고 당 현종(玄宗) 개원 21년(733년 ) 9번째 견당사(遣唐使)를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두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들어온 후 낙양과 장안에서 십년간 불법을 배웠다. 이 기간에 장안에서 도선(道璇)이란 유명한 승려를 초빙해 일본에 가서 계율을 전하게 했다. 하지만 도선의 자격이 충분하지 못했고 또 승려의 수가 부족해 여전히 정규 수계의식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영예와 보조 두 승려는 대안국사(大安國寺)에서 도항(道航)이란 승려를 통해 양주(揚州)에 학식이 깊고 덕이 높아 성망이 높은 감진(鑑真)화상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두 승려는 자신들이 당나라에 온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천보(天寶) 원년 장안 승려 도항, 징관(澄觀) 및 낙양 승려 덕청(德淸), 고려 승려 여해(如海) 등과 함께 양주로 찾아가 감진화상을 뵙고 덕과 학문을 겸비해 계율을 전해줄 스승을 추천해달라고 청했다.

감진은 당나라 수공(垂拱) 4년(688년) 양주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순우씨였다. 어려서부터 각종 학문을 연구하길 좋아했다. 14세에 양주 대운사(大雲寺)에서 출가해 불교 경전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의약학(醫藥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감진이 스무 살 때, 스승인 도안(道岸)율사를 따라 장안과 낙양 두 서울을 유람했다.

당시 도안의 사부 문강(文綱)과 사형인 홍경(弘景) 모두 황제의 부름을 받아 경성에 머물고 있었기에 감진은 이들 명사(名師)들을 따르며 불학을 배웠다. 특히 감진이 학문을 배운 융제(融濟)와 문강(文綱)율사는 중국 율학의 시조로 불리는 도선(道宣)의 제자들이다. 도선은 당대의 약왕 손사막(孫思邈)과도 깊은 우정을 나눴는데 두 사람은 의학과 불학 방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배웠다.

때문에 감진은 스승으로부터 많은 처방을 얻었고, 그중에서 일본에서 지금까지 널리 쓰이는 ‘기효환(奇效丸)’은 감진이 홍경을 통해 도선에게서 얻은 거라고 한다.

영예와 보조가 대명사(大明寺)에 와서 감진을 배알해보니 확실히 학문이 깊고 넓어 ‘세상에 둘도 없는’ 고승대덕(高僧大德)이었다. 이에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감진에게 자신들이 찾아온 뜻을 진술하고 아울러 예를 올리며 진심으로 청했다.

“우리나라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제주(齊州 역주: 산동성 제남시)에서 몇 천 리나 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비록 법(法)은 있지만 법을 전할 사람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밤새 어두운 방에서 찾으려 하는데 촛불이 없다면 어찌 볼 수 있겠는가! 원컨대 스승님께서 이쪽의 이익과 즐거움을 버리시고 해동(海東)의 도사(導師 이끌어주는 스승)가 되시면 어떻겠습니까?”

감진은 평소 일본 상황을 말로만 전해듣다가 이들의 진심어린 태도를 보고 자못 일본이 ‘인연이 있는 나라’임을 느꼈다.

그래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누가 멀리서 온 이번 초청에 응해 일본국에 가서 법을 전하겠느냐?”

그러나 양주 제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상언(祥彥)이라는 승려가 나와 이렇게 말했다.

“저 나라는 너무 멀어서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아득히 먼 바다를 지나니 백 명이 가서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합니다.”

상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감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누가 가고자 하느냐?”

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감진이 세 번째로 입을 열었다.

“법사(法事)를 위해서라면 몸뚱이나 생명도 아끼지 않다! 너희들이 가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갈 수밖에 없겠구나!”

이렇게 단호한 감진의 대답에 좌석에 있던 제자들은 모두 사부의 결심에 감동했다. 또 상언 등 17명의 제자들이 앞 다퉈 스승을 따라 동쪽으로 건너가 계율을 전하는데 동참하기로 했다. 이때 감진스님의 나이는 이미 쉰다섯이었다.

감진이 일본 승려의 초청을 받아들인 후 그는 ‘망망대해’란 자연장애를 극복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더 복잡한 사회적 저항에 맞서야 했다. 이렇게 11년간 여섯 차례나 동쪽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그중 다섯 번을 실패했다.

당나라 천보 2년(기원전 743년) 3월, 감진은 모든 항해준비를 마치고 막 배가 떠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절강 동부 연안에 해적이 출몰했다. 해적들이 등장하자 수행하던 승려들 사이에 또 의견 다툼이 벌어졌다. 도항은 고려 승려 여해(如海)의 학생(學行)이 부족하니 동행해선 안 된다고 여겼다. 여해가 이에 앙심을 품고 관아에 도항 등이 몰래 해적과 소통한다며 무고했다.

회남채방사(淮南採訪使) 반경천(班景倩)이 곧바로 영예, 보조, 도항 등을 체포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영예 등은 약 넉 달간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석방되었을 때 회남채방사는 여전히 “지금 해적이 준동하니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제1차 도항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12월 하순, 감진 일행 85명이 밝은 달밤에 양주에서 몰래 출항했다. 그러나 배가 낭구포(浪溝浦)에 도착했을 때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한 달간 정박하며 배를 고쳐야 했다. 다시 바다로 나아갔으나 양자강 입구에서 또 풍랑을 만나 한 달간 정박했다. 다시 출항했지만 불행히도 구주군도(衢州群島 취저우 제도)에서 암초에 부딪쳐 배에 실었던 물건이 전부 파도에 휩쓸려갔다. 승선한 인원들이 모두 어느 무인도에 올랐다가 관선의 구조를 받아 다시 명주(明州 영파)로 보내졌다. 대부분 고향으로 송환되었고 17명의 승려들은 절강(浙江) 은현(鄞縣)에 있는 아육왕사(阿育王寺)로 보내졌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이듬해 봄, 감진 일행은 초청을 받아 월주(越州 지금의 소흥) 용흥사(龍興寺)에 와서 율법을 강의하고 계율을 전수했다. 천보 3년(744년) 가을에 아육왕사로 돌아왔다. 월주 승려들은 감진이 일본으로 가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관아에 일본 승려 영예가 감진을 유인했다고 고발했다. 관청에서 영예를 체포했고 보조는 민가에 숨어 있어 잡히지 않았다. 영예는 압송 도중에 항주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고 꾸민 후에야 겨우 난(難)을 면했다. 세 번째 계획 역시 이렇게 중단되었다.

천보 3년 겨울, 감진은 먼저 사람을 보내 복건에서 배를 구하고 식량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30여 명을 이끌고 성지 순례를 구실로 비밀리에 작은 길을 통해 복주(福州)에서 모였다. 그러나 양주(揚州) 용흥사(龍興寺)에 있던 제자 영우(靈祐)는 차마 스승이 머나먼 이역으로 떠나는 것을 보지 못해 여러 사람을 선동해 감진의 일본행을 가로막으려 했다. 강동도채방사(江東道採訪使)가 여러 주(州)에 통지하자 황암(黃岩) 선림사(禪林寺)에 있던 감진 일행은 관원에게 저지당해 양주로 강제 압송되었다. 이렇게 4차 시도도 물거품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영예와 보조는 여전히 양주 용흥사에 머물며 감진에 대한 관청의 감시가 느슨해지길 기다렸다. 또 바람을 피해 동안군(同安郡 지금의 안휘성 안경安慶 부근)으로 이주해 무려 3년을 기다렸다.

천보 7년(748년)에 두 일본 승려가 양주 숭복사(崇福寺)로 왔다. 감진은 또 몰래 다섯 번째 도항을 준비했다. 향과 약재를 구입하고 여러 가지 물건을 천보 2년 때와 마찬가지로 준비했다. 감진과 그 제자, 그리고 영예와 보조를 합해 모두 14명의 승려과 기타 동행인원 35명 및 선원 18명 등 모두 60여 명이었다. 이들은 6월 26일 밤 양주 신하(新河)에서 몰래 배에 올랐다. 아직 바다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풍랑을 만나 절강 해변으로 떠밀려갔고 또 삼탑산(三塔山)과 서풍산(署風山)에서 각각 한 달씩 정박해야 했다.

10월 16일 길을 떠났지만 또 심한 폭풍을 만나 바다에서 꼬박 14일간 떠돌다 결국 해남도(海南島)에 도착했다. 그리고 뇌주(雷州)해협을 거쳐 광서·광동·강서·안휘를 거쳐 양주(揚州)로 돌아오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일본 승려 영예는 단주(端州 광동 조경肇慶)를 지나다 세상을 떠나 유골을 타향에 묻어야 했다. 또 시종일관 감진을 수행했던 상언도 길주(吉州)를 지나다 병에 걸려 죽었다.

감진도 무더위에 눈병이 걸려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불행히도 두 눈의 시력을 상실했다. 감진은 비록 연속적으로 이렇게 심한 타격을 받았음에도, 일본 중생들의 불법과 계율에 대한 열망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에 가서 계율을 전하는 것이 불제자(佛弟子)로서 자신의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다. ‘본래 바람대로 되진 않았지만’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다시 여섯 번째 여행을 준비했다.

천보 12년(753년), 일본에서 제10차 견당사로 당나라에 와 있던 후지와라노 키요카라(藤原清河)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특별히 양주로 와서 감진화상을 예방했다. 이에 감진은 견당사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했다. 관청과 다른 승려들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감진과 그 제자들은 10월 17일 밤 비밀리에 배를 타고 양주를 떠났다. 일본 승려 보조는 정산(鄭山)의 아육왕사에서 달려왔다. 이렇게 일행이 모두 합류한 후 24명이 견당사 배에 올라 11월 15일 밤에 닻을 올렸다.

감진 일행은 이렇게 여섯 번째 동도(東渡) 길에 올라 이듬해인 754년 2월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奈良)에 도착했다. 당시 감진은 이미 예순여섯 살의 실명한 노인이었다.

감진은 일본에 온 후 율법을 강의하고 계를 수여했다. 이에 수많은 일본 승려들이 정식 수계의식을 제대로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불교의 불법(佛法)이 일본에서 비로소 완전히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감진은 처음 일본에 도착한 후,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수당(隋唐)시기에 비록 중국 의약 지식 및 서적이 일본에 전해지긴 했지만 일본 사람들은 약물 품종의 진위나 규격, 좋고 나쁨을 가려낼 경험이 부족했다. 감진은 일본에 온 후, 비록 두 눈을 실명하긴 했지만, 코의 후각과 혀의 미각, 손가락의 촉각을 이용해 약물에 대한 지식을 일본인들에게 전수해주었고 과거의 많은 오류를 바로잡았다.

동시에 약물의 보관, 포제, 사용, 배오(配伍) 등의 지식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일본 《황국명의전(皇國名醫傳)》에 따르면 감진이 일본에 건너가 의약지식을 가르쳐 일본인들이 약품을 알아보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서 비로소 일본 의도(醫道)가 완비되었다고 했다. 14세기 이전까지 일본 의도는 감진을 의약의 시조로 모셨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까지만 해도 일본 약봉지에 감진의 그림이 붙어 있을 정도로 그 영향이 크고 깊었다.

감진이 일본에 건너가면서 일본에 성당(盛唐) 문화를 전면적으로 소개했고, 일본의 불학과 의약학 및 공예 기술 등에 모두 불후의 공헌을 남겼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를 과해(過海)대사라 불렀다.

감진은 일본에서 10년간 법을 전하다 763년 6월 21일 나라에 있는 당초제사(唐招提寺)에서 76세를 일기로 원적(圓寂)했다. 감진이 떠나기 1년 전 그의 제자 사탁(思托)이 감진의 형상을 본따 등신대의 건칠협저좌상(乾漆夹紵坐像 옻칠을 한 좌상)을 만들었는데, 현재 당초제사(唐招提寺) 개산당(開山堂) 안에 모셔진 감진의 조각상이다. 일본에서는 최초로 실존인물을 대상으로 제작한 훌륭한 조각으로 일본 미술사에서 중요한 보물의 하나다.

마지막으로 감진화상에게 한 수의 시를 바친다.

해 뜨는 동쪽나라로 건너가 계율을 전하니
망망대해 심한 파도도 두려울 것 없어라
좌절하면 할수록 용기와 의지 더 굳세고
법(法)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바칠 수 있어라
6차례 시도 끝에 마침내 도해에 성공하니
이곳 일본 땅에 완전한 법을 가르쳤네
해 뜨는 나라에서 부처의 인연 맺었으니
과해대사의 아름다운 명성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東渡扶桑傳戒法
滄海淼漫不足懼
愈挫愈勇志愈堅
為法當能舍己身
六次跨海功方成
至此東瀛教法全
日出之國佛緣結
過海大師美名垂

자료출처: 《동정전(東征傳)》 외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5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