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월명(朱月明) 정리
【정견망】
당나라 때 낙양 경애사(敬愛寺) 북쪽 선원에 있던 고승 종간(從諫)은 속성이 장(張)씨로 남양(南陽) 사람이다. 광릉(廣陵)으로 이사한 후 자신의 성을 토착인의 성으로 고쳤다. 신장이 8척에 체격이 건장하고 외모가 아주 특이했다. 장년(壯年) 이후 문득 진리를 깨닫고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선의 이치를 연마했으며 심경이 분명하고 명확해져서 수행한 지 불과 10년도 못되어 많은 고덕지사(高德之士)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낙양에 온 후로는 경애사에 머물렀다.
그러다 당나라 무종(武宗)이 제위에 오른 후 연호를 회창(會昌 841~846년)으로 고치고 멸불(滅佛) 정책을 실시했다. 도처에서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간공은 머리에 검은 천으로 된 모자와 마포로 된 옷을 입고 황보매(皇甫枚)의 온천별장에 숨었다. 별장 뒷산에 숲이 우거지고 크고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한여름이면 간공은 늘 이곳에 단정히 앉아 입정(入定)에 들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짙은 구름이 몰려와 비가 몰아치더니 천둥 번개가 치면서 바위 옆에 있던 큰 박달나무를 내리쳤다. 폭우가 내릴 때 같이 수련하던 여러 형제들은 앞 다퉈 숲속으로 피신했지만 간공만은 조용히 원래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는데 마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형제들이 나중에 그에게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이유를 묻자 간공이 천천히 대답했다.
“단지 저 축생(畜生)이 싫기 때문이다.”
무종이 죽은 후 선종(宣宗) 대중(大中) 초년(初年 847년)이 되자 불교가 다시 부흥했고 간공은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들이 어느 날 광릉에서 부친을 보러왔다가 공교롭게도 사찰 입구에서 서로 맞닥뜨려다. 아들이 많이 커서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이 그에게 예를 올리며 종간스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묻자 종간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저쪽 동쪽 끝에 있소.”라고 했다. 아들이 간 후 그는 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더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애정의 그물을 자르고 속세의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다.
당 의종(懿宗) 함통(咸通) 병술년 5월 종간의 고향집에서 갑자기 그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에서 가족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불교를 잘 봉양하고 선(善)을 쌓고 덕(德)을 닦으라. 빈승(貧僧)은 초가을에 멀리 떠나갈 예정이라 이 편지로 그대들과 작별하노라.”
초가을인 음력 7월 초하루 새벽, 종간은 세수하고 향을 올리며 반복해서 여래불을 외운 후 우측으로 누웠다. 그는 현장(玄章) 등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알려주었다.
“인생이란 난(難)이 많고 세상의 도(道)는 험악하다. 조금이라도 신중하지 못하면 빠져 들어가가 쉽구나. 오직 불법(佛法)에 귀의해 정성껏 수행하는 것만이 정도(正道)이다. 나중에 용화회(龍華會 역주: 미륵불의 법회)에서 다시 너희들과 만날 것이다. 사람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으니 내 오늘 너희들과 잠시 헤어지노라.”
그리고는 이튿날 아무런 병도 없이 생명을 마쳤다. 향년 80여 세였다.
현장 등이 종간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건춘문(建春門) 밖에 시체를 쌓아두는 산림 속에 방치했다. 배고픈 새나 짐승들에게 육신을 보시하려 한 것이다. 3일 후 다시 가보니 종간의 모습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아 새나 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제자들은 시신 위에 떡과 같은 마른 음식을 한층 덮어놓았다. 하루가 지난 후 보니 늑대나 여우 등 동물이 다녀간 흔적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음식만 먹고 시신에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현장 등은 이에 천축 방식으로 시신을 화장한 후 골회(骨灰)를 수습해 길옆에 흰 탑을 한 세웠다. 골회를 탑 안에 안치하고 매년 향불을 올렸다.
자료출처: 《삼수소독(三水小牘)》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7550