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명심(明心) 정리
【정견망】
반료권(潘了拳 812-861년)은 당대(唐代)의 유명한 고승이다. 모친은 구(丘)씨이고 본적은 복건성 사현(沙縣)이다. 당 헌종(憲宗) 원화(元化) 7년(812년)에 출생했다. 17세 때 출가해 20세 때 매현(梅縣) 음나산(陰那山) 오지봉(五指峰) 아래 초막을 짓고 도를 닦았으며 자호를 ‘참괴(慚愧)’라 했다. 원적한 후 사람들이 단향목으로 그의 법상(法像)을 조각해 기념으로 삼고 참괴조사라 했다. 후인들이 초막을 벽돌 건물로 고쳐 짓고 성수사(聖壽寺)라 했으며 나중에 영광사(靈光寺)로 개명했다.
반료권은 평생 수많은 신기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아래에서는 그중 한두 가지를 말해보겠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반료권이 세상에 나올 때 왼손 주먹을 꽉 쥐고 펴지 않아 부친이 그의 이름을 권(卷)이라 지었다고 한다. 3일 후 마침 한 승려가 마침 집 앞을 지나는데 부친이 어린 반권(潘拳)을 안고 와서 보여주자 아기아 아주 애처롭게 슬피 울었다. 승려가 자세히 살펴본 후 잇따라 “아미타불”을 외우며 붓으로 반권의 손등에 ‘료(了)’자를 쓰자 주먹이 즉시 펴졌다.
이에 이름을 요권(了拳)이라 했다. 부친이 승려의 은혜에 감사해 보답하려 했으니 승려가 받지 않았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머리를 덮더니 만 가닥 찬란한 금광이 비추며 마치 신불(神佛)이 강림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성장한 후 반드시 크게 진보할 것이니 잘 돌보아야 합니다.”
떠나면서 아기가 그에게 미소를 짓자 승려는 “17년 후 다시 만나자”라고 했다. 또 “그는 음나산 오지봉에 터를 열고 도를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떠났다.
그는 아동 시기에 이미 신통을 드러낸 적이 있다. 한번은 그가 몇몇 소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외지에 놀러가고 싶은 생각이 있니?” 모두들 좋다고 하자 요권이 곧 죽엽(竹葉)으로 땅위에 하나의 원을 그렸다. 그러자 소들이 원래 있던 곳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는 “너희들은 눈을 감고 나와 함께 가자”라고 했다. 말을 마치니 이들은 정말 외지로 놀러나갔고 모두들 신이 났다. 며칠을 놀고 돌아올 때 요권이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소가 배불리 잘 먹었는지 살이 통통한지 보아라.” 그러자 과연 원려 선을 그려놓았던 원 안에서 여전히 배부르고 살찐 모습이었다. 이에 모두들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다.
반료권은 17세 때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복건을 떠나 광동성 대포현(大埔縣) 적결사(赤潔寺)에서 반년을 머물렀다. 나중에 또 삼하패(三河壩) 수지촌(手指村) 고찰사(高礤寺)에서 스승을 모셨다. 또 다시 운유행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서쪽으로 매현 음나산 오지봉을 보니 마치 주먹으로 다섯 손가락을 펼쳐 직접 구름을 뚫고 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곳의 숲이 무성하고 여러 봉우리가 사방을 둘러싸며 푸른 물이 휘감는 것을 보고 오지봉 아래 초막을 짓고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음나산 지역에 특산인 편생숙어(片生熟魚)와 무독라(無篤螺)가 요권화상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암자에서 일하던 사람이 계곡에서 잡은 신선한 물고기로 막 요리를 하려던 순간 마침 요권이 이를 발견했다. 요권 화상은 살생을 하면 승려로서 계율을 범하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솥 안에 있던 물고기를 계곡에 다시 방생해줄 것을 권했다. 이미 한쪽이 불에 익었던 물고기는 기사회생했고 이후 대를 이어 번식했다. 이 물고기는 한쪽은 다른 물고기들처럼 희고 다른 쪽은 붉은 색인데 그 색깔이 마치 솥에서 익힌 것처럼 보인다.
[원주: 편생(片生)이란 이곳 방언으로 반은 익고 반은 날것이란 뜻이다.]
또 한 번은 신도들이 사찰에 향을 올리러 오다가 마침 계곡에서 다슬기를 잡아 반찬으로 만들려 했다. 그들이 막 다슬기 꼬리부분을 때어 낸 후 솥에 넣으려 할 때 요권 화상이 이를 발견하고는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살생을 해선 안됩니다.”라고 권했다. 이 말을 들은 신도들이 스님의 권고에 따라 다슬기를 다시 계곡에 방생했다. 이때부터 무독라는 음나산 일대의 특산물이 되었다.
[원주: 무독(無篤)이란 말은 현지 방언으로 꼬리가 없다는 뜻이다.]
반료권은 음나산에서 20여 년을 수행했고 현지인들을 위해 재앙을 없애고 복을 빌어주는 등 무량(無量)한 공덕을 세웠다. 하지만 그 자신은 불법을 널리 알리지 못해 내심으로 부끄럽게 여겨 자호를 ‘참괴(慚愧)’라 했다. 49세에 좌화(坐化)할 때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49년간 얽매임 없다가
오늘 손을 풀어 공(空)으로 돌아가니
만 리 구름 열린 하늘에 달이 떴구나
四十九年無系無牽
今朝撤手歸空去
萬裡雲開月在天
그가 원적한 후 사람들은 그를 ‘참괴조사’라 부르며 존칭했다.
반료권이 세상을 떠난 후 후인들이 초막을 고쳐 벽돌로 된 건물을 만들었고 그의 제자가 사부의 상을 새기려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진 기술이 없었고 생전에 미리 초상화를 그려놓지 않았다. 비록 실력 있는 장인을 초빙하긴 했지만 어떻게 손을 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인이 비몽사몽간에 한 노승이 눈앞에 나타나서는 “조사(祖師)의 상을 새기려거든 나를 보면 됩니다”라고 했다. 장인이 노승을 몇 번 바라보는데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노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장인이 놀라서 깨어난 후 곧바로 칼을 들고 작업을 시작했다. 꿈에 본 노승의 모습을 기억해 한 칼 한 칼 조각하자 사찰의 노화상(조사의 제자)이 보고는 정말 살아 있을 때 조사의 모습과 닮았다고 했다. 그 후 참괴조사는 성수사 전각에 모셔져 신도들의 숭배를 받았고 향불이 끊이지 않았다.
요권이 세상을 뜬 후에도 여러 차례 신기한 일이 있었다. 어느 해에 조주(潮州) 사람이 조사의 명성을 흠모해 음나산에 와서는 조사의 진신조각상을 조주로 가져가 비를 청하려 했다. 나중에 시간을 끌며 조각상을 반환하지 않자 두 지역 사이에 소송이 생겼다. 주의 관리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조사의 조각상을 배에 싣고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조사께서 이곳에 남고자 하시면 물결에 따라 내려가고 그게 아니라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세요.”
이 말을 마치자마자 배가 과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갔고 마침내 소송이 해결되었다.
요권 화상이 창건한 영광사에는 또 두 가지 신비한 수수께끼가 있다.
하나는 영광사 대웅보전 뒷산에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가 있는데 대전 지붕 위로는 단 하나의 나뭇잎도 없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둘째 사찰을 세우기 전에 요권 화상이 측백나무 2그루를 심었는데 수령이 1100년이 넘는다. 지금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었는데 살아 있는 것은 높이가 30미터가 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며 우뚝 서 있다. 반면 고목은 죽은 지 이미 3백년이 지났지만 살아 있는 나무와 마찬가지로 크고 고사했지만 썩진 않았다. 이 두 그루 나무를 사람들은 ‘생사백(生死柏)’이라 한다.
독자 여러분도 알다시피 광동성은 기후가 덮고 습한 곳인데 죽은 지 이미 3백년이 넘는 나무가 온갖 비바람을 맞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어찌 썩지 않을 수 있는가?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82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