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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도 베이지 않고 육신이 썩지 않았던 북위 고승 혜시

글/ 유효(劉曉)

【정견망】

비록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는 불교를 멸하라는 참언을 믿었고 자신 역시 보응을 받아 죽었지만 북위 왕조는 기본적으로 불교를 매우 숭배한 왕조였다. 절대 다수의 황제들이 불교를 숭상했다.

먼저 개국 황제인 태조(太祖) 도무제(道武帝)는 황로지술(黃老之術 역주: 황제와 노자의 술)을 좋아했고 불경 역시 읽기 좋아했으며 무릇 도사나 화상을 보면 늘 경의를 표했다. 또 병사들에게 교란을 못하게 했다. 태종인 명원제(明元帝)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역시 황로지술을 좋아하고 불교를 숭상해 경성 주변 곳곳에 불사(佛寺)와 불상을 세웠다.

당시 태조와 태종 두 황제의 예우를 받았던 법과(法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불도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사람만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세조 태무제 역시 즉위 초기에 태조와 태종의 법을 지켜 승려를 예우했으며 늘 고승을 불러 설법을 듣곤 했다. 태무제가 하(夏)나라의 혁련창(赫連昌)을 평정할 때 그곳에 혜시(惠始)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신적(神跡)이 꽤 많았다.

혜시는 출가 전 성이 장(張)씨였고 하남 청하(淸河) 출신이다. 그는 고승 구마라습이 새 경전을 번역했다는 말을 듣고 장안으로 찾아가 새 경문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는 낮에는 성에 들어가 구마라습이 경을 읽는 것을 들었고 밤에는 성 밖에 나가 백거(白渠) 북쪽에 앉아 가부좌를 했다. 경성 및 인근의 학식 있는 선비들이 모두 그를 존중했다. 유유(劉裕)가 요홍(姚泓)을 소멸시킨 후 유유의 아들 유의진(劉義真)이 장안을 지킬 때 그와 수하들이 모두 혜시를 존경했다.

나중에 유의진이 장안을 떠나고 혁련창의 부친 혁련발발이 병사를 이끌고 추격해와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중에는 출가인도 있었다. 이상한 것은 혜시는 비록 몸 여러 곳에 칼을 맞은 자국이 있었지만 신체에는 조금도 상한 흔적이 없었다. 병사들이 깜짝 놀라 혁련발발에게 보고했다. 혁련발발은 대노하여 시혜를 눈앞에 불러다 놓고 직접 보검으로 찔렀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조금도 상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비로소 두려움을 느껴 시혜에게 사죄했다.

통만성(統萬城) 전투 후 북위 태무제가 혁련창과 싸워 이겼고 위나라 군사들이 하나라의 왕자, 대신, 장교, 후궁 및 궁녀들 수만 명을 포로로 잡고 많은 재물을 빼앗아 돌아왔다. 혜시는 그를 따라 북위로 돌아왔다.

도성에 도착한 후 당시 사람들은 모두 혜시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단지 늘 그가 일부 사람들을 가르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태무제도 그를 매우 중시하여 그를 볼 때마다 존경했다.

혜시는 가부좌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 년 간 한번도 잠을 잔 적이 없다고 한다. 어떤 때는 맨발로 길을 걸었는데 진흙 길을 걸어도 발에 흙이 묻지 않아 두 발은 여전히 하얘서 사람들이 그를 ‘백각사(白腳師 흰발의 스승이란 뜻)’라 불렀다.

태무제 태연(太延 435~440) 연간에 혜시는 팔각사(八角寺)에서 원적(圓寂)했다. 원적하기 전 그는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앉은 채로 떠났고 제자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입적 후 그의 유체는 십여 일을 그대로 두었는데 앉은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안색도 평소와 다름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절 안에 매장되었다.

그러다 태무제 진군(真君) 6년(445년)이 되자 조정에서 성안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할 수 없다고 하는 영을 내렸다. 승려와 여러 사람들이 혜시를 성 밖으로 이장하려고 사람들이 관을 열었을 때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 이때는 그가 원적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난 때였다. 뭇사람들은 혜시가 보여준 기적에 분분히 경탄했고 이때 이장하는데 6천여 명이 따랐다고 한다. 중서감(中書監) 고윤(高允)이 그에 대한 전기를 기록해 그의 덕과 자취를 찬양했다.

혜시의 새 무덤 위에 사람들은 석정사(石精舍)란 절을 하나 세우고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나중에 태무제가 멸불(滅佛)할 때도 석정사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참고자료: 《위서(魏書)·석로지(釋老志)》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7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