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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승려 일행

【정견망】

편집자 주: 일행(一行) 스님은 속명이 장수(張遂)이고, 당나라 고종 영순(永淳) 2년(683년) 지금의 하남성 남악현(南樂縣)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대(唐代)의 유명한 고승으로 당나라 개국공신인 장공근(張公謹)의 손자이자 또한 뛰어난 천문학자다. 일행은 역법(曆法)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양영찬(梁令攢)과 함께 ‘황도유의(黃道遊儀)’와 ‘수운혼의(水運渾儀)’ 등 대형 천문기구를 만들었다. 또 반복적인 추산을 통해 개원대연력(開元大衍曆)을 만들었는데 “천 년이 지나도 오차가 없다”는 찬사를 받았다.

일행 스님은 속명이 장수로 거록(鉅鹿) 사람이다. 당 현종이 불러 “그대는 무엇을 잘하는가?”라고 묻자 일행이 대답했다. “그저 한번 본 것을 잘 기억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현종이 명령을 내려 액정(掖庭)에서 궁궐 내부 인원의 명부를 가져다 보여 주었다. 일행이 명부 한 페이지를 보고난 후 마치 평소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능숙하게 외웠다. 이렇게 여러 페이지를 외우자 현종은 일행의 비상한 기억력에 감탄해 자신도 모르게 어좌에서 내려와 그에게 예를 올리며 성인(聖人)이라 불렀다.

그전에, 일행은 이미 불교를 신봉해 숭산에서 보적(普寂) 사부를 따라 수행했다. 사부는 일찍이 사찰 안에 음식을 장만해 여러 승려 및 사문(沙門)들의 큰 모임을 준비한 적이 있다. 인근 몇 백 리의 승려들이 어김없이 몰려와 천여 명이 모였다. 당시 노홍(盧鴻)이라는 도가 높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숭산(崇山)에 은거하고 있었다.

보적은 그에게 이 성대한 모임을 찬양하는 문장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그 날이 되자 노홍은 자신이 쓴 글을 들고 사원을 찾았다. 보적이 이를 받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종소리가 크게 울리고 향을 피운 후 노홍이 보적에게 청했다.

“내가 쓴 이 문장은 길이가 수천 자에 달하고 더구나 평소 잘 쓰지 않는 벽자(僻字)와 특이한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스님들 중 총명하고 영리한 분을 선별해주시면 제가 직접 전수하겠습니다.”

보적은 곧 일행을 소환했다. 일행이 와서는 미소를 지으며 글을 받아 단지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노홍은 그의 이런 경솔한 태도가 못마땅해 속으로 그를 나무랐다. 잠시 후 불당에 여러 승려들이 모이자 일행이 옷깃을 여미고 들어오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이 글을 외우고 있었다. 성조 및 억양마저 틀림이 없었고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노홍은 한동안 놀라 보적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그대가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마땅히 마음대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배우게 하시오.”

일행은 대연력(大衍曆)을 만들기 위해 이때부터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도처로 다니며 스승을 찾았다. 한번은 천태산 국청사(國淸寺)에 가니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노송 수십 그루가 자라고 문 앞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이 문과 병(屛) 사이에 서 있는데, 원내에서 어떤 스님이 연산(演算)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제자가 내게 산법(算法)을 배우러 올 것이다. 그는 이미 문 앞까지 와 있는데 어찌하여 아무도 안내하는 이가 않느냐?”

말을 마치더니 곧 산가지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는 또 제자에게 말했다.

“문 앞에 물이 흐르는데 계산해 보니 서쪽으로 흐르겠구나, 이 제자가 마땅히 당도했을 것이다.”

일행은 그의 말에 따라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산법을 가르쳐주십사 청했다. 이 승려는 곧 그에게 자신의 산술(算術) 전부 가르쳐주었다. 문 앞의 물줄기는 원래 동쪽으로 흐르던 것인데 일행이 오자 갑자기 서쪽으로 흐른 것이다.

형화박(邢和璞)이 일찍이 윤음(尹愔)에게 말했다.

“일행은 정말 성인이 아닙니까? 한나라 때 낙하굉(落下閎)이 역서를 만들면서 ‘앞으로 8백 년 후에는 마땅히 하루가 줄어야 한다. 이것을 하자면 성인(聖人)이 오셔서 정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올해가 마침 그가 말한 8백년의 기한인데 일행이 ‘대연력’을 만들었고 또 하루의 차이를 계산해냈습니다. 그렇다면 낙하굉이 한 말은 정말 믿을 만합니다.”

일행은 또 도사 윤숭(尹崇)을 찾아가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을 빌려 온 적이 있다. 며칠 후 다시 책을 돌려주러 가자 윤숭이 말했다.

“이 책은 뜻이 깊고 심원해서 나도 여러 해 연구했지만 아직 통달하지 못했다네. 그러나 자네는 마땅히 더 연구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벌써 돌려주려 하는가?”

그러자 일행은 “그 속의 뜻을 분명히 알면 그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쓴 《대연현도(大衍玄圖)》와 《의결(義訣)》을 꺼내 보여주자 윤숭이 크게 탄복했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이 젊은이는 그야말로 안연(顏淵 역주: 공자의 수제자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고 함)이 다시 세상에 온 것이야!”라고 말했다.

나중에 현종 개원(開元) 말년, 배관(裴寬)이 하남부윤(河南府尹)이 되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라 사부님을 대하는 예로 보적 선사를 대했고 밤이나 낮이나 그를 찾아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관이 또 보적을 찾아가자 선사가 말했다.

“지금 막 하던 일이 있어서 자네와 이야기할 틈이 없으니 잠시 쉬고 계시게.”

배관이 조용히 빈방에 들어가서 보니 보적 선사가 얼굴을 씻고 전당에 가서 향을 사른 후 그곳에 정좌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천사(天師) 일행 스님이 오셨습니다.”라는 말이 들렸다.

일행이 들어와 보적 앞에 가서는 절을 올렸다. 이렇게 예(禮)를 올린 후 보적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을 했는데 모습이 극히 공손했다. 보적은 단지 듣기만 하고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밀어(密語)를 끝내자 일행은 다시 절을 올렸고 예를 올리고 나서 또 밀어를 나눴다. 이렇게 세 번 반복했는데 보적은 오직 “그래, 그래”라고만 하면서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일행이 말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더니 남쪽 건물로 들어가 스스로 문을 닫았다. 그러자 보적이 곧 제자에게 조용히 분부했다.

“종을 울려라. 일행 화상이 멸도(滅度)하셨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달려가 보니 과연 보적 스님이 말한 대로였다. 일행이 죽은 후, 배관은 상복을 입고 걸어서 성 밖으로 나가 장례를 모셨다.

주: 보적(普寂)선사는 선종 북종(北宗) 신수(神秀)의 제자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