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상조의 연대
하(夏)를 멸망시킨 후 상(商)이 시작되었고 상조(商朝) 역시 나중에 주(周)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렇다면 상조의 역사는 얼마나 될까? 역사학자들이 수천 년간 토론을 벌여왔지만 아직까지 정해진 결론은 없다. 어떤 이는 600년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5백여 년이라고 하며 어떤 이는 496년이라고 한다. 《사기》에도 상조의 연대는 나오지 않고 하대(夏代)처럼 제왕의 이름과 순서만 나올 뿐 재위한 연수(年數)가 없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말해 상조의 수명은 약 5~6백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하・상・서주(西周) 세 역사시기의 연대는 역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고 수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남겼다. 중국 대륙에서는 1995년부터 소위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 시작되었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 ‘비극(杯具 역주: 悲劇과 발음이 같아서 풍자하는 의미)’이라 불리는데 첫째 국제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심지어 같은 뿌리를 지닌 대만에서조차 불신한다. 둘째, 중국 국내의 책임 있는 학자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2003년 중국사회과학원의 《고사고(古史考)》 제9권에서는 지난 연구 성과를 전면적으로 뒤집혔다.
이 연구가 없어도 상조를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상조의 연대는 기원전 1600~1700년 무렵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상조의 지위와 명망
상조의 지위와 명망 역시 고고학자와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거리로 아직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주제다.
하조는 하(夏) 직속국+ 제후각국이라면 상조는 상 직속국 + 제후각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이 제후국일 때 그 위치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는 하나라 권력중심의 동쪽에 있었으며 또 하나라 직속국의 동쪽에 있었는데 바로 이웃하거나 가까운 이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나라였다.
하조는 황하 상류에 건립되었지만 상조가 하를 대신한 후 권력중심이 ‘상(商)’의 지반으로 이동했다. 상조는 황하 하류에 건립되었다.
상조가 처음 세워졌을 때 도읍은 박(亳)이었다. 그 위치는 대략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시일 가능성이 높다. 성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후 몇 차례 도읍을 옮겼는데 나중에 다시 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후대의 박은 원래 있던 곳이 아니었다.
《제왕세계(帝王世系)》에는 “은나라의 박은 지금의 언사(偃師)다. 그런데 은나라에는 3개의 박이 있었고 2개는 양(梁)나라 1개는 하남(河南) 곡숙(谷熟)에 있어 남박(南亳)이라 했으니 금도(今都)이고 몽(蒙)이 북박(北亳)으로 즉 경박(景亳)이다. 탕이 맹서한 땅은 언사로 서박(西亳)이니 반경(盤庚)이 이주한 곳이다.”라고 했다.
《제왕세계》의 기록 역시 한 가지 설일 뿐이라 후세에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다. 이렇게 된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상고시대 부락이 이주하면서 흔히 지명도 따라가기 때문이다. 가령 상조의 수도를 박이라 하면 이주한 곳에 새로 세운 도읍도 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박이란 이름의 지명이 역사상 여러 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박(亳)이라 하면 이쪽 박인지 아니면 저쪽 박인지 당사자들이 아니면 똑똑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건 큰 문제는 아니다. 상조의 대체적인 위치는 은허(殷墟)가 출토된 이후부터 알 수 있는데 상조 후기의 도성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安陽)현에 있었다.
상조의 세계(世系)
상조의 세계는 성탕(成湯)에서 시작해 주왕(紂王)으로 끝나며 모두 31명의 군주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태음(太乙 성탕)->태정(太丁)->외병(外丙)->중임(中壬)->태갑(太甲)->옥정(沃丁)->태강(太庚)->소갑(小甲)->옹기(雍己)->태무(太戊) ->중정(中丁)->외임(外壬)->하단갑(河亶甲)->조을(祖乙)->조신(祖辛)->옥갑(沃甲)->조정(祖丁)->남경(南庚)->양갑(陽甲)->반경(盤庚) ->소신(小辛)->소을(小乙)->무정(武丁)->조경(祖庚)->조갑(祖甲)->늠신(廩辛)->무을(武乙)->태정(太丁)->제을(帝乙)->제신(帝辛 주왕紂王)
상조의 형태
상조 역사를 말하려면 이 ‘조(朝)’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조(朝)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대일통의 제국이 아니었다. 상조는 하조와 마찬가지로 천자가 천하를 다스리되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제후국들을 거느렸다.
대우(大禹) 시기 도산대회(塗山大會)에서 “우가 도산에 제후들을 모으니 옥백(玉帛)을 든 이가 만국(萬國)이었다.”라고 했다. 즉 일만여 개 제후국의 대표들이 모임에 참가했으며 수많은 방국(方國)들이 천자의 깃발아래 고르지 않게 모였다는 뜻이다. 단지 하(夏)를 천하의 공주(共主)로 받들었을 뿐이다.
하조의 조상인 대우는 공훈(功勳)과 성망이 지극히 높아서 그가 살아 있을 때 많은 용들을 거느렸다. 가령 이웃 국가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하거나 앞장서서 회의를 이끌어 자연히 지도자가 되었다. 즉 하가 종주(宗主)가 되었고 그를 추대한 수많은 소국들이 제후(諸侯)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라 자체는 사실 수많은 나라들 중 하나였고 자신의 영토가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그 지위가 특수한 것이다. 가령 중원을 하나의 큰 교실로 비유하자면 같은 반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생활하기 위해 하(夏)를 반장으로 뽑은 것이다.
제후국들은 또 방국(方國)으로 불렸다.
상(商)은 원래 하의 수많은 방국들 중 하나로 원래 상방(商方)이라 불렸다. 맹자는 “신이 들으니 70리로 천하를 다스린 이는 탕왕입니다”라고 했다. 즉 상방의 당시 영토가 겨우 사방 70리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지금 상(商)이 하를 대신해 반장이 되었으니 바로 상국(商國)이 된 것이다.
여러 제후국들은 의무적으로 “조정에 와서” 종주국에 재물을 바치며 종주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동시에 방국의 내정은 국군(國君) 스스로 관리했으며 종주국은 일반적으로 간섭할 수 없었다. 중원지역에만 일만 여개 방국이 활동했으니 국가가 얼마나 작은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국가였고 지위 역시 독립적이었다.
하지만 제후국의 국군이 덕을 닦지 않거나 덕을 타락시키면 간섭이 필요했다. 천자는 곧 천하 제후 연합군을 이끌거나 또는 덕이 높고 성망이 큰 제후국에 명령을 내려 연합군을 이끌고 그 제후국의 국정을 바로잡거나 심지어 해당 국군을 축출하고 다른 어진 덕을 지닌 군주를 세우게 했다. 심지어 해당 국가를 없애기도 했다.
‘반장’ 노릇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만국이 공주(共主)에게 복속한 이유는 종종 종주국 군왕의 덕이 높고 성망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왕의 덕행에 하자가 있다면 제후들의 존중을 잃었고 ‘반장’을 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제후들의 마음이 떠나고 덕이 떠나면 조현하러 오지 않았다.
《사기》에서는 이를 가리켜 ‘쇠(衰)’한다고 했다.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상은 여러 차례 ‘쇠’했다.
성탕이 상조를 건립했으나 중원에는 여전히 방국이 병존하는 상황이었다. 단지 상(商)이 방국에서 종주로 지위가 변했을 뿐 관리 방식은 이전 조대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가 많은 나라들을 거느리는 국가연맹이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대우 시대에는 제후국이 일만여 개에 달했지만 성탕 시대에는 불과 3천여 제후만 남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칠천여 제후들은 어디로 갔는가? 400여년의 시간 동안 소멸되거나 자연히 사라지거나 다른 나라에 합병된 것이다. 성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확정한 것은 바로 ‘삼천제후대회’였다.
전팔후오(前八後五)로 영역이 일정하지 않다
상족(商族)의 초기 발원지에서 성탕이 왕조를 세울 때까지 즉 “시조인 설(契)에서 성탕까지 8번 천도했다.” 즉 4백여 년간 상의 선군(先君)들이 족인을 이끌고 8차례 천도를 했다는 뜻이다. 또 상조가 건립된 후 약 200년간 또 적어도 5차례 천도했다.
서한의 장형(張衡)은 이에 대해 “은나라 사람들은 여러 번 천도했는데 왕조를 세우기 전에 8번 세운 후에 5번 옮겼다. 상(相 지명)이 황하에 의해 훼멸되면 경(耿 지명)으로 옮겼는데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당시 전체 부락의 이주는 아주 큰 일로 식량과 치중(輜重 군수물자)은 말할 것도 없고 솥이나 사발 등 세간도구도 가져가야 했으며 노인이나 어린이도 데려가야 하고 새로 이주한 곳에서 제사도 지내고 집도 새로 지어야 하는 등이다. 그러므로 이주하는 사람들 역시 이주가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족은 평균 50년에 한 번씩 ‘나라(도읍)’를 옮겼다.
상족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이주를 좋아했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이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이다. 이주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 지난 몇천 년간 연구자들은 아직도 통일적인 답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상인(商人)이 이주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다.
상조를 세우기 전에 솜씨를 시험해 본 거라면 상조(商朝)가 끝날 때 기자(箕子)는 한반도로 이주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고, 상나라 주왕 휘하의 십만 대군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삼천년 후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상 왕실의 후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설에서 성탕에 이르기까지 8번 이주한 것 중 현재 고찰할 수 있는 곳이 4곳이다. 그 범위는 기본적으로 지금의 하남, 산동, 하북 세 성이 만나는 지역으로 매번 밖으로 이동한 후 다시 상구(商丘) 부근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8번째 이주 후 성탕은 박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전 여덟 차례 이주가 박(亳)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미국 역사에서 필라델피아와 같다. 박은 상조 전기 150~200년 사이에 상족인들의 길지(吉地)였다. 성탕이 도읍을 박으로 옮긴 것은 선왕(先王)의 족적을 따른 것이다. 그는 이에 《제고(帝誥)》란 글을 써서 먼 조상인 제곡(帝嚳)에게 자신이 다시 옛 땅으로 돌아온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이후 6대(代) 11왕을 거치며 상나라의 도읍은 줄곧 박이었으니, 상조 전기(前期)에 가장 중요한 성읍이었다. 하지만 상조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도읍이었던 곳은 은(殷)이다. 은 바로 다음이 박이었다.
그렇다면 박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아직 표준적인 답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하남성 상구로 본다.
즉, 상구가 상족의 발상지이자 또한 길상지라 할 수 있다. 상조가 건립된 후 또 다섯 차례 이주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문자 기록이 있고 또 상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중국인들은 “윗집이 아랫집으로 옮기면 한광주리의 식량도 찾을 수 없다(上屋搬下屋,唔見一籮穀)”고 한다. 의미인즉슨 한번 이사를 가면 손해가 아주 크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속담은 상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여러 차례 이주하는 가운데 영역이 더욱 커졌고 국력도 더욱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상서정의》
2. 《서경부(西京賦)》
3. 《사기》
4. 《설에서 성탕까지 8차례 이주를 말하다(說自契至成湯八遷)》, 왕국유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8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